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8. 16:59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우리나라 사람들의 주식은 단연 쌀이다. 그러나 북한주민의 주식은 강냉이라고 한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이라고 얘기할지도 모르지만 우리 민족의 주식이 어찌 강냉이가 될 수 있다는 얘기인지……. 그리고 강냉이라는 말도 내게는 좀 익숙하지 않다. 우리는 ‘옥수수’ 아니면 ‘옥수깽이’라고 불렀다. 옥수깽이가 어디서 나온 말인지는 모르지만 수수를 수수깽이라고 하지는 않았어도 옥수수는 옥수깽이, 단수수는 단수깽이라고 불렀다.
그 단수깽이가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어릴 때는 귀한 거였다. 아마 사탕수수에서 온 것이 아닌가 싶은데 시골 밭가에 심었다가 아이들 간식으로 주었다. 무슨 열매가 아니라 단수수 대를 씹으면 단물이 나와서 마디를 토막 내어 가지고 다니면서 씹었었다.
강원도는 옥수수를 밭 전체에 심어서 옥수수 밭이라는 말이 있지만 우리 고장에서는 밭 전체에 옥수수를 심는 집은 본 적이 없다. 대개 밭둑에 심어서 애들 간식으로 썼을 뿐이다. 너무 여문 것은 삶아도 단단하고 맛도 없어서 그런 것은 말려 두었다가 뻥 튀기 아저씨가 오면 튀겨서 먹기도 했다.
나는 옥수수 삶은 것도, 튀긴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때 옥수수는 지금의 것보다 맛이 없었다. 그게 토질의 차이인지 아니면 품종의 차이인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먹어 본 강원도 옥수수와는 질적으로 차이가 났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에 학교에서 옥수수 가루로 쑨 죽을 나누어 주었었다. 미국에서 원조해 준 옥수수 가루로 학교에서 죽을 끓여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점심 식사로 배식을 한 거였다. 한 학급에서 10여 명 정도씩 해당이 되었을 거다. 나는 불행히(?)도 거기에 끼지 못하였다. 그것을 타먹는 아이들 마음이 어떠했으랴마는 그 당시에는 생각도 못했고 옥수수죽이라는 것이 얼마나 맛이 좋을까가 내 관심의 전부였다.
내가 왜 그 당시 죽을 타먹는 아이들 마음을 얘기하느냐 하면 요즘 학교에서 급식을 할 때에, 가정형편이 아주 어려운 애들에게는 회사 측의 배려로 무료 급식을 해주어도 무료 급식을 먹는 아이들 자존심이 상할까봐 몹시 조심스러워 하기 때문이다. 무료가 부담스러우면 학급마다 한 명씩으로 정해진 급식 도우미를 하라고 권해도 그것이 창피하다고 하지 않는 애가 있다고 들었다. 내 생각으론 도우미를 하는 것이 오히려 더 떳떳할 것 같은데 그게 뭐가 자존심 상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장곡초등학교 양호실인지 숙직실인지에서 커다란 가마솥에다 이 죽을 끓일 때, 그 냄새가 어찌나 구수하던지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오면 이 냄새 때문에 수업을 받지 못할 정도였다. 냄새가 저렇게 구수하니 그 맛은 얼마나 좋을까가 내 최고의 관심사였다. 그럼에도 그 맛있을 것 같은 옥수수죽을 나는 먹을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 도시락을 싸 가지고 오는 아이들도 거의 가 다 보리쌀 투성이의 밥이었으나 나는 그래도 쌀이 제법 많이 들어 있었다. 다른 집에 가서 밥 먹는 것을 보지 않았으니 누구 집이나 다 나와 비슷한 줄 알았지만 내 도시락의 밥이 다른 아이들 밥보다 쌀이 더 많이 들어 있던 것은 분명하다.
일제 때 나온 알루미늄 도시락(벤또?)은 누구네 집이나 다 같은 거였고 그 퇴색한 알루미늄 도시락과 시커먼 보리밥은 먹기 위해 먹을 뿐이지 무슨 맛이 있었으랴. 그러한 실정이었으니 나는 솔직히 누구와 죽하고 바꾸라면 얼른 바꿔먹고 싶었다. 그러나 집에서나 큰 소리쳤지 밖에 나가면 숫기가 없던 터라 그 얘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한 번 먹어보고 싶어서 몸이 달았던 어느 날 한 학년 아래 중호가 그것을 타 가지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얼른 쫓아가 한 숟가락만 먹어보자고 했더니 도시락 째로 내주며 먹고 싶으면 먹으라고 했다. 그래 이게 웬 떡이냐 하며 한 숟가락 푹 떠서 입에 넣었더니……. 그 허망함, 냄새만 구수했지 아무 맛도 아니었다. 옥수수 가루의 그 꺼끌함만 혀끝에 남고는 뱉고 싶을 만큼 아무 맛도 없었다.
