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 06:07ㆍ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오늘 모스크바에서 별세했습니다. 향년 91세입니다. 2004년에 '흐루시초프와 그의 시대'를 써 ‘퓰리처상’을 받은 윌리엄 타우브만이 그 후엔 『고르바초프: 그의 삶과 시대(Gorbachev: His Life and Times)』를 썼습니다.
이 책은, 소련을 스스로 무너뜨림으로써 인류를 구하였지만 자신은 정치적으로 몰락한 고르비를 '착한 사람'이라고 평하였습니다.
레닌과 스탈린이 만든 악마적 제국을 지휘부 안에서부터 붕괴시킨 힘이 한 개혁적 지도자의 선한 마음이었다니! 정의와 평등의 이름으로 수천 만 명을 살육한 공산당 안에서 이런 사람이 양심을 지키며 살아남았고, 권력까지 잡았다는 것은 이 시대의 또 다른 기적이었습니다.
20세기 후반에 인류가 감사해야 할 사람이 바로 ‘고르바초프’라고 확신합니다. 그의 착한 심성과 선의(善意) 덕분에 동구(東歐) 및 소련 공산제국이 평화적으로 해체되었다고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만약 1985년에 그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소비에트연방서기장’으로 뽑혔더라면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세계가 지금보다 훨씬 더 평화롭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어쩌면 아직도 베를린 장벽이 건재하고 ‘동서 냉전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고르바초프는 동구 공산권 국가들이 차례로 민주화되고 독일이 통일되는 과정뿐 아니라 소련 연방이 해체되어 가는 과정까지도 관리하였던 위대한 사람입니다. 어려운 2중의 해체기, 더구나 엄청난 핵무기를 가진 소련의 해체기에 유혈(流血)사태가 없었다는 점에 대하여 역사가들은 '그 가장 큰 공은 고르바초프이고 특히 그의 인간성에 있다'고 평가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삼가 고르바초프의 명복을 빌면서 그의 생애를 조금 가져왔습니다.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러시아어: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 영어: Mikhail Sergeyevich Gorbachev, 1931년 3월 2일 ~ 2022년 8월 30일)”는 러시아인이자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인이었다.
1978년, 고르바초프는 오래된 친구 쿨라코프가 심장 마비로 사망하자 쿨라코프가 일하고 있던 중앙위원회 농업사무국에 임명되었다. 그러자 고르바초프는 모든 관심을 농업에 집중했다. 당시 1979년부터 1981년까지의 수확은 모두 기상 조건으로 인해 모두 흉작이 되었으며, 결국 소련 당국은 더욱 많은 곡물을 수입해야 했다.
그는 국가의 농업 관리 시스템이 지나치게 중앙집권화 되어 있고, 보다 많은 상향식 의사 결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소련 농업에 대한 우려가 커져만 갔다.[128] 이전에 그는 1978년 7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중 그의 첫 번째 연설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제기했다.
이후 고르바초프는 소련 당국의 다른 정책에 대해서도 우려하기 시작했다. 1979년 12월, 소련은 이슬람 반군에 맞서 소련과 동맹을 맞은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붉은 군대를 아프가니스탄으로 파견했다. 고르바초프는 이 군대 파견을 개인적으로 실수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고르바초프는 대부분의 정부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을 나타냈다. 예를 들어 1980년 10월 그는 폴란드의 공산 정부 내에서 증가하는 반대 의견을 탄압하라는 소련 정부의 요구를 지지했다. 같은 달에 고르바초프는 후보 의원에서 소련 공산당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정회원으로 승진하였고, 그는 정치국 회원 중 가장 젊었다.
그는 소련 8, 9대와 마지막 11대 소련 지도자였으며,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서기장, 1988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최고 소비에트 상임위원회의 의장을, 1989년부터 1990년까지 최고 소비에트의 의장을 지냈다.
