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민낯

2024. 8. 15. 07:55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


  오늘은 광복 
79주년이 되는 광복절입니다.

해마다 광복절에 여러 얘기가 많았지만 특히 올 해는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두고 여와 야, 우와 좌가 진영논리로 광복절 기념행사를 진영끼리 따로 갖겠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1945 8 15, 광복이 우리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연합국에 의한 일본의 항복으로 된 것이라 마치 남이 선심을 써서 얻은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입니다.

 

툭하면, ‘친일파로 몰아붙이고 임시정부의 법통을 꺼내드는 좌파들을 보면서 그들이 그렇게 떠드는 임시정부의 역사와 행태가 그리 자랑스럽지 않다는 사실에 참담할 뿐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 3 1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계기로 경술국치와 그로 인한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 주도와 민주공화국 설립을 위한 목적으로 건립된 임시정부다. 줄여서 임정이라고도 한다.

 

한일병합조약을 통해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본 제국에게 양도한 행위는 무효이며, 포기한 주권은 대한국민에게로 승계됐다는 정신이 확립됐다(대동단결선언). 이에 따라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자, 신한청년당은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김규식)를 파견했고, 일본에는 장덕수를 파견하여 2.8 독립 선언을 하도록 했다. 이러한 일련의 소식들이 식민지 조선에 전해지자 독립에 대한 희망이 생겼고, 태상황 고종의 사망으로 군중이 운집한 상황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

 

3.1 운동의 결과 상하이에서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1919 4 10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창설했다. 여기에서 국호와 정부 형태, 임시헌법 등을 논의하게 되었는데, 신석우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라고 제안하여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이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했다. 이때 여운형은 "대한이란 말은 조선 왕조 말엽에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며 반대했다. 후에 그의 조직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내세운 국호도 조선인민공화국이었다. 다음 날인 1919 4 11일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이승만을 초대 국무총리로 하여 상하이 임시정부를 결성했다.

 

이전에는 임시정부 수립일이 4 13일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당시 임시정부에서 4 11일에 정부 수립 기념식을 거행했다는 자료가 공개됐고, 학계에서 지속적으로 기념일 일자 변경을 요구해 왔다. 그래서 2018 4 13일에 대한민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임시정부 수립 일을 4 11일로 바꿨다. 그리고 2019년부터는 4 11일을 임시정부 수립일로 기념하기로 했다. 30년 만에 임시정부의 생일을 바로 잡은 것이다.

 

상하이 임시정부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기치를 내걸고 경성부에서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한 한성정부가 대조선공화국을 국호로 하여 13도 대표 국민대회의 명의로 선포됐고(1919 4 23)[20]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대한국민의회가 결성됐다(1919 3 17). 상기 단체 외에도 1919년에는 고려 임시정부, 신한민국 임시정부, 조선민국 임시정부 등 여러 단체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있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칭하는 세력들이 분산되어 있을수록 항일투쟁이 힘들다는 의견이 모아져서 서로 통합을 계획하게 된다. 참고로 이승만은 고려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총리로, 신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국방총리로, 조선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집정관총재 겸 국무총리로 추대되어 있었다.

 

이에 대한국민의회 - 상하이 임시정부가 먼저 통합을 하기로 했지만 중국과 러시아라는 위치 문제로 좌절되었다. 그러나 대한국민의회의 대다수를 임시의정원에 포함시킨다는 조건으로 결국 통합되었다. 한반도에 있는 한성정부와의 통합 역시 난관이 많았지만 한성정부가 국제 언론에 노출되었다는 것, 국내에서 13도 대표 국민대회를 통해서 결성되었다는 점에서 정통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래서 정통성과 기틀에서는 한성정부를 따르는 대신에 위치와 국호에서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따르는 것으로 합의안을 완성했고, 1919 9 11일에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추대하면서 새롭게 통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결성했다.

 

참고로 상하이 임시정부를 제외한 여러 단체들은 물론 실질적으로는 임시정부이긴 했어도 임시정부라고 자칭한 적은 없다. 임시정부는 정부를 지칭하는 이름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각 단체들은 국호인 고려, 신한민국, 조선민국, 한성정부의 대조선공화국 등을 그대로 각각 사용하다가 통합에 따라 상하이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으로 통일된 것이다.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당시의 참여자로는 여운형, 조동호, 손정도, 조소앙, 김철, 선우혁, 한진교, 신석우, 이광수, 현순, 신익희, 조성환, 이광, 최근우, 백남칠, 김대지, 남형우,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조완구, 신채호, 진희창, 신철, 이영근, 조동진, 여운홍, 현장운, 김동삼 등 29인이 있었다.

 

이 중 여운형, 조동호, 손정도, 조소앙, 김철, 선우혁, 한진교, 신석우, 이광수는 신한청년당 당원이었다. 그만큼 창립 당시에 신한청년단의 영향은 강했다(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3.1 운동의 불씨를 제공한 게 신한청년당이었으니 당연하다.). 김구도 신한청년당에 관여하였지만, 정부 수립 당시에 참여하지는 않았고 수립 며칠 후에 임시정부를 찾아왔다. 김규식도 신한청년당원이었지만 당시 미국에서 이승만과 함께 독립 운동을 하고 있어서 임정 수립 당시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1919 9 11일 통합 대한민국 정부 성립 이후 한성정부의 내각을 그대로 승계한 임시정부는 초기에 교통국, 연통제(자금 및 연락용) 조직을 만들고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외교활동을 하는 등 각종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독립선언을 바탕으로 자주국의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공통된 견해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정 내부에서는 기호파와 서북파 간의 갈등,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갈등이 심각했는데, 그 갈등이 극에 달한 사건이 바로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이다. 임시정부 내의 사회주의 진영은 이르쿠츠크 파벌과 상해 파벌, ML 파벌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1921년 임정 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국제공산당으로부터 받은 200만 루블을 임정에 내놓지 않고 사회주의 진영 독립운동가들에게 나눠준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로 인해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마저 독립운동가들이 갈등을 빚었으며, 이후 자금과 관련한 갈등은 사회주의 내부의 분열을 넘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이념 대립으로 확대되고 만다. 이 과정에서 김립이 피살되었으며, 이후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와 개조파로 독립운동 진영이 나뉘어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게 된다.

