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공감하는 이야기

2020. 7. 24. 08:16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오판과 편견

 

이 글의 제목은 '불편하지만 꼭 해야할 이야기'입니다.

솔직히 사람이 다른 짐승과 다르다고 하지만 본능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남자이다보니 남자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사람에게 있어 성(性)의 문제는 누구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평생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가로서 살았고, 여성과 페미니즘을 위해 앞장섰던 박원순 서울시장이 전직 여성 비서로부터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충격적 사건은 인간에 대해, ()에 대해, 죽음에 대해 근원적 질문들을 던집니다.

 

인간에 대해 수많은 정의가 있지만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 조르바영혼의 자서전에서 한 말을 잊지 못합니다.

 

우리는 영혼이라는 이름의 짐을 지고 다니는 육체라는 이름의 짐승이다. 여자가 흘린 눈물 한 방울이 그를 빠트려 허우적거리게 할 수도 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듯 인간은 신의 아들이 아니라 짐승의 후손이며, 단지 인간은 총명하고 부도덕한 짐승일 뿐이다.”

 

불교에서는 뼈를 깎는 수행으로 인간이 부처가 되었다 해도 번뇌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육체가 살아 있는 한 수많은 유혹과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평생 수행하고 성찰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성과 남녀관계에 대해 많은 얘기가 있지만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알랭 드 보통이 인생학교’ ‘영혼의 미술관등에서 한 말에 공감합니다.

 

성에 관한 한 조금이라도 정상적인 사람은 없다. 대부분 죄책감과 노이로제, 마음을 어지럽히는 욕망, 무관심과 혐오에 시달린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내면에 도사린 악한 본성을 억누르고 늘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강요받는다. 그 결과 성을 통해 우리의 내밀한 자아를 드러내 보이고 변태적이 될수록 짜릿함을 느낀다. 문제는 이때 남녀가 대등한 상태에서 합의해야 하는데 상호성이 결여돼 일방적으로 되는 순간 성폭력, 성추행의 나락으로 빠지고 만다.”

 

성에는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가 없습니다. 진보적 시민운동가라고 해서,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전쟁과도 같은 이 문제에서 한순간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박원순 전 시장이 부천서 성고문 사건과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을 앞장서 변론한 것과 성추행범으로 몰린 것은 본질적으로 별개고 아무런 연관성도 없습니다. 오히려 시민운동가, 인권운동가, 서울시장, 대권후보라는 무거운 짐이 그를 더 유혹에 빠지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사회 저명인사들의 성추문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당신의 성은 죄책감입니까? 노이로제입니까? 욕망입니까? 아니면 무관심이나 혐오입니까? 크게 나눠보면 대개는 욕망 또는 죄책감이 많지만 무관심과 혐오도 적지 않은 듯합니다. 물론 욕망이나 죄책감에서 출발해 무관심이나 혐오로 바뀌는 경우도 많고 그 반대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평생 성에 대해 무관심과 혐오로 살았다 해도 어느 순간에 욕망으로 급변할 수도 있는데 이때 큰 사고가 터지곤 합니다. 오죽했으면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조르바의 입을 빌려 '이놈의 전쟁과도 같은 성'이라고 탄식했을까요.

 

죽음에 대해 많은 얘기가 있지만 미국 예일대 철학교수 셸리 케이건이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한 고백을 늘 기억합니다.

 

삶이 소중한 것은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죽음이 나쁘다는 것은 그 뒤에 남겨진 사람들 때문이다. 자살은 현실에서 대부분 더 이상 삶이 가치 없다고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착각 때문에 일어난다. 하지만 대개 죽는 것보다는 살아 버티는 게 훨씬 나은 인생일 수 있다. 자살은 합리성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특정한 상황에서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고 적절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자살을 미화하는 게 결코 아니라는 점을 전제로 과거 노회찬의 죽음도, 지금 박원순의 죽음도 합리성과 도덕성의 관점에서만 보면 케이건 교수의 지적처럼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불가피한 결정이었습니다. 따라서 박원순의 자살이 피해여성에 대한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는 식의 주장은 위험하고 철학의 빈곤을 보여줍니다.

 

죽음이 나쁘다는 것은 그 뒤에 남겨진 사람들 때문이라고 했을 때 피해여성이 우선순위에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남은 사람은 피해여성만이 아닙니다. 박 전시장의 부인과 아이들도 있습니다. 박원순의 죽음으로 피해여성이 받는 고통과 박 전시장 가족이 받는 고통 중 어느 것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공자는 죽음에 대한 제자의 질문에 내가 삶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겠냐며 입을 닫았습니다. 한 인간의 죽음은 타자가 함부로 평가하고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죽음에 대해 남은 사람들이 해야 할 것은 추모와 애도뿐입니다. 나머지는 역사의 몫입니다. 고 박원순 전 시장에게도 역사라는 냉엄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회 저명인사일수록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인생은 누구도 특별하지 않습니다. 삶은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누구도 예외없이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늘 삶의 한 가운데 있습니다. 죽음과 삶은 하나입니다.

 

고 박원순 전 시장의 명복을 빕니다. 피해여성과 박 전시장 유족들의 깊은 상처가 하루빨리 아물고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머니투데이, 박종면 대표.

 

저도 글을 쓴 분과 같은 생각이라 조금 긴 글을 옮겨 놓았습니다.

아무리 잘나고 똑똑하고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라도 해도 남과 특별하게 다르지 않은 부분은 본능적 욕구라고 생각합니다.

 

성인(聖人)이라고 해도 신(神)이 아닌 이상 다 비슷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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