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진교소설(權利盡交疎說) / 정 민

2015. 12. 14. 08:29세렌디피티(serendipity)/좋은 수필 선

 

 

 

  제목이 좀 어렵게 느껴지는데 그냥 풀어서 얘기하면, '권력과 이익이 다한 사귐은 멀어짐에 대한 말씀' 정도로 보면 되겠습니다. 저도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의아했는데 제목과 글 내용을 풀어서 보니 그런 제목입니다.

 

 사람들이 사귐에 있어, 의리와 정이 아니라, 권력을 따르고 이익을 쫓다보니, 그런 것이 사라지면 멀어진다는 얘기를 한 것입니다. 살면서 저도 많이 겪은 일이라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제가 권력을 가진 적도 없었고, 남에게 이익을 준 적도 없었지만 제 스스로 권력을 따라 움직이거나, 이익을 따라 움직인 적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건 제 생각일 뿐이고 남들이 보기엔 저도 그런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사람 사귐에 의리와 정으로 하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몰라 조심스럽습니다.

 

 

<적공(翟公)은 도무지 입맛이 썼다. 한 때 위세가 쩌렁쩌렁한 정위(庭尉) 벼슬에 있을 때는 손님으로 대문이 미어졌었다. 그러나 막상 그가 실직하자, 그 많던 손님 중에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는 자가 없었다. 발길은 뚝 끊어져 대문엔 참새 그물을 쳤다. 몇 년 뒤 그가 다시 정위 벼슬에 복귀하자, 비굴한 웃음을 띠고 그간의 무심을 사과하려는 자들로 적막하던 문간이 다시 들먹거리기 시작했다. 적공은 며칠 째 입맛이 썼다.

 

그는 먹을 갈았다. 이튿날, 아침부터 문밖을 서성대던 자들은 대문에 붙은 방문(榜文)을 보았다. 일렀으되, “일사일생(一死一生)에 교정(交情)을 알겠고, 일빈일부(一貧一富)에 교태(交態)를 알겠고, 일귀일천(一貴一賤)하매 교정(交情)이 드러난다.”고 하였다. 아! 박절하다, 그 말이여!

 

지위를 되찾았기에 적공은 방문이라도 붙여 보았다지만, 그렇지 않고 만약 그가 참새 그물 얽힌 대문에 이 방문을 붙였다면 사람의 비웃음만 더 받았을 것이 아닌가? 세상에는 절치부심의 칼을 갈면서도 그 칼 한 번 옳게 휘둘러보지 못하고 스러진 자들이 더 많다.

 

일전 신문을 보다 보니, “정작 그렇게 충동질하고 이용한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버리고 그만 덩그렇게 홀로 남아 여론과 국민의 질타를 받고 있느냐. 단물을 빨아먹고 지금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사람들은 누구인지 안 번쯤 짚어보고 우리들의 세태에 대해 반성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한 어느 정치인의 말이 실려 있다. 나는 그 말을 읽다가 씁쓸히 웃었다. 그리고는 요즘 세상 돌아가는 생각을 하다가 뜬금없이 그날 방문을 써 붙이던 한나라 적공의 심정이 떠올랐던 것이다.

 

파리 같은 모리배들의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짐이 없다. 지금 아무도 찾지 않는 집안에 쳐박혀서 혹은 감옥 한 구석에서, 잘 나가던 그 시절 입속의 혀처럼 교언영색의 아첨을 일삼던 자들에게 분노의 저주를 되뇌이는 이들이 적지 않을 터이다. 권력이란 그렇게 무상한 것인지를 몰랐다고 안타까운 탄식을 토로하는 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단물을 보고 몰려드는 쉬파리야 본능이 그러한 것을 어찌 탓할 수 있으랴. 다만 내가 음식 간수를 제대로 하지 못해 쉬파리가 그렇게 꼬여 들도록 내버려 둔 것이 애석할 뿐이다. 누가 누구를 원망하는가? 그들의 저주와 그들의 탄식이 자기 자신에게가 아니라, 그저 단물에 빠져 떠난 파리떼를 향해 퍼부어진대서야 바라보는 이의 민망함만 더할 뿐이다. 두고 보자고, 가만 두지 않겠다고 별러 보지만 훗날 설사 그깟 파리 몇 마리 쳐 죽인다고 한들 마음에 무슨 상쾌함이 있으랴.

 

“한손으로 도둑을 꾸짖으면서 한손으로는 도둑의 장물을 훔친다. 그래서 한 도둑이 죽고 나면 또 한 도둑이 생겨난다. 한편으로는 간음한 자를 야단하면서 한편으로는 간부(姦婦)와의 기회를 엿본다, 그래서 한 간부를 처벌하고 나면 또 다른 간부가 간음의 죄를 범한다.”

 

명나라 사람 서학모(徐學謨)가 한 말이다. 도둑이 도둑더러 도둑놈이라고 꾸짖는 세상이다. 간부가 간부를 간음한 놈이라고 처벌하는 세상이다. 그러니 잡힌 도둑이 제 잘못은 뉘우치지 않고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간음한 죄인이 단지 운이 나빴다고 투덜거린다. 누가 누구를 꾸짖고, 누가 누구를 탓하는가?

 

이쯤에서 나는 만년의 추사(秋史)를 떠올린다. 제주도 유배시절, 제자 이상적(李尙迪)이 절해고도(絶海孤島)에 유폐되어 낙담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늙은 스승을 위해 멀리 청나라에서 구해 온 신간 서적을 보내 왔다. 쓸쓸하고 적막했던 추사는 자못 감격하였다. 오랜 만에 붓을 들어 그를 위해 세한도(歲寒圖)를 그려 주고, 느낌에 겨워 그 발문을 이렇게 썼다.

 

“세상의 도도히 흘러감은 오로지 권리(權利) 이것만을 붙좆아 이를 위해 마음을 태우고 애를 쏟는다. 이같은데도 그대는 권세와 이욕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바다 밖 초췌하고 파리한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마치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욕을 향하듯 하는 구나. 사마천은 말하기를, ‘권리로 합쳐진 자는 권리가 다하면, 사귐이 성글어진다(以權利合者, 權利盡而交疎)’고 하였거늘,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초연히 도도한 권리의 밖으로 스스로 벗어남이 있으니 권리를 가지고 나를 보지 않은 것인가? 사마천의 말이 잘못된 것인가?”

 

아! 세상에는 이런 만남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슬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