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오판과 편견

3만달러 국가 중 한국에만 있는 것

마루/時雨 2023. 3. 31. 06:11

 

   <최근 만난 원로 한 분의 말씀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세계에 정치가 엉망이고 노조가 심각한 나라가 많다그러나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는 나라 중에 그런 나라는 한국밖에 없는 것 같다.” 선진국들에도 노조가 비타협적인 곳들이 있고민주주의 본산인 구미의 정치 분열도 심각하다그러나 한국 같은 나라는 없다.

 

국민소득 1만 달러가 넘으면 국민이 먹고사는 절박함에서 벗어난다고 한다문화스포츠여가 활동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국가적 자존감도 커진다우리 경우엔 1988년 서울올림픽 후에 1만 달러를 넘어섰고 OECD에 가입했다국민소득 2만 달러가 넘으면 국민과 국가가 촌티를 벗고 글로벌한 시각을 갖게 된다.

 

개방이 봇물처럼 이뤄지고 해외 유학 붐을 이룬다기업도 세계시장으로 뻗어나가고 한국 기업 브랜드가 어딜 가든 눈에 띈다우리 소득이 2만달러가 되기 직전에 월드컵을 개최했고, 2만달러 돌파 직후에 G20에 가입했다.

 

국민소득 3만 달러는 선진국 클럽에 들었다는 징표로 통한다고 한다세계에 소득 3만 달러가 넘는 나라 중에 자원 부국과 도시 국가를 빼면 얼마 남지 않는다그중에서도 인구 5000만 명이 넘는 나라는 7국뿐이다그중 하나가 한국이다.

 

아직 일부의 얘기이지만 G7에 한국을 더해 G8로 만들자는 의견도 있다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한국은 자유세계의 무기고가 되고 있다방위산업 수출 계약 잔액이 100조원을 넘어섰다수입국 중엔 유럽 국가들도 있다.

 

소득 3만 달러가 넘으면 선진국 자의식도 생긴다후진국스러운 사건이 생기면 어떻게 한국에서 저런 일이 일어나느냐라고 개탄한다한국을 경험한 외국인 중에 한국을 선진국이라고 인식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경제가 정치와 노동 없이 홀로 여기까지 발전했을 수는 없다그런데 3만 달러 고지를 넘어선 이제는 정치와 노동이 경제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고 있다경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조한 것이 아니라 30년 전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추락하고 있다. 1990년대 초반에 정치부 기자를 시작해 30년 이상 온갖 정치 행태를 봐왔다과거에는 독재가민주화 후엔 지역 감정 등 국민 분열이 심각하다하지만 저질이란 측면만 보면 지금이 사상 최악인 것 같다.

 

양아치라고 불러 조금도 지나치지 않을 수준의 인물들이 모여서 그중 한 명이 국회의장을 향해 일갈한 그대로 “GSGG(XX)” 정치를 하고 있다공개석상에서 저질스러운 성적 표현을 하고서 짤짤이라고 거짓말하고오스트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도 구별 못 하고()모를 친족 이모로 알고, ‘호가호위의 뜻도 모른 채 대정부 질문을 하고거짓말을 상습적으로 하는 대변인은 거짓말을 잔기술이라고 하고상스런 음모론자는 떠받들며 상식을 말하는 사람은 공격한다이름을 지어도 개국본개딸이라 한다위장 탈당가짜 출당 등 정치사기는 끝이 없다.

 

존재 자체가 희미한 여당의 한 최고위원은 종교단체 하수인 같다야당은 대표 방탄용 맞불을 놓는다며 입만 열면 특검” “탄핵이다특검과 탄핵 같은 중대한 사안이 이미 희화화되고 있다이러는 목적은 오로지 공천이라고 한다저질스러운 싸움질은 연중무휴인데 나라 미래를 위한 고민은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다. ‘네가 하면 무조건 반대인 국회는 연금 개혁조차 논의하는 시늉만 내고 끝냈다.

 

대학 진학률이 70%가 넘고 G8의 후보로 거론되는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저질 정치가 있을 수 있는지한국인은 아무리 소득이 높아져도 정치는 조선 시대 4색 당파 수준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 혀를 차게 된다.

 

세계 노조 투쟁사는 피로 얼룩져 있다노조 부패도 심각했다하지만 1900년대 전반까지 일이다구미에선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중산층이 두꺼워지면서 노조 투쟁은 서서히 폭력이 아닌 협상으로 변화돼 갔다.

 

지금 소득 3만 달러가 넘는 나라 어디에서 키 180㎝ 이상무술 유단자 우대와 같은 채용 공고를 내는 노조가 있나선진국 어디 노조에서 시너 통을 들고 분신자살 협박을 하나노조가 조폭이 되고연봉 1억 노조원이 돈 더 달라고 파업하면서 연봉 3000만원 비노조원들을 착취한다노조 간부들이 평일 골프장에서 억대 뇌물 논의를 한다그래도 노조 회계장부는 극비라고 한다.

 

저질 정치와 저질 노조는 이미 연대해 한 몸으로 가고 있다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노란봉투법과 같은 노조 폭력 면허법을 통과시킨다는 것은 시작일 뿐이다그렇다면 저질 정치저질 노조와 4만달러 경제의 공존도 정말 가능할까가능하다면 한강의 기적에 이은 또 하나의 기적일 것이다.

 

그러나 정치와 노조는 윤리·책임·절제·양식·신뢰·품위의 문제다경제가 우등생이 되면 윤리와 책임 등도 뒤따라 우등생이 되는 게 세계사의 흐름이었다한국만 그 예외가 되고 있다. ‘예외는 오래가지 못한다언젠가 경제도 결국 발목이 잡힐 것이다.>조선일보양상훈 주필

 

  출처 조선일보. [양상훈 칼럼] 3만달러 국가 중 한국에만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