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2023. 10. 16. 05:44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오판과 편견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누구나 한 번쯤 봤을 절절한 문구. ‘실종자 송혜희를 찾는 현수막이 얼마 전 회사 근처 횡단보도에 걸렸다가 사라졌다혜희씨는 1999년 2월 13일 경기 평택시에서 귀가 도중 실종돼오늘로 9,008일째 돌아오지 않았다당시 혜희씨 나이 18지금은 42세가 됐을 거다.

 

24년간 미제로 남은 이 사건은 가족 한 사람의 갑작스러운 부재가 일가족을 어떤 비극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어머니는 딸의 귀가를 기다리다 전단지를 품은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가산을 정리한 아버지는 생업을 포기하고 딸을 찾아 전국을 돌고 있다우리가 가끔씩이나마 송혜희 현수막·전단지를 볼 수 있다는 건그 아버지가 아직 딸의 무사귀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반갑고도 슬픈 증거다.

 

혜희씨를 찾지 못했지만아버지의 초인적인 집념 덕에 송혜희 현수막은 여전히 곳곳에서 보인다강변북로 육교 위남산 1호터널 남쪽 출입구남산 소월길 사거리와 소파길의 인도퇴계로 오토바이 거리 가로수에서나는 송혜희의 얼굴을 보고 머릿속에 다시 새긴다.

 

요 몇 달 혜희씨 현수막을 유심히 봤다그 결과 이 현수막 위치에 뭔가 오묘한 균형이 있음을 눈치 챘다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으되결코 행인이나 차량 이동에 방해가 되지 않는 지점에 현수막은 늘 걸려 있다아마도 그건 기초수급자 지원금 대부분을 현수막 제작에 쓰는 아버지의 사정 탓일 게다딸 찾는 게시물을 철거반에 뜯기지 않고 오래 붙여둘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아버지는 늘 고심하고 있을 것이다.

 

남의 눈에 띄어야 하면서도 눈길을 요란하게 사로잡아선 곤란하다이런 딜레마를 안고서 붙일 곳을 찾아야 하는 송혜희 현수막과 비교하면정치인들이 거리에 내건 현수막은 얼마나 뻔뻔하고 직설적인가통행을 방해하는 건 예사고자극적 표현이나 적나라한 조롱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정치 뉴스를 애써 피하며 정치 디톡스를 하고자 해도길에 나붙은 현수막 탓에 또 정치에 오염되고야 만다이런 저질 정치 현수막의 시각 테러는 옥외광고물법상 예외조항에 의해 15일의 생명을 항시 보장받는다.

 

애끊는 부정을 눌러 담은 가련한 현수막이 뜯기는 동안혐오를 자극하는 정치구호가 법의 보호를 받는 현실이 기막힌 차별이야말로 한국에서 정치인의 자유·권리가 일반 시민의 그것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으로 보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다수 시민이 피와 땀으로 일군 정치적 자유의 과실을소수 정치인들이 독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깔끔한 통제보다는 지저분한 자유로움이 더 낫기에당장 법을 바꿔 정당 현수막을 모조리 내려야 한다고는 차마 주장하지 못하겠다다만 이건 기억하자.

 

당신은 정당인이라는 이유만으로자식 잃은 아비보다 더 쉽고 널리 자기 생각을 남에게 알릴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걸그렇게 소중하게 얻은 권리를 혐오 조장에 쓰지 말고 제발 남의 인생에 도움 되는 일에 제대로 써먹어 보라는 말이다.

 

하나 추가하자면미아나 실종자를 찾는 인도적 목적의 현수막에도 정당 현수막과 유사한 특례를 부여하거나공공 게시대 우선권을 주는 방안을 검토해 보시라그게 특권을 '공짜'로 먹은 이들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양심 아닐지.>한국일보이영창 사회부장

 

   출처 한국일보오피니언 뉴스룸에서송혜희와 정치인의 현수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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