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의 북경 다시 보기, 천안문 광장

2011. 1. 25. 11:25사람과 사진과 사진기/사진은 관심이고, 만남이며, 사랑입니다

 

[필독] 중국여행동호회 카페 이용약관  ◁ 클릭

 

 

 

 

 

 

 

 

 

 

 

 

 

 

 

 

 

 

 

 

 

천안문사건은 우리에게 남의 일일 뿐이었다.

 

톈안먼사건 [천안문사건;천안문사건]
1989년 6월 4일 미명에 민주화를 요구하며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학생·노동자·시민들을 계엄군을 동원하여 탱크와 장갑차로 해산시키면서 발포,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

1989년 4월 전총서기 후아요방(호유방;호요방)의 죽음을 계기로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각지의 학생들은 민주와 자유를 요구하며 다시 일어서게 되는데, 이 운동은 현실에 불만을 가진 노동자, 시민의 지지를 얻어 예상을 넘어서는 규모로 확대되어 한때 천안문광장이'민주. 자유'를 부르짖는 학생, 시민으로 가득 메워졌다. 학생들이 요구하는 '민주. 자유'가 사회주의적 민주, 자유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체제의 위기를 느낀 등소평을 비롯한 당. 정부의 지도자는 학생들의 운동을 '반혁명 폭난(동난)'이라 규정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이를 무력으로 제압했다. 특히 북경에서는 6월 4일 천안문광장을 점거하고 있던 학생 시민에 대하여 인민해방군이 출동하여 전차의 돌입과 기관총난사에 의한 무력 진압을 강행함으로서 다수의 사상자를 낳았다. 이후, 무력 진압에 반대의 뜻을 밝힌 조자양(조자양) 총서기는 실각하고 보수파가 일단 실권을 장악했으나 앞길은 불투명했다. 천안문 사건에 대한 무력진압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위신을 안팎으로 크게 실추시켰다.

 

 그러나 중국사람들, 특히 중국의 민주화를 원하는 사람들에겐 너무나 큰 상징이고 너무나 큰 아픔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천안문사건은 중국 집권세력에게는 큰 부담이고 잊고 싶은 상처라고 히는데 무심한 외국인들은 오늘도 역사적 의미는 잊은 채, 그 광장에서 노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