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25. 08:00ㆍ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
저는 영화 『서울의 봄』을 보지 않았습니다. 요즘 많은 정치인들이 그 영화를 보고는 ‘아전인수(我田引水)’식 말들을 늘어놓고 있던데 웃기는 소리들 뿐입니다.
저는 1979년 12월 12일 밤에 휴전선 화천 백암산에서 영하 25도의 추위 속에 밤을 새워 철책근무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의 전말은 1990년대 중반에 적나라하게 들어나서 그 사건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은 이미 세세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정승화 육군 참모 총장 등을 불법적으로 강제 연행하고 군권을 장악하면서 시작된 군사 반란 사건은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를 계기로 국가권력을 탈취하고 쿠데타 일정을 마무리했습니다.
12·12 군사반란의 진상은 권력에 의해 은폐되어 있다가 김영삼 정부 아래서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김오랑 소령과 장태완 장관 말고도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본 헌병감 등은 끝까지 신군부에 굽히지 않은 참군인들이었습니다. 우리 역사가 이 사건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제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12.12사태를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역사 영화라고 하든, 다큐라고 하든, 픽션이라고 하든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 자기들 입맛에 맞게 떠들 뿐입니다.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했다”, “적절한 유머가 좋았다”, “완급조절이 뛰어났다”는 평은 역사영화에 대한 칭찬일까?
감독은 ‘서울의 봄’에 대해 때로는 ‘영화로서만 봐 달라’고 했고, 때로는 ‘진압군의 입장을 밀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것은 역사를 영화로 만드는 창작자의 딜레마일까. 영화 마케팅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가당착일까. 아니면 이 또한 의도된 영화 흥행 전략일까.
역사영화에 대해 ‘다큐멘터리’ 운운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영화가 볼거리로 전락했다는 방증이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하이퍼리얼리티는 역사와 영화를 혼동케 한다.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역사를 알게 됐다고 착각한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허구 앞에서 관객은 ‘진짜 분노’를 느낀다. 정의로운 민주시민의 자격이 영화 한 편 본 것으로 주어진다. ‘자격’은 분노 지수로 판가름 난다. 스마트워치로 ‘심박수 챌린지’를 하고, 결과를 SNS에 올리는 것은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참여한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영화 한 편이 도덕적 우월감과 정치적 효능감마저 부여하는 것이다.
역사는 온전히 재현될 수 없다. 역사가 블록버스터급 액션 영화로 스펙터클화되면, 관객은 이 스펙터클을 소비하게 된다. 영화의 극적 장면에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영화의 내러티브를 거리두기 없이 열심히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관객은 역사에서 멀어진다.
역사적 진실 또한 소외된다. 고통의 사건이 영화로 소비되었기 때문에 진짜 역사는 잊힌다. 영화를 통해 적절하게 분노와 고통을 지불하였으므로 집단외상의 역사는 희석된다.
극 중 ‘전두광’은 블록버스터 영화의 광기 어린 빌런 캐릭터와 다름없었다. ‘전두광’이라는 이름 또한 이 광기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태신’은 전두광을 향해 군인도, 인간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명대사로 회자된다. 그리고 ‘전두환’을 평가하는 말로 치환된다. 관객에게 전두환은 인간 아닌, 희화화된 광기의 인물로 표상된다.
실제 전두환은 광인이나 괴물이 아니다. 전두환은 ‘전두-광’이 아니다. ‘전두환’을 ‘전두광’이라는 캐릭터로 소비하면 진짜 전두환을 망각하게 된다. 진압군은 인간 아닌 괴수와 싸운 것이 아니다. 12·12 군사반란은 절대악과 절대선의 대립이 아니다.
이분법 속에서 전두환을 ‘비인간’, ‘광인’으로 둔갑시키면 역사의 맥락에서 그를 단죄할 수 없게 된다. 전두환을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치밀하게 평가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이미 전두광을 통해 전두환을 안다고 믿어 버렸기 때문이다.
