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 신지식

2015. 11. 30. 19:55세렌디피티(serendipity)/좋은 수필 선

 

 

  

 

내가 다니는 거리거리에 가로수가 늘어서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눈이 트고 잎이 나고 더러는 꽃도 피고 그리고 잎이 가면 멀쟎아 또 눈꽃이 피는 가로수……. 나는 그 아름다운 변화 앞에 놀라는 기쁨을 버릴 수가 없다. 문득 놀라 바라보는 그 한 동안, 모든 괴로움, 모든 미워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나는 가장 선량한 사람이 되어 세상을 볼 수 있다.

맨 처음으로 거리에 나무을 심은 사람은 그 누구였을까? 생각건대 그는 참으로 멋진 사람이었으리라. 오늘, 나로 하여금 이 기쁨을 누리게 한 그에게 나는 깊은 감사를 드려 마지않는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무렵의 따렌(大蓮), 긴장과 살벌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 험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여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그래도 나에게 위안을 준 것이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따렌의 가로수였다고 할 것이다.

따렌의 거리거리엔 우람스런 아카시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아카시아는 가로수는 적당하지 않다지만, 5월의 푸른 잎 사이로 주렁주렁 늘어진, 그 눈부신 아카시아 꽃의 아름다움을, 그 꽃 냄새의 향기로움을 무엇에다 비길까? 문득 놀라 바라보는 순간, 온 거리는 갑자기 환해지고 향기로 가득 찬다. 그때 전쟁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찌들고 살벌한 얼굴은 다시 아름다워지고 온화해지고……. 나는 그 꽃을 바라보며 그만 전쟁을 잊었었다.

이젠 따렌도 많이 변했을 것이다. , 아카시아는 무사할까? 누가 다 뽑아내고 다른 걸 심지 않았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마음의 따렌 거리, 여기 늘어서 있는 이 우람스런 가로수는 뽑아가지 못할 것이다. 눈을 감으면, 그 잎, 그 꽃, 그 향기, 그리움이 가슴에 사무친다.

1945815, 마침내 전쟁은 끝났다. 낯선 이국땅을 헤매며 괴로워하던 우리 동포들은, 조국을 다시 찾은 감격 속에 환호하며 고향을 찾아 길을 떠났다.

나도 그 때, 함께 하숙을 하며 같이 학교에 다니던 동생을 데리고 그 대열에 끼였다. 모두 후한 인심이었다. 그 길은 멀고 험했지만, 그리고 우리는 어리고 약한 소녀였지만, 그 훈훈한 인정 속에 괴로운 줄을 몰랐다.

그러나 우리는 안동(安東)현에 이르러 그만 발이 묶이고 말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하염없이 날이 가고, 달이 가고, 철이 바뀌었다. 따렌을 떠나던 817일은 무덥기도 하더니, 어느 새 가을바람이 쓸쓸했다. 이미 얇아진 여름 옷, 살갗엔 소름이 돋았다. 아침저녁으로는 떨리기도 했다. 배도 고팠다.

그러던 어느 날, 멍하니 나선 길에서 우리는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던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대열, 바야흐로 넘어가는 석양빛을 받아 찬란히 빛나며 하늘거리던 그 노란 잎, 잎들! 순간, 우리는 슬픔도 배고픔도 모두 잊고, 동화의 나라 공주처럼 행복하기만 했다. 곱게 떨어진 은행잎을 한 잎, 한 잎 주우며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이야기였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아름다운 이야기였으리라.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던 걸 기억한다. 우리가 이 낯선 거리의 은행나무 아래서 나란히 노란 잎을 줍는 것은, 먼 훗날 때때로 떠오르는 아름다운 그림이 되리라고.

지금 내가 사는 동네, 내가 자주 다니는 길가엔 플라타너스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이른 봄, 새순을 함빡 뿜어내는 가로수를 보며, 나는 생명의 신비로움과 존엄함을 예찬한다. 축축 늘어져 기운을 차릴 수 없는 여름날, 나는 그 싱싱한 잎들을 보며 생기를 되찾는다.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늦가을날의 오후, 나는 그 흩날리는 낙엽을 한 잎 주워들고 내 생활을 정리한다. 겨울밤 홀로 돌아오는 그 거리, 나는 그 잎 진 가로수가 서럽지 않다. 새 잎을 피우기 위해 한 철을 위해 쉬는 안식이 거기 있다. 말없이 봄철을 예언하는 성자의 모습이 거기 있다.

내가 만일 서울을 떠난다면, 그래서 어느 낯선 고장에서 외로이 서울을 그리워하게 된다면, 나는 맨 먼저 이 플라타너스를 눈앞에 그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