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7. 05:46ㆍ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오판과 편견
<최신복 묘비 앞면에는 '泳柱 忠州 崔信福 延安 車元順 之墓', 그 아래에는 최신복이 지은 동시가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누구가 부는지 꺾지를 말아요 / 마디가 구슬픈 호드기오니 / 호드기 소리를 들을 적마다 / 내 엄마 생각에 더 섧습니다” ‘-최신복작-’
묘비 뒷면에는 '崔信福 선생은 1906년 京畿道 水原에서 나시어 華城少年會를 조직하여 少年運動에 힘쓰시고 1929년에는 開闢社에서 小波 方定煥 선생을 도와 잡지 <어린이> <學生> <소년> 등의 편집에 종사하는 한편, 여러 잡지에 어린이를 위한 많은 글을 쓰시어 아동문학에 기여하시다.'라고 최신복의 생애와 주요활동 내용을 새겼다. 그의 묘지번호는 203704이다.
아동문학가 최신복은 수원에서 상당한 토지 소유자로 큰 과수원 농사를 지은 아버지 최경우와 어머니 마정심 사이의 1남 5녀 중 장남으로 1906년 3월 13일 태어나 1945년 1월 12일 폐결핵으로 선종했다.
최경우는 딸 다섯(최신애·최중생·최순애·최영애·최경애) 중 귀가 아파 진학을 못한 셋째딸 순애를 제외하고는 당시 진명·배화여고 등 서울에 유학시킬 정도로 열리고 깨인 인생관으로 자녀들에게 신식교육을 가르친 아버지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특히 방정환 선생을 존경하여 자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또한 잡지 《어린이》를 자식들에게 구독시켜 아들 최신복과 딸 최순애와 최영애가 잡지 《어린이》에 동시를 발표하는 등 작가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하였다. 최신복이 방정환 선생과 교류하며 어린이 운동을 하는데 적극 지원했다.
최신복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집안 식구 모두 소파 방정환을 열렬히 지지하고 정신을 따랐다. 최신복의 본관은 충주, 영주는 그의 필명이다. 최신복은 1918년에 입학한 배재고를 1922년 졸업 후 일본 니혼대학 유학 중에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참상을 경험하고 귀국하여 일경의 요시찰 인물로 교사와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동아일보사 수원지국 기자로 일하던 최신복은 편집의 귀재로 인정받아 소파의 부름을 받고 1927년 1월 ‘개벽사’에 들어가 잡지 《어린이》·《학생》·《소년》 등 편집기자로 활동하며 세계 명작 동화를 번역 연재하는 등 소파 방정환을 도왔다. 동화 「석류나무」·「조선 제일 큰 강」 등 어린이를 위한 글을 많이 썼다.
최신복 인생에서 큰 인연인 소파 방정환·윤석중 등과 '색동회'의 동인으로 활동을 펼쳐나갔다. 방정환 선생을 돕기 위해 너무 전력을 다해 활동을 한 결과 건강이 극도로 나빠졌다. 1931년 방정환 선생 사망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고 ‘개벽사’를 퇴사하고 잡지 편집에서 잠시 물러났다. 정순철과 함께 경성보육학교 육성을 위하여 힘을 기울였다.
《어린이》 잡지 발간 10주년 회고에서 최신복은 소파를 그리며 이렇게 썼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무척 가슴을 괴롭게까지 하며 생각키우는 이가 있습니다. ‘어린이’를 탄생시킨 산파였고 길러준 어머니였고 또 ‘어린이’ 대장이던 소파 방정환 선생의 생각입니다. 한 몸의 괴로움은 조금도 돌보지 않고 오직 뜨거운 열성과 끈기를 가지고 반석처럼 움직이지 않고 ‘어린이’의 성장에 힘을 써주시었습니다.”
소파의 유골은 5년 동안 홍제원 화장장 납골당에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최신복은 윤석중·정순철·마해송·이정호 등과 뜻을 모아 1936년 5월 ‘소파방정환기념비건립모금운동’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월간 《중앙》에 모금 광고를 내고 여러 사람들의 뜻을 모아 망우리공동묘지에 소파의 묘지를 만들고 묘비를 세웠다. 위창 오세창이 묘비 앞면에 ‘童心如仙’ ‘어린이의 벗’ ‘小波 方定煥’, 묘비 뒷면에 ‘동무들이’라고 한글로 새겼다.
최신복은 1938년 5월 조선일보사 출판부에 스카우트 되어 잡지 《여성》의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1938년 10월 1일 창간된 《박문博文》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필 월간지로 경성 ‘박문서관’에서 발행했다. 편집 겸 발행인 최신복으로 국판(A5) 32면~50면 내외로 발간되었다. 1941년 1월 1일 통권 23호로 종간되기까지 당시 유명 문인을 비롯하여 학자·의사·화가·음악가·종교인 등이 대거 집필진으로 참여했다. 최신복은 그 외에도 《중앙》·《신시대》·《여성》 등의 잡지에서 편집 업무를 담당했다.
최신복은 열렬한 소파 숭배자였던 자신의 부친이 1937년 타계하자 소파를 더 자주 찾아보고 싶다며 수원의 선산을 놔두고 부친의 묘소(묘지 번호, 203741)를 소파 묘역 우측 아래쪽에, 1942년에는 모친(묘지 번호, 203755)을 다시 그 옆에 모셨다. 또 자신의 갓난아기가 죽었을 때도 그 옆에 묻었다.
1945년 1월 12일 폐결핵으로 38세로 세상 떠난 자기 자신도 유언에 따라 망우리에 묻혔다. 그래서 최영주 집안 3대는 소파를 죽어서도 받들고 현재까지 이르렀다. 그가 죽은 후 11년 뒤 부인 차원순(1907~1956)도 그의 옆자리로 안장했다. 영주 최신복은 아동문학가, 동요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문학작품이 재조명받고 있지 못하다.
그 이유는 상당수의 작품이 창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부인 차원순이 6·25 피난길에 작고한 최신복의 각종 원고 및 자료, 사진 등이 들어있는 보따리 짐을 분실하여 전해지는 작품이 적기 때문이다.>
동요 <오빠 생각>의 최순애와 〈꼬부랑 할머니〉의 최영애는 최신복의 여동생이다.>망우리공원. 정종배 시인
출처 : 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영주 최신복 아동문학가 78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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