웰메이드 서사 속에서 진압군의 비극을 관람한 관객은 그들을 ‘이해’의 영역에 포함시키고 그들 가족의 후일담을 찾아 나선다. 관객의 욕망은 언론과 유튜버의 상품성 있는 콘텐츠 생산으로 이어진다. 영화를 보고, 희생자와 그들의 삶을 구경하는 것을 역사에 대한 통찰로 여기게 된다. 역사가 소화 가능한 콘텐츠로 전환될 때 역사적 진실은 더 깊이 묻히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관객의 무의식에 더 깊이 파고든다. 전두광이 유행가를 부른다. 전두환이 불렀다는 ‘방랑시인 김삿갓’이다. 전두광과 전두환을 겹치게 만든 것은 단지 노래만이 아니다.
영화는 더 교묘하게 화면의 색감과 질감을 바꾸고 댜큐멘터리 효과를 낸다. 실존 인물의 이름을 바꾸고 허구를 적극적으로 도입했으므로 단편적 사실 또한 거침없이 활용된다. 영화가 더 ‘역사처럼’ 묘사할수록 ‘역사’에서 더 멀어지게 된다.
‘팩션(faction)’이 될 수 없는 역사가 있다. 극적 흥미를 위해 사실(fact)과 허구(fiction)를 섞는 것 자체가 비윤리적인 창작 행위가 되는 경우가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 여전히 상처가 도사리고 있는 역사는 팩션이 될 수 없다.
‘서울의 봄’을 블록버스터 액션 누아르로 간주하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보게 되면 영화적 흥미는 떨어진다. 선명한 선악 구도에, 악의 괴수화, 선의 영웅화는 더 이상 그 자체로 흥행 코드가 될 수 없다. ‘서울의 봄’을 즐기기 위해서는 ‘역사’가 필요하다. ‘서울의 봄’은 영화적 재미를 위해 역사를 콘텍스트로 소비시킨다.
‘서울의 봄’은 제작과 마케팅에 성공한 영화다.
이를 벤치마킹한 아류가 속속 생산될 것이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스펙터클로 환원시킨 영화, 액션 누아르 장르 관습을 그대로 차용한 영화, 영웅과 악당의 이분법으로 역사적 죄인을 괴물이나 광인처럼 왜곡시킨 영화, 관객의 분노를 이용하는 영화, 역사를 영화의 콘텍스트로 소비하는 영화, 웰메이드 플롯으로 카타르시스와 종결감을 선사하는 영화, 정치인과 정치유튜버에 의해 도구화되는 영화, 영화와 정치인 사이에 홍보의 순환이 일어나는 영화, 정치적 도구화로 소모적인 사회 분열을 파생시키는 영화, 그리고 그런 주변 소음이 오히려 마케팅으로 수렴되는 영화.
이런 영화의 성공은 결국 공동체의 패배가 된다.
역사의 진실은 결코 그 전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역사영화는 재현의 실패에 성공해야 하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이 딜레마가 무수한 질문을 토해낸다.
역사를 재현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역사에 내재한 고통을 증언하는 영화, 관객에게 스스로의 정치적 무능함을 일깨우는 영화가 절실하다. 어떤 관객은 정말로 그런 영화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런 영화는 그 자신이 역사가 될 것이다.>세계일보.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작가
출처 : 세계일보. 오피니언 [한귀은의멜랑콜리아], ‘서울의 봄’은 역사영화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입으로 떠드는 사람들이 만든 나라가 아닙니다. 때로는 목숨을 바쳤고, 때로는 눈물과 땀으로 이 나라를 만들고 지키기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노력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돈봉투 의혹'으로 수사 받아오던 송영길 민주당 전 대표가 전격 구속됐다.
불법 정치자금 및 뇌물, 당내 금품 살포 등의 혐의에 대해 법원이 유죄를 인정한 것이다. 공교롭게 같은 날 검찰은 자녀 입시비리 등의 혐의로 기소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항소심에서 징역 5년을 구형했다. 절치부심, 내년 총선을 정치 인생 재역전의 기회로 벼르는 송·조 두 사람에게 사법 리스크는 최대 악재다. 정치적 사망 선고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두 사람은 586 학생운동권 출신 중에선 꽤 성공한 부류다. 586 출신 정치인은 1980년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에 온몸으로 항거하며 '화염병'을 들었던 세대다. 최근 연일 흥행 신기록을 고쳐 쓰며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서울의 봄'과 시대적 배경을 공유한다. 이들 운동권은 이념적으론 종북과 반미 사상 등 좌파적 성향을 띤다.
