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8. 17:02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오서산은 그 산의 높이에 비해 계곡이 짧다. 산이 홑 산으로 우뚝 솟다보니 이렇다 할 계곡을 만들지 못한 거다. 계곡이 길고 많아야 뭔가 그럴듯한 전설도 많을 것인데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내세울 만한 골짜기가 하나도 없다. 나는 가끔 청양 칠갑산을 지날 때마다 거기 골짜기 많음을 부러워하곤 한다. 칠갑산은 아흔 아홉 골짜기라지만 우리 오서산은 겨우 서너 골짜기이고 그것도 우리 동네서 바라보면 하나밖에 없는 셈이다. 내원사 골짜기만 그런 대로 하나의 계곡이라고 할 수 있을 뿐 다른 곳은 얘기할 거리가 못된다.
광천(廣川)은 ‘넓은 내’라는 뜻이지만 크게 넓지도 않은 오서산 아래서 내려오는 물과 정암사 근처에서 내려오는 담산리 한내울이 합쳐진 것에 불과하니 그 이름이 무색할 뿐이다. 발원지는 달라도 결국 오서산에서 내려오는 그 두 물이 소용골 앞에서 합류가 되어 광천으로 흘러가고, 합쳐졌다 해도 그렇게 큰 내{川}는 아니다.
사실 나는 지금도 그 작은 내{川}가 어떻게 광천(廣川)이란 큰 이름을 얻었는지 의문이다. 내가 모르는 다른 큰 내{川}가 예전에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현재의 광천에 흐르는 내{川}는 오서산에서 내려오는 물과 상정리 앞으로 흘러내리는 상지천 뿐인데…….
오서산에서 내려오는 내{川}는 광성리에서 둘, 신풍리에서 하나, 오성리에서 하나 정도가 좀 큰 편이고 다른 조그만 것들은 얘깃거리도 안 될 정도이다. 신풍리에서 내려오는 것은 신동리 저수지로 가고, 광성리의 둘과 오성리의 하나가 죽전리 저수지에서 합류된다. 예전에 저수지가 없을 때는 죽전리에서 합류되어 제법 큰 내를 이루기도 했지만 이것이 죽전리 아래에서 줄어들어 오히려 광천 앞에 가면 작은 내{川}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게다가 오서산 시발지로부터 계산해도 가장 긴 내{川}의 길이가 불과 20킬로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이 작은 내들이 오천으로 나가는 긴 갯고랑을 형성한 것이 의문이다. 추측이긴 하지만 이 갯고랑을 통해서 아주 오랜 옛날에 백제군이 오서산 아래로 들어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川}가 짧은 탓이어서 꼭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오서산에서 내려오는 가장 큰 내{川}인 우리 동네 냇가에는 고기의 종류가 많지 않다. 사실 이것은 어려서부터의 내 큰 불만이지만…….
다른 지역에 가면 냇가에 메기도 많고 가물치도 있고, 내가 들어보지도 못한 물고기들이 그리 많건만, 우리 동네 냇가엔 제일 흔한 것이 중고기라 부르는 버들치, 그리고 송사리, 미꾸라지, 가재가 전부였다. 게다가 예전에 죽전리 저수지가 없을 때 성벌 냇가에서는 그 흔한 붕어조차도 볼 수 없었다. 가끔 색다르게 본다는 것이 타지에서 온 어른들이 냇가에 싸이나(청산가리)를 풀어 고기 잡을 때 보는, 큰 보(堡) 속에 숨어있는 뱀장어였다.
물고기가 없는 것이 물이 차가워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너무 맑아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저수지를 끼고 있는 신풍리 냇가에는 가물치, 구구리, 치리 등이 많았고, 예당저수지와 연결된 산 넘어 무한천에는 메기 등도 많다고 들어 나는 늘 아쉬움에 입맛만 다셨다.
철이 들어 들으니 가재나 다슬기는 맑은 물에서만 산다고 한다. 그러니까 가재가 많다는 얘기는 우리 냇가 물이 맑다는 얘기인 거다. 그 가재는 맛은 별로 없어도 초봄에 잊지 않고 찾아오는 단골손님이었다. 성벌 냇가뿐이 아니라 오서산 아래의 작은 도랑이라도 낮에 개울에 가서 조금 큰 돌을 들어내면 보이는 것이 가재였다.
