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時雨 2023. 12. 7. 06:18

 

  <몇 년 전 영화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감독상을 받았을 때약간의 인지부조화에 시달렸다.

 

나도 한국인이자 봉준호 감독의 팬인지라 마음이 들뜬 한편으로빈부 격차 문제에 꽤 관심을 가져온 기자로서 이상한 박탈감 같은 게 느껴져서다.

 

빈부 격차와 불평등 문제를 소재로 영광을 차지한 감독배우그리고 제작에 관여한 재벌가 인사에게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사회와현실에선 양극화 완화에 그다지 의지를 보이지 않는 이 사회는 동일한 곳인가.

 

기생충에 대한 폭발적 반응과 열정을 실제로 빈곤 문제 해결에 투입한다면빈부 격차가 이렇게까지 계속 커지고 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이 사회 곳곳의 고통은 예술의 연료로만 이용당하고 소비될 뿐인가한동안 그런 생각을 했었다.

 

지난달 더불어민주당을 발칵 뒤집어 놓은 현수막 시안 문구는 정치는 모르겠고나는 잘 살고 싶어였다. ‘경제는 모르지만 돈은 많고 싶어라는 문구도 있다.

 

이 문구들을 보고 든 첫 생각은 아주 솔직하네였다두 번째 든 생각은 너무 솔직했네였다모욕적이라는 반응과 비난이 빗발쳐서결국 민주당은 사과하고 시안을 철회했다.

 

그 문구들을 비하와 모욕으로 느꼈다는 반응을 보며, “사람들이 이게 모욕이라는 건 아는구나부끄럽다는 건 아는구나라는 안도감도 들었다빈곤·노동·장애인 문제 해소를 위한 정책들이 수없이 좌절되는 과정을 오랫동안 지켜본 입장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잘 사는 데만 관심 있고그걸 아주 떳떳하게 여긴다는 인상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욕이란 걸 안다고 해서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나의 단점이 무수하다는 걸 알지만그 단점을 글로 써서 누군가 걸어 놓는다면 모욕적일 것이다실제로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이 매달리는 정책들을 살펴보면그 핵심 기저에는 저 현수막 문구의 논리가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역 소멸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서울 팽창 공약일회용품 사용 금지 정책의 철회와 탄소 저감 정책 외면극심한 세수 부족에도 중산층과 부유층을 위한 각종 감세 정책들을 보라그 와중에 장애인 단체들의 지난한 싸움에도 불구하고 이동권 확보 등을 위한 권리예산은 무시당하고외국인노동자를 돕는 정부 센터들은 모두 폐쇄가 예고됐다이런 정책들에는 왜 모욕적이라고 말하지 않는가현수막의 문구를 실천하고 있는데 말이다.

 

정치권은 유권자들이 원하는 걸 본능적으로 안다나는 차라리 저 현수막이 거리마다 나부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공동체를 위한 사람이 아니라 부끄럽다고 느끼고각인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내가 잘 살고 싶다고 해서소외된 이웃에게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둘 다 관심 있다는 항변도 많을 것 같다물론 맞는 말이지만 우선순위가 항상 전자일 때후자를 위한 시간은 영원히 도래하지 않는다()과 이기심은 본질은 다를지라도초래하는 결과는 대부분 비슷하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은 벌써 표계산이 한창이다아마도 나는 잘 살고 싶은’ 유권자의 마음에 수없이 어필할 것이다현수막 문구들에 불쾌했다면, ‘공동체를 위해 때때로 를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인지도 스스로 물어야 한다최근 경실련에서 내놓은 현역의원 자질 검증 자료를 비롯해의원 평가 자료들은 상당히 많다.

 

정치권이 총선을 준비한다면유권자들도 총선을 준비해야 한다그 판단 기준이 나는 잘 살고 싶다의 벽을 깨는 것이었으면 좋겠다.>한국일보이진희 논설위원

 

  출처 한국일보오피니언정치는 모르겠고 나는 잘 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