사회 민주화와 더불어 386 운동권 인사들이 기득권 세력으로 떠올랐다. 구(舊)정권인 문재인 정권에선 핵심 요직을 장악할 정도로 주축 세력이 됐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민주화 지분을 요구한다. '너희가 편안히 공부하며 민주화의 단물을 빨 때 우린 독재에 맞섰어. 그러니 우린 특별해'라는 도덕적, 윤리적 우월감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심리다.
그러한 도덕적 우월 의식이 자신과 생각이나 이념이 다른 집단을 만나면 배타적 공격성으로 표출된다. 기업가를 깔보고 배격하는 태도 역시 그러한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정감사장에 기업가들을 줄줄이 불러다가 어린애 꾸짖듯 호통 치고, 위세를 과시하는 행동도 '내가 너보다 깨끗하기 때문이야'라는 우월감이 있어서다.
더 고약한 점은 기성 사회의 법과 질서, 제도에 공공연한 반감을 갖고 공격한다는 것이다. '조국 사태'의 전개 과정만 봐도 그렇다. 보통사람의 눈으로 보면 조 전 장관의 자녀 관련 입시 비리는 공정과 법치를 파괴한 행위다.
이미 재판 결과를 통해서도 명백해진 사실이다. 그런 사람이 '정의'와 '공정'을 외친다. 총선 출마로 '비법률적' 명예 회복을 하겠다고 벼른다. "조 전 장관이 단 한 번도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반성한 사실이 없다"는 재판장의 질타도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막장 정치도 586 정치인이 주연이다. 대통령 부인을 '암컷'이라 칭하며 낄낄댄 최강욱 전 의원과 조 전 장관, 현 정부를 침팬지 집단에 비유한 유시민 이사장. 막장 정치인의 전매특허가 된 '지저분한 입'과 '구정물 언어'에 대다수 국민이 혐오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저질 정치인에겐 애초부터 국민이 안중에 없었다. 그들의 눈엔 막장 농담에도 더불어 낄낄대고, 자신도 해당되는 '암컷' 발언을 해도 감싸주고 동조해주는 '개딸' 같은 맹목적지지 세력이 있을 뿐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감히 할 수 없는 욕설을 자기 형수한테 퍼부어댄 사람에게 절대적 성원과 지지를 보내는 거대 정당에선 얼마든지 통할 일이다. 집에서 기르는 개나 고양이도 주인을 닮는다고 하지 않는가. 후보 공천권을 틀어쥔 거대 정당의 대표 눈에 들려면 그 정도 언어 구사력은 필히 갖춰야 할 능력이 아닌가 싶다.
왜 우리 사회에선 막가파 586정치인들이 활개 칠까. 법치를 비웃고 국민을 깔보며, 정치판을 농락하는 데도 말이다. 그건 굳이 따질 것도 없이 국민이 못나서다. 더럽고, 메마른 토양에서 품질 좋은 작물이 자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정치 시즌이 막을 올렸다. 내년 22대 총선에 나설 예비 후보자들이 국민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내년 총선은 여야 양대 정당 간에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사생결단의 장이 될 게 뻔하다. 거대 야당의 지도자가 하루가 멀다하고 법정을 드나들며 선거를 지휘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매번 그랬지만 이번 선거도 주권자로서 국민이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내가 주인인데도, 피 터지게 싸우는 전쟁터에 고립된 들러리 신세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젠 국민이 날뛰는 황소의 고삐를 틀어쥘 때가 됐다. 그것은 알곡인 척하는 쭉정이를 가려내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디지털타임스. 박양수 콘텐츠에디터
출처 : 디지털타임스. 오피니언 [박양수 칼럼], `서울의 봄`과 송영길 구속
역사에, 나라와 국민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제가 따따부따할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국민의 대표가 되고, 나라를 위해 일을 하겠다고 국민께 표를 요청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깨끗하고 더 예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정치가 전혀 발전이 없는 것은 우리 국민들의 책임도 크다는 생각입니다. “천하흥망(天下)興亡), 필부유책(匹夫有責)” 오늘도 가슴에 새기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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