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8. 16:48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내가 배를 곯아 본 것은 군대 가서 원주 하사관 학교에 다니던 13주뿐이다.
내가 입대한 것은 1979년 4월 3일이다. 춘천으로 가서 간단한 절차를 밟은 뒤에 화천 7사단 신병교육대로 갔다. 입대해서 8주간 신병교육을 받는 동안은 통 밥을 먹지 못했다. 그 냄새나는 밥이 도저히 넘어가질 않아 내 짝만 늘 횡재했다. 말로만 쌀이 70퍼센트이지 시커먼 정부미에 30퍼센트의 보리쌀을 섞어 지은 그 밥은 정말 먹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밥을 못 먹으면서 고되게 훈련을 받으니 체중이 눈에 보이게 줄었다. 훈련소 들어갈 때 85킬로그램이었으나 훈련소 나올 때는 정확히 20킬로그램이 빠진 65킬로그램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부대로 가니 여기도 비록 정부미였지만 100퍼센트 쌀로 지은 쌀밥이었다. 대한민국 육군 규정은 어디나 다 같겠지만 전방은 증식미라고 해서 쌀 30퍼센트가 더 나온다고 했다. 이때쯤에는 나도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있었다. 쌀밥이어서가 아니라 배에 끼었던 기름이 다 빠져서인지 밥이 당기었다. 그렇다고 크게 밥 탐을 하지는 않았지만 밥을 잘 먹었고 먹을 양도 충분하게 나와서 밥 때문에 고생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먹지 않아서 남은 보리쌀이었다. 쌀이 충분하기 때문에 보리쌀을 먹을 필요가 없었으나 검사 나오면 다 먹은 것으로 해야 된다고 해서 땅을 파고 묻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때 보리쌀을 땅에 묻으면서 죄를 짓는 심정이었지만 나 같은 졸병이 그런 걱정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원주에 있는 육군 제 1하사관 학교에 가니까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부대에 있을 때는 날마다 건빵 한 봉지와 라면 하나가 간식으로 나왔고 하루 정량 828그램에 전방부대에 대한 특별 지원으로 증식미 30퍼센트가 더 지급되어 배를 곯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었다. 거기에 비해 하사관 학교는 라면은 아예 없고, 건빵도 1주일에 한 봉 주고, 식량도 하루 정량 828그램 외는 더 안 주는 데다 밤낮으로 뛰면서 훈련을 받으니 머릿속에는 항상 먹을 것만 생각날 뿐이었다.
그저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우리는 그때 매주 수요일 저녁 무렵에 치악산 방향으로 10킬로미터 구보를 했었다. 당시 원주 변두리 길은 비포장이었고, 길가에 드문드문 울타리도 없고 마루도 없는 가난한 초가집들이 보였다. 그런 가난한 집에서 흘러나오는 저녁 짓는 냄새에 딴 생각하다가 넘어지면 빙판 위라 대여섯이 걸려 함께 넘어지곤 했었다.
초가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구수한 밥 냄새와 김치찌개 냄새가 배고픈 훈련병들 머릿속에 온갖 상상을 다 불러 일으켰던 거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집의 밥상 위에 올라갔을 밥은 꽁보리밥이었을 것이고 반찬이라고는 겨우 김치와 김치찌개 정도일 거였다. 그래도 그런 밥이나마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큰 행복이었을까?
나는 그 때 배고픔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뼈저리게 체험했다. 어려서부터 보리가 섞인 밥이라 해도 배가 부르게 실컷 먹었고, 먹는 것 가지고 인색해 하시지 않은 부모님 덕에 배고픔이란 말은 그저 책에서나 보았던 내가 배고픔이 정말 무엇인지를 실감했던 거였다. 배가 고파봐야 배고픈 설움을 안다고 한 옛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배가 고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확실하게 알고 제대했다.
우리 집이 조금 살만했다 해도 완전 쌀밥은 먹지 않았지만 내가 어릴 때 할아버지 댁에 불려 가면 흰쌀밥만 주셨다. 작은집과 합치기 전에는 그래도 내 밥은 쌀이 많이 들어 있었고, 작은집과 같이 살 때는 쌀 반, 보리쌀 반 정도였었다.