옥수수 가루에 아무것도 넣지 않고 물만 부어 끓인 것이니 무슨 맛이 있으랴! 게다가 소금도 안 넣었는지 정말 무슨 맛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 날 이후로 옥수수죽에 대한 환상은 완전하게 깨졌다. 나중에 들으니 죽 속에 벌레도 가끔 들어 있었다고 한다. 요즘 같으면 그런 얘기에 난리를 떨겠지만 그 때는 60년대 중반이었다.
미국에서 남아도는 옥수수를 한국의 빈민들 주라고 보낸 거였다. 동물들 사료로나 쓸 것이었을 텐데 어디 한국 사람들의 위생을 생각할 겨를이 있었겠는가. 그거라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던 것을……. 북한 주민에게 강냉이를 배급하면서 옥수수 줄기까지 섞어준다는 보도를 볼 때마다 40여 년 전 그 옥수수죽을 떠올린다.
우리가 오서분교로 왔을 당시에도 이 옥수수죽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오서분교에는 그런 것을 끓일만한 시설도 없었지만 곧 숙직실이 만들어졌고 거기서 끓였다. 옥수수죽과 함께 기억나는 것이 옥수수빵이다.
죽을 각 학교마다 끓이자니 그게 보통 일이 아니었던지 그 옥수수 가루로 빵을 만들어서 학교로 보내 왔다. 그런데 빵이다 보니 애들이 다 먹고 싶어 하니까 가난한 집 아이들만 주지 못하고 학급 아이들 전부에게 간식 비슷하게 나누어줬다.
종례 시간에 당번이 가서 아이들 수만큼 받아다가 애들에게 준 빵은 크기가 어른 주먹만 하고 모양은 직육면체의 형태였다. 요즘 먹는 옥수수 식빵이 아니라 거죽만 벗겨먹으면 그 속은 찐득찐득한 밀가루 같았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먹었지만 맛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교무실에 가면 선생님들은 그 빵을 난로 위에 구워서 껍질을 만들어 드셨다. 그러나 집에는 그렇게 만들어 먹을 방법이 없어 거죽만 벗겨 먹고는 버리는 애들도 있었다. 그 당시에 빵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 방부제를 넣었다고 하였으니 아마 이것들도 그랬지 않나 싶다. 이 옥수수빵은 겨울에서 봄까지만 나오고 여름 가까이 되자 건빵이 나왔다.
이 건빵은 옥수수가 아니라 밀가루였다. 크기는 아이들 손바닥만큼 넓적하고 두께는 5밀리미터쯤 되었다. 그러나 맛은 가끔 얻어먹은 군용 건빵보다 훨씬 못했다. 그냥 밀가루를 쪄서 말린 것 같았다. 찐빵 형식으로 나오면 쉴까봐 건빵 형식으로 만들었던 모양이다. 이 건빵은 여름철에는 보관상의 문제였는지 곰팡이가 생겨서 아이들에게 못 주고 상자 째로 버려지는 것을 보기도 했다.
나는 반장을 해서이기도 했지만 학교 교무실을 우리 집 드나들 듯 해서 옥수수빵과 건빵을 다른 애들보다는 훨씬 많이 먹을 수 있었다. 심부름을 하면 선생님들이 그냥 주셨다. 그러나 내가 그런 간식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단 것을 좋아하는데 그것들은 단맛이 하나도 없고 아무 맛도 없어 그저 있으니까 먹었을 뿐이다.
얼마 전에 옛날이야기를 하다가 들으니 서울 아이들도 학교에서 빵을 먹었다고 해서 놀랐다. 우리가 먹던 그 빵을 서울 학교에서도 주었다는 거다. 그러면서 그 이야기를 전하는 친구 말을 들으니 돈을 내고 먹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런 빵을 돈을 주고 먹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지만 학교에 따라 사정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요즘엔 아침을 빵으로 먹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지만 나는 아직까지 빵은 간식일 뿐이지 주식은 아니라고 믿고 있다.
'시우 수필집 > 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밤의 단골손님 (0) | 2012.02.28 |
---|---|
새는 (0) | 2012.02.28 |
감꽃도 먹고, 땡감도 먹었다 (0) | 2012.02.28 |
보리밥이 별미(別味)라구? (0) | 2012.02.28 |
쌀 감자와 보리 감자 (0) | 2012.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