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 / 김남천

2016. 1. 17. 15:03세렌디피티(serendipity)/좋은 수필 선

  고향이 북쪽인 분들이 냉면을 더 좋아한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었지만 평안도 출신 분들의 냉면 사랑은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함경도에서 오신 분들과 평안도에서 오신 분들의 다툼이 바로 함흠냉면과 평양냉면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으냐의 문제라고 들었는데 이분들의 냉면 사랑은 정말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김남천 선생님은 소설가인데 우리나라가 광복이 된 뒤에 고향인 이북으로 돌아가서 활동하다가 숙청당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월북작가로 분류되어 작품이 많이 소개가 되지 않아서 이름이 생소한 분들도 있겠지만 1930년데, 40년대에 활약한 작가입니다.

 

 

<‘냉면이라는 말에 평양이라는 붙어서 평양냉면이래야 비로소 어울리는 격에 맞는 말이 되듯이 냉면은 평양에 있어 대표적인 음식이다. 언제부터 이 냉면이 평양에 들어왔으며 언제부터 냉면이 평안도 사람의 입가에 가장 기호에 맞는 음식물이 되었는지는 나 같은 무식쟁이에게는 알 수도 없고 또 알려고도 아니한다.

 

어렸을 때 우리가 냉면을 국수라 하여 입에 대게 된 시일을 기억하는 평안도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밥보다도 아니 쌀로 만든 음식물보다 이르게 나는 이 국수 맛을 알았을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어른들의 냉면 그릇에서 여남은 오리를 끊어서 이가 서너 개 나나마나 한 입으로 메밀로 만든 이 음식물을 받아 삼킨 것이 아마도 내가 냉면을 입에 대어 본 처음일 것이다. 젖 먹다 뽑은 작은 입으로 이 매끈거리는 국수 오리를 감물고 쭐쭐 빨아올리던 기억이 있는지 없는지 가물가물하다.

 

누가 마을을 오든가 한 때에 점심이나 밤참에 반드시 이 국수를 먹던 것을 나는 겨우 기억할 따름이다. 잔칫날, 그러므로 약혼하고 편지 부치는 날에서부터 예물 보내는 날, 장가가는 날 며느리 데려 오는 날, 시집가는 날 보내는 날, 장가와서 묵는 날 가는 날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이 국수가 출동한다. 이 밖에 환갑날, 생일날, 제삿날, 장례날, 길사, 경사, 흉사를 물론하고 때로는 냉면으로 때로는 온면으로 먹어 왔다.

 

심지어는 정월 열나흘 작은 보름날 이닦기엿, 귀밝이술과 함께 수명이 국수 오리처럼 길어야 한다고 명길이국수라 이름 지어서까지 이 냉면 먹을 기회를 만들어 놓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평안도 사람의 단순하고 담백한 식도락을 추상할 수 있어 흥미가 새롭다.

 

속이 클클할 때라든지 화가 치밀어 오를 때 화풀이로 담배를 피운다든가 술을 마신다든가 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런 때에 국수를 먹는 사람의 심리는 평안도 태생이 아니고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도박에 져서 실패한 김에 국수 한 양푼을 먹었다는 말이 우리 시골에 있다. 이렇게 될 때에 이 국수는 확실히 술의 대신이다. 나같이 술잔이나 다소 할 줄 아는 사람도 속이 클클한 채 멍하니 방 안에 처박혀 있다간 불현 듯 냉면 생각이 나서 관철동이나 모교 다리 옆을 찾아갈 때가 드물지 않다. 그런 때 거리에서 친구를 만나,

차나 마시러 갈까?” 하면,

여보, 차는 무슨 차 우리 냉면 먹으러 갑시다.”하고 앞서서 냉면집을 찾았다.

 

모든 자유를 잃고 그러므로 음식물의 선택의 자유까지 잃었을 경우에 항상 애끊는 향수같이 엄습하여 마음을 괴롭히는 식욕의 대상은 우선 냉면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냉면이 우리에게 가지는 은연한 세력은 상당히 큰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한방의는 냉면은 몸에 백해는 있을지언정 일리도 없는 식물이라고 한다. 그런지 안 그런지 알 길이 없다. 일종의 보약 같은 것을 복용할 때 금기물의 하나로 메일로 만든 냉면이 드는 수가 많은 것은 우리들의 주지의 사실이다.

 

국수를 먹고 더운 구들에서 잠을 자고 나면 얼굴이 부석부석 붓고 목이 케케하여 기침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냉면은 몸에 해로운 것인지도 모른다. 국수물, 다시 말하면 메밀 숭늉은 이뇨제로 된다.

 

트리펠 같은 걸 앓는 이가 냉면에 돈육이나 고추나 파나 마늘이 많이 드는 것은 꺼리지만, 냉면 먹은 뒤에 더운 국수물을 청해다 한 사발씩 서서히 마시고 앉았는 것은 이 탓이다. 은근히 물어보면 이것을 먹은 이튿날의 효과는 어떤 고명한 이뇨약보다 으뜸간다고 한다.

 

냉면은 물로 메밀로 만든다. 메밀로 만든 국수는 사려 놓고 십여 분만 지나면 자리를 잡는다. 물에 풀면 산산이 끊어진다. 시골 외에는 순수한 메밀로 만든 국수는 극히 희귀하다. 국수발이 질기고 끊어지지 않는 것은 소다나 카다쿠리 가루를 섞는 탓이라고 한다. 서울의 골목마다 있는 마른 사리 국수 또는 결혼식장에서 주는 국수요리 속에 몇 퍼센트의 메밀가루가 들었는지는 우리들의 단언할 수 없는 바다. 나는 서울서 횡행하는 국수의 대부분은 옥수수 농매나 그와 유사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틀 사흘을 두었다가도 제법 먹을 수 있고 얼렸다가도 더운 국물에 풀면 국수 행세를 할 수 있다. 이것은 국수가 아니고 국수 유사품이다. 평양냉면이나 메일국수와는 친척간이나 되나마나하다. >

 

 

'세렌디피티(serendipity) > 좋은 수필 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무 / 이양하  (0) 2016.01.26
거룩한 본능 / 김규련  (0) 2016.01.22
명태에 관한 추억 / 목성균  (0) 2016.01.14
우리 바둑이 그 후 / 최순우  (0) 2016.01.10
구두 / 계용묵  (0) 2016.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