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8. 16:47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감자와 고구마는 다 들어온 말이다. 감자는 한자어 ‘감저(甘藷)’에서 왔고, 고구마는 일본말 ‘고쿠마이’에서 온 거다. 우리 어릴 때는 이 둘을 ‘보리 감자’와 ‘쌀 감자’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들이 요즘 먹는 흰색 감자보다 예전에 먹던 자주색 감자가 더 맛이 좋았다고 하는 얘기를 해서 깜짝 놀랐다. 내가 모든 자주색 감자를 다 먹어 보지 않아서 자주색 감자가 맛이 다 같다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지만 자주색 감자가 맛이 더 좋았다니…….
자주 꽃 핀 건 자주감자
파 보나마나 자주감자
하얀 꽃 핀 것 하얀 감자
파 보나마나 하얀 감자.
-권태응, 감자꽃
이 노래처럼 하얀 꽃 핀 것은 하얀 감자가 달리고 자주 꽃 핀 것은 자주 감자가 달린다. 우리 어릴 때 오서산 아래는 거의가 다 자주 감자뿐이었다. 자주 감자가 하얀 감자에 비해 생명력이 왕성해 어디서나 잘 자랐지만 생긴 모습이 못 생기고 아린 맛이 강해 지금의 감자처럼 맛이 좋지는 않았다.
그때의 하얀 감자는 마령서(馬鈴薯)라고 했는데 자주 감자 속에 어쩌다 하나 둘 끼어있는 정도였다. 하얀 감자를 ‘마령서’라고 부른 거는 감자가 말방울처럼 둥글게 생겨서라고 한다. 그렇다면 자주 감자는 둥근 것이 아니라 길쭉하다는 얘기다.
감자를 사다먹는 집은 없었고 대부분 밭에 몇 고랑씩 심었으나 내다 팔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아주 작은 것들은 간장에 조려서 반찬으로 먹었고 굵직굵직한 것들은 쪄서 먹었다. 그 때는 감자가 굵다고 해도 요즘처럼 굵지도 않았고 매끄럽지도 않았으며 길쭉길쭉한 생김이었다. 게다가 껍질도 두꺼워 쪄서 먹으려면 낡은 숟가락으로 껍질을 벗겨내야 했는데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주 감자라고 해서 속까지 자주색은 아니고 껍질만 자주색이다. 감자를 물에 담갔다가, 1/3쯤은 닳아 없어져 다른 때는 안 쓰는 숟가락으로 득득 긁어 껍질을 벗긴 뒤에 솥에 쪄서 먹었다. 감자 껍질이 손에 닿으면 괜히 싫어서 털어 내어도 자주 손이나 옷에 붙어 댕겼다.
감자만 쪄서 따뜻할 때 먹으면 그래도 나았지만, 이것을 밥할 때 솥에 넣었다가 식었을 때 밥알이 붙은 것을 먹으려면 찐득거리고 아린 맛이 더 심해서 정말 먹고 싶지 않았다. 우리 동네에서는 감자를 주식으로 먹지는 않았지만 여름에 양식이 떨어진 가난한 집들은 애들이 점심으로 먹었다.
어른들은 남의 집에 일을 가니까 거기서 해결하지만 학교에 갔다가온 애들은 아침밥을 할 때 밥솥에 넣고 찐 감자 몇 알로 점심을 때울 때가 많았다. 나는 그러잖아도 감자를 잘 안 먹어, 친구 집에 갔다가 이런 감자를 주면 정말 난감했다. 친구 혼자 먹기도 적은 것을 내게 주는 것도 미안했지만 그것을 먹기도 무척 힘들었다.
나는 감자를 사 먹지 않는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감자를 사와 먹으라고 권할 때가 많지만 여간해서는 먹지 않는다. 옛날 그 찐득한 감자에 밥알이 붙어 있던 것이 생각나기도 하고 그 어렵던 시절을 생각해서 감자를 군입거리로 먹는다는 것이 영 개운치 않아서다.
언제부터인지 오서산 아래도 자주 감자가 자취를 감추고 이젠 다 흰 감자이다. 1970년대 이후 대관령 지방에서 우리 토양에 강한 하얀 씨감자를 전국적으로 보급하여 지금은 어디서나 하얀 감자를 심고 먹는다. 어디서 들으니 미국산 감자가 국산보다 훨씬 맛이 좋다고 한다. 미국 패스트푸드점에서 파는 감자튀김은 다 미국산이라고 들었다. 그렇지만 내 입맛에 감자는 역시 감자일 뿐이다.
