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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동반자, 구원이 형님

마루/時雨 2021. 7. 18. 11:31

 

 

사진을 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만난 사람이 수백 명이 넘는다. 나는 30년 전에 사진기를 사면서 서울포토클럽이라는 사진 동우회에 가입해서 30여 년 가까이 활동을 해왔고 뒤에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펜탁스클럽, 라이카클럽, SLR클럽등의 온라인 사진동호회에 가입하여 생활을 했기 때문에 직접 만난 적이 없이 아는 사람도 꽤 많다. 온라인 사진동호회에는 다른 곳에도 몇 군데 더 가입이 되어 있지만 실제로 활동을 하면서 많은 글을 올린 곳은 앞의 세 곳이 전부다. 동호회에 가입하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지식을 얻고 사람들과의 교류를 하게 되는데 내겐 사람과의 만남이 가장 남는 일이었다.

 

사람이 사람과 만나는 일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끊이지 않는 일이고 그 만남이 때로는 인연일수도 있고 우연일수도 있고 악연일수도 있다고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진을 하면서 정말 좋은 분들을 만났고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만났고 오랜 시간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만났지만 그 사진을 통해서 내게 가장 큰 소중한 만남은 구원이 형님이었다.

 

내가 구원이 형님을 만난 것은 가보카메라에서였다. 1997년 초가을 어느 날 내가 가보에 나가 있을 때 어떤 젊은 분이 와서 사진기에 대해서 이것저것을 묻고는 사진을 배우려면 어디에 가서 배우는 것이 좋은 지도 물었다. 그 분은 잘 아는 친구가 가보로 찾아가 보라고 했다는 말도 전했다. 회장님은 늘 하던 것처럼 약간은 무뚝뚝한 태도로 대답을 하시면서 사진을 배우려면 서울클럽에 들어오라고 하셨다. 그 분은 생각해 보겠노라고 하고는 더 얘기가 없어서 나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 다음 달 정기촬영 때에 회장님이 신입회원 한 분이 들어왔다고 하셔서 인사를 하고 보니 먼저 왔던 그 분이었다.

 

그날 이후로 구원이 형님은 가보에 자주 나오셨다. 나도 가보에 자주 나가다보니 회장님과 셋이서 술을 마시는 날이 많았다. 처음엔 주로 회장님이 술값을 내셨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구원이 형님이 계산하는 날이 많았다. 나는 낼 형편도 못되었지만 내지도 못하게 하시고 늘 두 분이 계산했다. 이것은 무척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가보에 10년 가까이 드나들면서 회장님과 술자리를 할 때에 회장님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술값을 계산하는 것을 보지 못했었다. 가보에 오는 사람은 누구나 다 회장님이 술값을 내시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거였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가보 건너편 안 골목에는 허름한 술집들이 많았다. 집이 허름한 대신에 음식 값이 저렴해서 서민들이 가서 한 잔 하기엔 아주 좋았다. 우리는 그 중에서도 동원집이라고 하는 곳을 많이 다녔다. 청양고추를 잘 내어 놓았고 서비스로 장어뼈튀김을 제공해서 내가 좋아한 곳이었다.

 

구원이 형님과 같이 어울리면서 나는 그 집에 가는 횟수가 많이 줄었다. 형님은 참치집 같은 고급음식점으로 가서 술을 살 때가 많았다. 그 덕분에 나는 종로 3가 서울참치와 사조참치에 자주 갔고 광화문에 있는 사조참치에도 자주 갔었다. 우리는 어딜 가나 형님 덕으로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고 좋은 대접을 받았다.

 

형님이 자주 나오던 시절은 우리 서울클럽이 정말 잘 굴러갔다. 성 교수님 모시고 맥주 마시고 춤을 출 수 있는 노래방에 가는 것도 자주 하셨고 다른 회원들과도 좋은 자리에 같이 가는 일이 많았다. 게다가 매주 일요일 새벽이면 사진을 찍으러 사방으로 같이 나갔었다. 그 덕분에 내가 큰 소리 치면서 사진클럽을 이끌어 갈 수 있었다. 사실 형님은 사진에 대한 관심보다 사람을 만나는 일을 더 좋아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촬영을 나가면 사진 찍는 일에 몰두하기 보다는 어디 맛있는 음식점이 있는지가 더 관심이었고 촬영을 끝내고 나면 더 흥이 나는 분이었다.

