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4. 14. 20:53ㆍ사람과 사진과 사진기/사진기와 렌즈
내가 처음 갖게 된 사진기는 1987년 4월에 구입한 동원 펜탁스(PENTAX) 엠이 수퍼(ME SUPER)였다. 지금도 사진기는 비싸지만, 그때는 시골 자갈밭을 몇 마지기 팔아야 될 만큼 값이 비싼 거여서 감히 엄두도 못 내다가, 학교로 찾아온 외판원에게 24개월 할부로 샀다. 그 외판원은 우리 학교에 우연히 들렀다가 사진기를 5대나 파는 횡재를 하고 갔다.
펜탁스 ME-SUPER는 그 당시 고급 기종에 속하는 것으로 f.3.5-4.5, 35-70mm 줌(Zoom) 렌즈가 장착되어 있었다. 그 때 가격은 작은 플래시 포함해서 45만원이었다. 이 사진기는 일본 펜탁스의 부품을 한국에서 조립한 것이었으나 렌즈는 펜탁스 제 것이 아닌, 이름도 생소한 슈퍼 렌즈였다. 뒤에 알고 보니, 당시 시중가격보다 15만원을 더 준, 바가지 흠뻑 쓴 사진기였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학교 선생님들은 외판원의 봉으로 알려져 있고 나도 사진기 때문에 딱 한 번 봉이 된 것이다. 그래도 사진기를 산 처음에는 무척 아끼고 자랑스러워 쉬는 날이면 임신한 아내며, 학교 아이들, 대학 후배들 사진 찍어주겠다며 자주 끌고 다녔고, 찍은 사진을 보며 스스로 흐뭇해했다.
동원에서 조립 생산한 펜탁스 ME-SUPER는 그런 대로 괜찮은 기계였다. 조리개 우선 자동 노출도 되고, 최고 셔터 스피드가 1/2,000초, 플래시 동조 속도가, 당시엔 상당히 빠른 1/125초가 되는 것으로 가볍고 콤팩트했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렌즈가 교환되는 일안 반사 형식(S. L. R)의 수동 사진기를 하나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깨에 힘이 들어갈 만한 일이었다.
지금도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사진기를 처음 살 때 기계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렌즈가 교환되는 일안 반사 형식(Single Lens Reflex)의 사진기를 사게 됐다는 점이다. 그때 렌즈 셔터 형식의 콤팩트 사진기를 가졌더라면, 지금처럼 오래 사진을 찍지는 않았을 것이다. 같이 근무하셨던 서정웅 선생님의 조언과 도움으로, 일안 반사 형식의 사진기를 갖게 된 것이 내게는 정말 큰 행운이 되었고, 집사람에게는 매우 못마땅한 결과를 가져온 갈림길이 된 것이다.
사진기를 가지면서 사진기 및 사진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종로서적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책을 보기도 하고 사기도 했지만, 그 당시에는 책을 봐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지금도 불만인 것은 대부분의 사진 관련 서적은 일본에서 나온 책을 이리저리 인용한 것이어서, 제목은 달라도 거기 나온 이야기나 사진은 같은 것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책으로 본 것들이 실제 사진 찍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사진이나 기계에 대해 웬만큼의 기본지식은 가지게 되었다.
그때 내가 사서 읽은 책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사진기술개론』이다. 이 책은 미국의 저명한 현대 사진가 율스만(Jerry Yulsman)이 쓴 것으로 이복희 님이 번역해서 ‘해뜸’에서 나온 것이다.
사진기를 사고 넉 달쯤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청계천 골목을 우연히 지나다가 거리에서 파는 책을 한 권 사게 되었다. 그 책은 미국 PX 유통망에서 팔리는 사진기와 렌즈에 대한 목록과 가격이 나온 것이어서 호기심에 샀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사진기의 가격에 관계된 책들은 일반서점에서는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영어로 씌어 있어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그 책을 통해서 그 당시에 유통되고 있는 각 제조업체의 사진기와 렌즈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고, 나는 그 덕에 어줍잖은 사진기 전문가가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독일과 일본의 사진기 회사에서 나오는 모델들과 가격이 거의 망라되어 있어, 어느 것이 더 비싸고 싼 것인지 알게 되고, 그 값의 고하(高下)로 고급형인지 보급형인지를 스스로 파악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누가 사진기에 대해서 말하면 웬만큼 끼어 들게 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많이 아는 체하게 되었다. 그리고 책에서 본 것들을 사진기점에 가서 눈으로 확인하고, 값도 물어보고 하면서 조금씩 안목을 넓혀 나갔다. 그 PX용 책에 나온 가격은 면세로 된 것이어서 실제 시중가격과는 차이가 있고, 그 관계를 정확히 몰랐기 때문에 내가 실제로 무엇을 살 때는 바가지 쓰는 일도 많았다.