권력을 박탈당한 그는 1990년부터 1991년까지 새로운 직위인 소련 대통령을 만들어 명목상으로 집권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집권기 초기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고수했으나, 1990년대 초부터 사회민주주의적인 정책을 펼쳤다.
고르바초프는 집권한 이후, 소련이라는 국가 자체와 사회주의 이념을 유지하는 데에 전념했지만,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상당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우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공식적으로 철수하였으며, 이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통해 핵무기를 제한하여 냉전을 종식시켰다.
국내적으로 그의 글라스노스트("개방") 등과 같은 정책은 언론과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강화했지만, 반대로 페레스트로이카("구조조정")과 같은 정책들은 효율성을 위해 경제적 의사 결정을 분산시키려고 하였다. 그의 민주적인 정치와 선출된 소련 인민대표대회의 구성은 소련의 일당제를 악화시켰다.
고르바초프는 1989년과 1990년 많은 동구권 국가들의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졌을 때, 군사적 개입을 거부하였다. 내부적으로 고조되던 민족주의는 소련의 분열을 암시했고, 마르크스-레닌주의 강경파는 1991년 고르바초프에 대한 8월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실패하였다.
이후 소련은 고르바초프의 의사로 해체되었고, 사임한 후 고르바초프 재단을 세워 보리스 옐친과 블라디미르 푸틴의 중심적인 비판가가 되었으며, 러시아의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20세기 후반 가장 중요한 인물로 널리 여겨지는 고르바초프는 아직까지도 논란의 대상이다.
그는 냉전 종식, 소련에서 정치적 자유화를 도입하고 독일의 통일과 동구권의 공산주의 정권의 몰락을 용인하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에 노벨 평화상을 받고 찬사를 받았다.
반면, 그는 종종 소련의 해체를 가속화시켰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러시아의 세계적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경제 붕괴를 촉발시킨 것에 분노한 러시아인들이다.“> 위키 백과
고르바초프는 우리나라 서울 울림픽 성공에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북한정권의 반대를 묵살하고 서울 올림픽에 소련이 참여하도록 결정하였고, 우리나라와 소련의 수교도 일찍 결단하였습니다. 서울올림픽 이후의 대한민국의 발전에 대해 우리 국민들이 가장 국민들이 감사해야 할 인물이 고르바초프라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는 미국을 필두로 한 서방 국가들과 옛 소련을 앞세운 공산 국가들의 대립이 극심해서, 정치와 이념 논리가 배제돼야 할 '세계인의 축제' 올림픽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 때문에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과 1984년 LA올림픽은 반쪽 행사가 되었고 서방 국가들과 동구권 국가들이 번갈아 올림픽 참가를 보이콧을 선언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사의 전환이 시작된 건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입니다. 서울올림픽은 양쪽 진영 160개국이 동시에 참가, 냉전 종식을 알리는 축제였다는 평가를 받는데 이는 다분히 고르바초프의 결단에서 비롯된 일이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생전 4차례나 방한했을 정도로 한국과 인연이 깊습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지도자 중 최초로 한국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가졌고, 노태우 대통령을 비롯해 김대중·노무현 대통령과도 두루 만남을 가졌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동구권 공산국가들이 대거 참가하는데 고르바초프가 뒤에서 큰 힘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90년 9월에는 양국이 전격적으로 수교했습니다. 북한이 신경전을 벌이며 반대했지만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에 힘입어 한국 북방외교는 성과를 냈고 이를 계기로 소련은 북한에 대한 원조를 끊고, 한국의 유엔 가입을 지지했습니다.
고르바초프,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의 위상이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과 세계 많은 나라가 그에 대해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제 생각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우리 현대사에 끼친 공로는 결코 과소평가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 > 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주주의의 무기고 (0) | 2022.09.04 |
---|---|
어제, 그리고 오늘 (0) | 2022.09.02 |
탁현민의 꼼수 (0) | 2022.08.31 |
한복디자이너에게 묻습니다 (0) | 2022.08.30 |
때를 알아야 (0) | 2022.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