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19. 10:17ㆍ세렌디피티(serendipity)/좋은 수필 선
제 기억으로는 중학교 때 국어책에서 읽은 건데, 어떤 분들은 고등학교 때 책에 나왔다고 얘기하네요,,,,
제가 어려서 봤을 때는 김 군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김 군의 마음도, 필자의 마음도 납득이 가는 느낌입니다. 같은 글도 나이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됩니
김 군에게
김 군이 다녀간 어젯밤에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소. 김 군에게 보내는 이 편지를 쓰고 싶으면서도 실상은 쓰고 싶지 않은 글이오. 왜냐하면 너무도 어리석은 일을 적어야 하기 때문에, 너무도 슬픈 사연을 담아야 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꼭 써야 한다는 무슨 의무감 같은 것을 느끼었소. 그래서 이 붓을 들었소.
어젯밤 우리가 만난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르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소. 아, 거기서 끝났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소. 그대는 품속에서 그대의 돌아가신 어머니 사진 한 장을 꺼내어 내게 보여 주었소. 나는 그대의 어머니를 생전에 뵈온 일이 없었기로 반가이 받아들었소. 그런데, 그대의 가신 어머니는 한 눈을 상하신 분이었소. 그것을 본 순간, 내 머리에는 ‘불행’이란 말이 퍼뜩 지나쳤소. 그와 동시에 나는 그대가 더욱 정다워짐을 느끼었소.
그러나 뒤를 이어 주고받은 그대와 나와의 이야기. 김 군, 그대는 이 글을 통해서 어젯밤 우리가 나눈 대화를 한 번 되새겨 주오. 그대는 어느 화가의 이름을 말하면서 내가 그와 친하냐고 묻기에,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소.
“그럼 한 가지 청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이 사진을 가지고 내 어머니의 모습을 하나 그려 달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보수는 상당하게 드리겠습니다.”
“내 힘껏 청해보지요”
그림으로나마 어머니를 모시려는 그대의 착한 뜻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소. 그래서, 나는 쾌히 약속을 했던 것이오.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온 그대의 말, 그대는 가장 부자연스런 웃음과 어색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였소.
“그런데 그림을 그릴 적에 두 눈을 다 완전하게 그려 달라고 해 주십시오.”
김 군,
순간 내 눈앞은 캄캄해지고 내 가슴은 떨리었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소. 두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소. 겨우 입을 열어 내가 한 말은 돌아가 달라는 한 마디뿐이었소. 나는 그대를 보내고 괘씸하고 분한 생각에 가슴을 진정할 수가 없었소. 그대가 평소에 어머니의 눈 때문에 얼마나 한스러웠기에 그림에서라도 온전히 그려보려 했을까? 이렇게 생각하려고도 해 보았소. 그러나 그대의 품속에 들어 있는, 그대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 한 눈 상하신 그 어머니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나 원망의 눈물을 흘리시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소.
김 군,
그 즉석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대는 나의 열리지 않던 입에서 분명히 듣고 간 것이 있을 것이오. 말없이 나의 입에서 듣고 간 것이 없소? 만일 없다면 이제라도 한 마디 들어주오. 그러나 내 말을 듣기 전에, 그대는 먼저 그대의 품속에서 그대 어머니의 사진을 꺼내 자세히 들여다보오. 성하신 한쪽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자세히 보오. 눈물 가진 눈으로 보오.
김 군,
한 눈을 상하신 까닭으로 평생을 학대 속에 사셨는지도 모를 그 어머니……. 애닯소 한 눈 없이 그대를 낳고 기르고. 그대를 위하여 애태우시다 이제는 저 차가운 땅 속에 드셨거늘, 자식인 그대마저 어찌 차마 그대 어머니의 상하신 한 눈을 업신여겨 저버린단 말이오? 그대에게 한 눈 가지신 어머니는 계셨어도 두 눈 가지신 어머니는 없었소. 온 세상이 다 불구라 비웃는대도 그대에겐 그 분보다 더 고우신 분이 또 누구이겠소? 한 눈이 아니라 두 눈이 다 없을지라도 내 어머닌 내 어머니요, 내가 다른 이의 아들이 될 수는 없는 일이오.
김 군,
그림으로 그려 어머니를 모시려한 착한 김 군, 그런 김 군이 어떻게 두 눈 가진 여인을 그려 걸고 어머니로 섬기려 했단 말이오? 그대는 지금 곧 한 눈 없는 어머니의 영원한 사랑의 품속으로 들어가오. 그리하여 평생 눈물 괴었던 그 상하신 눈에 다시는 더 눈물이 괴지 않도록 하오. 이만 줄이오.
'세렌디피티(serendipity) > 좋은 수필 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먼 곳에의 그리움 / 전혜린 (0) | 2015.12.29 |
---|---|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 / 유안진 (0) | 2015.12.25 |
별은 빛나건만 / 신경숙 (0) | 2015.12.16 |
권리진교소설(權利盡交疎說) / 정 민 (0) | 2015.12.14 |
12월의 편지 / 이해인 (0) | 2015.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