동네에서 좀 산다고 하는 우리 집이 그 정도였으니 다른 집들은 겨울철에도 쌀보다 보리쌀이 훨씬 더 많이 섞인 밥을 먹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보다 더 문제였던 것은 그런 밥이라도 배불리 먹기가 어려웠다는 거다.
그 시절에는 보리쌀을 먼저 삶아 놓았다가 밥을 지을 때 솥 아래에 삶은 보리쌀을 깔고 그 위에 쌀을 놓고 다시 끓였다. 삶아 놓은 시커먼 보리쌀 위에 파리가 달려들었고 파리를 막기 위해 베 보자기로 덮어놓았던 보리쌀, 혹 무언가 먹을 것이 있나 하고 찾아보면 그 삶은 보리쌀만 눈에 띄었다.
보리는 그 당시 우리 오서산 아래서는 벼농사 다음으로 중요했고 많이 심었다. 보리는 쌀을 대신할 수 있는 중요한 곡식이었으나 넓은 땅에 많이 심는 것에 비해 수확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생장기간이 너무 길어 작물로는 바람직하지 않았지만 보리를 대신할 만한 것이 그때는 없었다. 10월 말에 심어 다음 해 6월에나 거둘 수 있었으니 겨울 양식이 떨어지고 보리 수확을 기다리는 20여일의 기간이 농촌에서는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요즘 애들에게 보릿고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전혀 모른다. 겨우내 가을걷이한 식량을 다 먹어 아무것도 없고, 여름 식량으로 쓸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굶으며 기다리는 보릿고개. 시인 황금찬 님은 그 보릿고개를 에베레스트산보다도 높다고 얘기했다. 5월 중순에서 6월 초까지 20일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으나 이때에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우리 시골에서 보리밥이라도 배부르게 먹게 된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이다. 농가 수입이 늘어난 덕이었겠지만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는다는 것이 그 당시에는 놀라운 일이었다. 하기야 우리 역사에서 농민들이 배불리 먹어 본 적이 어디 흔하겠는가?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좋아한 것도 잠시, 바로 쌀밥으로 이어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새마을운동이 한참 전개되더니 이젠 농촌에서도 보리밥이 아닌 쌀밥을 먹게 된 거다.
녹색혁명이라고 해서 통일벼가 나오고 벼 품종개량이 되면서 쌀 수확이 그전보다 2배 이상 늘면서 밥을 굶는 집이 없어지고, 다른 작물을 밭에 심어 보리농사보다 더 많은 소득을 올린 덕에 보리밥 대신 쌀밥을 먹게 되면서 시골서도 보리밥이 사라졌다.
그런 눈물의 세월이 있었는데 요즘은 보리밥이 별미라고 먹고 있으니 세상은 돌고 도는 모양이다. 난 어디 가서 절대 보리밥을 사먹고 싶지 않으나 사람들과 같이 다니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먹게 된다.
유명한 보리밥집이라고 해서 가보면 열무김치하고 비벼 먹는데도 있고 순두부하고 비비는 데도 있지만 그냥 맨밥에 반찬하고 먹는 집은 아직 보지 못했다. 보리밥이 깔깔해서 그냥 먹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거다. 정말 보리밥을 많이 먹고 자란 사람은 보리밥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보리밥을 먹으면서 무슨 향수를 느낀다고 하지만 그게 향수로 생각될 만큼이라면 정말 처절하게 고생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나도 농촌이 고향이고 가난한 동네에서 살았지만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보리밥은 어쩔 수 없이 먹었던, 정말 먹기가 싫었던 밥일 뿐이다. 차라리 국수나 수제비는 그런 대로 먹을 수 있지만 보리밥은 싫었다.
그래도 나는 보리밥을 많이 먹지 않고 자랐다. 사실 내 나이에 농촌에 살면서 보리밥을 많이 먹지 않았다면 웬만한 부농 수준은 된다는 얘기일 거다. 우리 성벌에서 나보다 보리밥을 덜 먹은 사람은 없다고 할 만큼은 되었던 것 같다. 그런 나도 보리밥에 대한 무슨 애틋한 그리움 같은 것은 전혀 없는데 하물며 오랜 시간을 보리밥을 먹으며 자란 사람에게 그게 무슨 그리움이 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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