인터넷 검색사이트 네이버(www.naver.com)에서 찾아보니 자주 감자를 돼지감자라고 불렀다고 나와 있어서 놀랐다. 이는 잘못된 거라고 생각한다. 돼지감자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돼지나 소에게 먹이는 뚱딴지가 돼지감자로 이것은 감자와는 종자가 아예 다른 것인데 이것도 외국에서 들여 온 거다.
돼지감자는 번식력이 강해 한번 심어 놓으면 사람이 손보지 않아도 잘 자란다. 우리 어릴 때는 사람들이 먹기도 했지만 그 맛은 감자와는 사뭇 다르다. 언젠가 서울의 감자탕 집에서 이런 돼지감자를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것은 솔직히 믿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리 술꾼들이라고 해도 돼지감자의 물컹한 맛을 분별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감자는 씨감자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서 심는다. 조각난 감자에 씨눈이 붙어 있으면 거기서 싹이 나와 자라고 그 아래 땅 속 줄기에 감자가 달렸다. 감자를 심을 때 보면 자른 면에 재를 발라서 심던데 수분 증발을 줄이고 썩지 말라고 그럴 거다.
고구마는 봄에 땅에 묻어 거기서 싹이 나와 자라면 그 줄기를 잘라서 심었다. 그러니까 일이 두 번인 셈이다. 요즘은 집에서 아이들이 고구마를 물에 넣어 그 뿌리와 줄기를 키우는 것을 종종 보지만 예전에는 그런 사치를 부릴 수가 없었다. 겨우내 고구마를 먹다보면 씨 고구마 까지도 먹을까봐 챙겨 두곤 했었다.
내가 감자보다는 많이 먹은 게 고구마다. 요즘은 고구마도 품종개량이 많이 되어 지역의 특산물로 붉은 고구마, 노란 고구마가 나온다고 들었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냥 다 비슷했고 그 맛에 따라 밤고구마와 호박고구마 정도로 나누었을 뿐이다.
세상이 변해 오서산 아래에도 고구마를 심는 집이 많지 않고 사다가 먹는다고 들었다. 아이들이 없으니 고구마를 심을 일도 없을 거다. 꼭 필요할 때 몇 킬로그램만 사다가 쓰면 되니 굳이 싹을 틔워 밭에 심고, 김을 매고, 캐야 하는 번거로움을 사서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전엔 식구가 많은 집은 고구마가 필수작물이었다. 아이들 간식거리로도 그만이지만 겨울 한철에 점심밥 대용으로도 훌륭했다. 솥에 삶아서 뜨거울 때 김장김치와 곁들여 먹으면 해가 짧은 겨울철에 한 끼니 때우는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긴긴 겨울밤에 밖에 내놓아 살짝 얼은 고구마를 깎아서 먹는 즐거움도 컸다.
고구마는 겨울에도 불을 잘 안 때는 골방이나 헛간 같은 곳에 밀대방석을 이용하거나 볏짚으로 통가리를 만들어 거기에 보관하며 먹었다. 온도 변화가 심하거나 기온이 올라가면 잘 썩기 때문에 보관에 신경을 써야 했다. 감자는 겨울을 날 일이 없기 때문에 마루 밑 같은 서늘한 곳에 놓아두면 신경 쓸 일 없었지만 고구마는 조금 까다로웠다.
소여물을 끓이는 아궁이에 고구마를 몇 개 넣었다가 밤에 먹기도 했고 아주 잔 것들은 화로에 넣어놔도 잘 익었다. 나는 감자보다 고구마를 훨씬 많이 먹었다. 우리 어릴 때는 고구마를 쌀 감자, 감자를 보리 감자라고 하여 그만큼 고구마를 더 높게 쳤다.
근래에 알고 보니 감자의 원산지는 남미 안데스산맥 부근이고 고구마도 남미라고 한다. 거기다가 돼지감자는 북미라고 해서 놀랐다. 이 소중한 것들은 전부 아메리카인디언들이 먹던 거였다. 별거 아닌 것들로 아는 이 감자, 고구마, 돼지감자가 굶주려 죽을 번한 많은 인류의 생명을 구한 거다. 나는 솔직히 감자도 고구마도 돼지감자도 크게 좋아하지 않지만 근래에 와서는 살을 빼겠다고 자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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