 

구원이 형님은 내게 무엇이든 아끼지 않고 주셨다. 어린 나이에 만난 것도 아니고 나이가 들어서 만났지만 형님은 정말 수십 년을 같이 한 친동생처럼 나를 대해주셨다. 아니 친동생에게 그렇게 잘 해줄 수 있는 형님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려서야 아주 잘해줄 수 있다고 해도 나이 들어서 결혼하여 분가한 뒤에 친동생을 그렇게 챙긴다면 주변에서 오히려 이상하게 볼 것이기 때문이다. 형님이 늘 내게 하시는 말씀이 우리가 너무 늦게 만난 것이 한이란 거였다. 하기야 좀 더 일찍 형님을 만났더라면 우리 서울클럽의 모습이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 개인적으로도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형님은 내게 한 번도 싫은 소리 한 적 없고 내 부탁 거절한 기억도 없다. 형님은 어른을 모시는 태도 아랫사람을 배려하는 모습 등에서 참으로 좋은 스승이다. 서울클럽에는 나보다 늦게 오셨지만 여러모로 내게 많은 가르침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형님을 만날 수 있게 해준 사진과 우리 서울포토클럽이 고마울 뿐이다.

 

그렇게 한 10년 가까이 지내다가 어느 날 홀연히 형님은 소식을 끊고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내가 형님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었고 형님이 내게 삐삐로 연락을 했는데 어느 날부터 형님의 호출이 없어진 거였다. 나는 형님에게서 호출이 오면 버스에서 내려 공중전화를 찾아 바로 연락을 하곤 했었다. 아주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거의 5분 이내에 전화를 해서 서로 통화했다. 나는 012삐삐가 서비스를 종료하던 2009년까지 10월까지 삐삐를 그게 끝이 난 뒤에 휴대폰을 구입했지만 남들이 다 스마트폰을 쓸 때에 2G 폴더폰을 구입한 거라 그저 통화와 문자주고 받는 것만 가능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연락번호가 사라졌지만 형님 전화번호는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난 뒤 스승의 날 세근이와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형님이 내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서 깜짝 놀랐다. 스승의 날이라고 나를 만나러 홍제동으로 오시겠다는 거였다. 정말 반가웠다. 그래서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집사람을 나오라고 해서 셋이 홍제역 부근 술집에서 만나 같이 마셨다. 형님도 오래 몸이 안 좋았고 형수님도 건강이 안 좋아서 몇 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고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셔서 내가 더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렇게 형님을 다시 만나서 우리는 예전처럼 지내고 있다. 내가 늘 다짐하는 일이 한 주에 두 번 이상은 술을 마시지 말자는 것인데 나는 형님 때문에 이 다짐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형님은 한 주에 두 번이나 한 번은 꼭 만나자고 내게 연락을 주시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모임이라면 거절할 수 있겠지만 형님이 부르면 안 나갈 수가 없다. 형님 건강이 안 좋으면서도 나를 생각해서 불러주는데 어떻게 나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내가 지금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은 친구도 아니고 제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구원이 형님이다. 그러니 어떤 친구보다도 제자보다도 여자보다도 더 가까운 사람이 형님이다.

 

나는 어느 자리에서든 정치얘기는 잘하지 않는 편이지만 형님을 만나면 정치얘기 뿐만 아니라 무슨 얘기든 다 나눌 수 있다. 형님은 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수수하고 수줍은 모습 언제나 그대로지만 이젠 연세가 드신 모습이 조금씩 보여서 걱정이다. 물론 내가 벌써 예순의 나이에 접어들었으니 형님이 어떻게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으랴마는 형님하고는 언제든 똑 같은 모습으로 만나고 싶기 때문에 걱정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