 

여기에 초대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에 위임통치 청원서를 썼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하게 된다. 이때, 단재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라며 크게 성토를 하였다. 그러나 위임통치 청원은 이승만뿐만 아니라 김규식이나 안창호 등도 동의하던 것이었다.

 

이 청원으로 3.1운동을 방해하려 했다는 오해도 있는데 실제론 3.1운동이 벌어지기 전에 쓴 것이고 당시엔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도 몰랐다. 자세한 내용은 위임통치 청원 사건 참조. 신채호가 이승만과 대립한 것은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이 크게 문제가 된 시기라기보다는 이승만이 국무총리로 선임된 그 순간부터였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대통령직에 재임하면서도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상하이에서는 활동이 거의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는 주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안창호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활동했는데 안창호는 임정 업무를 처리하느라 과로했고, 이승만에게 빨리 상하이로 와달라고 했지만 워싱턴에서 서재필과 외교 임무에 몰두하고 있었고 또 일본의 감시가 워낙 심했기 때문에 곧바로 상하이로 갈 수가 없었다.

 

결국 하와이 장의사 윌리엄 보스윅(William Borthwick)을 통해 일본을 경유하지 않고 상하이로 직항하는 중국인 시체관을 실은 배에 몰래 잠입하여 1920 12월 경, 상하이에 도착한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자 1923년 신채호 주도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각지의 200여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는데, 여기에서 임시정부의 기존 정부를 해체하고 다시 정부를 수립, 무장 투쟁할 것을 주장 하는 '창조론'의 이르쿠츠크파와 기존 정부를 유지하고 부분적으로 구조를 바꾸자는 주장을 한 개조론의 상해파로 분열되었다. 창조파는 심지어 연해주로 가서 별도의 국민대표회의를 열기도 했지만 막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소련에 쫓겨나서 뿔뿔이 흩어졌다.

 

한편 이승만은 하와이 교민의 자금을 멋대로 썼다는 이유로 1925년에 탄핵을 당하게 된다. 이승만이 있는 구미위원회가 그 자금을 맡았는데 외교 활동으로 다 쓰고 본부엔 조금밖에 안 보냈다고. 친이승만 인사였던 조소앙은 이 때 이승만에게 쿠데타를 건의한 바 있으나 이 건의는 무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8년 유엔 총회와 미군정이 합동으로 주관하는 5.10 총선거가 시행되어 5 31일 제헌 국회가 개원하였고, 7 12일 헌법 제정, 7 17일 헌법을 반포하였다. 이에 따라 7 20일 대선을 실시하여 7 24일 이승만이 취임했고 8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임시정부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김구와 김규식 등의 마지막 활동은 4월의 남북연석회의였다. 이들은 5.10 총선에 참여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임정이라는 단체는 사라졌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임정법통론 회의론자들의 주요 근거들 가운데 하나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제헌 국회는 이승만 계파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한민국을 새로운 나라의 국호로 삼았고, 제헌 헌법의 전문에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는 문구를 넣었다.

 

한참 뒤에 국가재건최고회의가 5차 개헌을 하면서 5.16 군사정변의 정당성을 위해 헌법에서 해당 문구를 삭제하고 4.19 의거와 5.16 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는 문구로 바꿨다.

 

그러다가 1987 9차 개헌에서 헌법의 전문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는 구절을 삽입함으로써 법통 계승을 보다 명문화하였다. 1919년 독립선언과 그로 인한 3.1 운동으로 성립된 임시정부에 대하여 민주공화국 체제로서 대한민국의 기원과 통치 권력의 정당성이 있음을 명문화했다.

 

또한 2019년에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국회도 임시의정원의 상징을 물려받아 역사 계승을 천명하기도 하였다.>나무위키

 

   출처 : 나무위키. 대한민국 임시정부

 

 흔히 조선왕조를 말아 막은 것은 당파싸움이라고 하지만 임시정부 25년 동안의 파벌 싸움을 보면 조선시대 당파 싸움과는 너무나 격이 떨어지는 동네 조폭들  세력 싸움 같았습니다.  지역, 이념, 이기심 등 자신들 끼리만 똘똘 뭉치고, 남 잘 되는 꼴 못 보고, 그저 자기가 좋은 자리 차지하고 싶은,,,  상해에서 부터, 중경까지 역사를 살펴보면 이게 정말 대한민국을 위해서 일했다는 임시 정부인지 참담할 뿐입니다.

 

언제 제대로 임시정부의 민낯을 공개하는 다큐가 만들어져서 그저 말로만 임시정부를 떠들고 그 말에 속아 넘어 간 국민들에게 부끄러운 역사지만 제대로 알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가 정리하고 있는 자료는 15쪽이 넘는 방대한 양이라 여기에 다 싣지 못하지만 곧 정리해서 다른 난에 올릴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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