그 해 여름방학이 되어 우연히 미도파 백화점 사진기점에 들렸다가, 비비타 시리즈 원(Vivitar series I) f.2.8-4.0, 70-210mm 줌 렌즈를 보고는 맘에 들어, 며칠을 고심하다가 아내의 동의를 얻어 43만원 24개월 할부로 구입했다. 예나 지금이나, 백화점을 지옥처럼 절대 가서는 안 될 곳으로 알고 있는 내가 그때 어떻게 백화점에 가게 되었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어찌 갔던 한 번 간 백화점에서 두고두고 후회할 일을 저질렀다. 더 자세히 알아보고, 앞뒤 계산한 뒤에 사도 되는 것을 내가 무턱대고 사버려, 사진기와 렌즈 할부금 때문에 가계(家計)에 큰 부담을 준 것이다.
그리고 뒤에 알고 보니, 그 렌즈도 다른 시중 가격보다 두 배 이상 비싸게 주고 산 것이었다. 나는 이 얘기를 집사람에게 할 수도 없고 혼자 앓다가, 소비자보호원에 제소까지 했었다. 그러나, 물건에 하자가 있는 것이라면 문제가 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물건의 가격은 통제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하여, 내가 손해를 고스란히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백화점에 다시 갈 일도 없겠지만 그때의 충격은 두고두고 가슴에 남게 되었고, 누가 백화점에 사진기 사러 간다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말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 후론 가계에 부담 줄 미련한 구매는 않게 되었지만 한동안 쪼들리는 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그래도 한 가지 내게 위안이 되었던 것은, 바가지 흠뻑 쓰고 산 비비타 렌즈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는 점이다. 비싸게 주고 산 것이라 조심스럽게 잘 다루기도 했지만, 사진이 맘에 들게 나왔다. 사실 그때야, 사진이 어떻게 나와야 좋은지 알지도 못할 때지만, 사람 얼굴의 색이 너무 곱게 보여 사진을 보면서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만큼 발색이 좋았다.
35-70mm 줌 렌즈와 70-210mm 줌 렌즈, 나는 이 두 개의 렌즈로 웬만한 것은 다 찍을 수 있었다. 특히 70-210mm 줌 렌즈는 마크로 기능까지 탁월해서, 비비타 시리즈 원(Vivitar series I) 렌즈에 대한 신뢰도를 크게 갖는 계기가 되었다. 비비타 렌즈는 일본에서는 구하기가 힘들지만 미국에서는 크게 호평 받는 렌즈로, 렌즈에 대한 설계는 미국 회사가 하고, 일본 회사에 OEM 방식으로 주문 제작하여 미국 시장에서 판매된다고 들었다. 이 비비타 렌즈가 우리 나라에는 미군 PX 등을 통해서 들어와 한때는 웬만큼 보급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내가 살 무렵에는 흔치 않은 것이었다. 지금은 미군 PX가 아니더라도 비비타의 국내 판매망을 통해서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중고품 몇 종류만 겨우 볼 수 있었다.
나는 렌즈를 살 돈이 없었어도, 시간만 나면 남대문 사진기점에 가서 기웃거리는 버릇이 생겨서 이 집 저 집을 드나들었다. 가격도 물어보고 구경도 하면서 가지고 싶은 것에 욕심을 내기도 했으나 그것들을 살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수입은 한정되고 써야 할 곳은 많으니, 모두가 그림 속의 떡에 불과했다. 다행히 해가 지나면서 보충수업 수당이 조금씩 올라가서, 카드로 물건을 사도 큰 액수가 아니면 견딜 만큼 되었다. 그 덕에 35-70 슈퍼 렌즈를 국산 폴라(polar) 28-70mm 줌 렌즈로 바꾸었고, 그것을 다시 비비타 시리즈 원(Vivitar series I) 28-90mm 줌 렌즈로 교체했다. 사진기도 펜탁스 프로그램 A(program A)로 바꾸었다가, 다시 펜탁스 슈퍼 A(super A)로 교체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 샀던 사진기와 렌즈는 다 교체되어 지금은 그때 것이 하나도 없다.
렌즈든 사진기든 한 번 바꿀 때마다 5~10만원 정도가 들어가, 내 주머니 속에는 늘 먼지만 가득했다. 다행히 1992년 이후는 학습문제지 원고료가 웬만큼 들어와 사진기 사는데 큰 도움이 됐지만, 돈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모두 사진기와 렌즈에 털어 넣어서 생활에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졌다는 뿌듯한 마음에 거지처럼 살아도 흡족했다. 그때까지는 남대문의 몇 집을 다니며 이것저것 사고 또 되팔기도 했지만, 내게 특별하게 잘 대해준 집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어느 집이든 내 기억에 남게 잘해줬더라면, 오늘날 내가 가진 만큼의 사진기와 그 액세서리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가보카메라로 옮겨가지 않았더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지금 가진 만큼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내가 사진기와 렌즈를 교체하면서 배운 것이 가급적 한 곳과만 거래해야 된다는 평범한 진리였다. 이곳에서 산 것을, 저곳에 가서 교환하면 30% 가까이 까지지만 같은 곳에서 하면 10% 정도에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느 집에서나 통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잘 모르는 곳에 가는 것보다야 나을 것이다.
'사람과 사진과 사진기 > 사진기와 렌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풀 프레임 디카로 찍어 보니 (0) | 2011.05.17 |
---|---|
반사 렌즈 (0) | 2011.05.12 |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진기 (0) | 2011.04.14 |
사진기 (0) | 2011.03.07 |
사진기 렌즈(2) (0) | 2011.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