가재는 큰 놈은 보기에 좀 징그럽지만 그 크기가 누에고치만큼 자란 것들은 보기도 좋고 먹기도 좋다. 큰놈들에게 집게발로 물리면 무척 아파 내동댕이쳐야 하지만 요 덜 자란 것들은 집게발로 물어도 견딜만했다. 그러니 심심할 때 냇가에 나가 쪼그리고 앉아 이것들을 잡으며 노는 것도 재미가 있었다.
조금 철나서 들으니 가재가 폐디스토마 숙주라고……. 가재를 먹으면 디스토마에 걸린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상식은 세상 물정에 어두운 시골 사람도 알고 있었다. 우리 동네서는 식목일이 지나면 가재를 먹지 않았으니까 추울 때는 디스토마 균이 가재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얘기다.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우리 어릴 때는 가재 알을 날로 먹었다. 큰 암놈 가재를 잡아보면 뒷부분에 알을 가득 싣고 있었다. 이것을 혀로 후루룩 긁어 씹으면 알싸한 비린내와 함께 고소한 맛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지극히 위험한(?) 일이지만 그때는 재미있는 놀이였다. 그 알이 부화가 되면 개미만한 새끼들을 그 알집 속에 품고 다니는 가재를 볼 수 있었다.
뭐니뭐니해도 가재는 봄밤에 잡는 것이 제 맛이었다. 저녁을 일찍 먹고 큰 깡통에 석유를 반쯤 채우고, 못 쓰는 솜이나 떨어진 헌옷으로 주먹만한 뭉치를 만들어 철사로 얼기설기 엮는다. 이것을 굵은 철사나 막대기 끝에 매달고 석유 깡통에 넣었다가 꺼내어 불을 붙이면 솜방망이 횃불이 된다. 이런 것을 두어 개 만들고, 가재 담을 양동이와 톱 한 자루만 들면 준비 끝이다. 냇가로 가서 불을 켜들고 보면 가재들이 대부분 돌 속에서 나와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냥 주워서 담기만 하면 된다. 가끔 보이는 미꾸라지나 중고기는 톱 등으로 살짝 치면 그대로 기절한다. 그저 담으면 끝이다.
이렇게 한 시간만 잡으면 대여섯 명이 먹을 만큼으로 충분했다. 물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반 양동이 가까이는 되니까, 집으로 오면서 길가 밭의 쪽파 서너 포기만 뽑아서 들고 오면 더 필요한 것도 없다. 중고기는 붕어와 달라서 배를 따지 않고 그냥 먹기 때문에 사랑(?) 받았다. 고추장 풀고 파 넣어서 끓이면 말 그대로 훌륭한 가재 매운탕이 된다.
가재는 흑갈색을 띠고 있으나 이것을 불에 익히면 붉은 색으로 변해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여기에 밥을 같이 먹기도 하지만 막걸리가 빠지면 무슨 흥이 있으랴. 다섯이 앉으면 막걸리 반 말쯤은 가볍게 치울 수 있었다.
어렸는데도 왜 그런 일들을 그리 좋아하였는지……. 해마다 연례행사로 가재를 잡았고, 아무리 밤이 늦어도 가재를 잡은 날은 그냥 잘 생각을 안 했다. 꼭 밤에 끓여먹어야 제 맛이 나는 거였다. 사실 가재가 무슨 특별한 맛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 봄밤의 정서와 저녁 늦게 밤참을 먹는 재미였는지도 모른다.
누가 바다가재를 학교에 가져다가 팔기에 두어 마리 사다가 집에서 요리를 해보았지만 맛은 별로였다. 다만 우리 가재와 어찌 그리 닮았는지 그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신경숙이란 소설가가 호주에 가서 바다가재를 회로 맛있게 먹은 얘기를 쓴 것을 보고 군침을 삼켰지만 그것도 막상 먹어보면 별 것 아닐 것 같다.
‘신포도’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음식도 처음 한 점만 맛을 알 뿐이지 두 번째 부터는 다 똑 같다고 생각한다. 내게 어릴 때 추억을 얘기하라면 봄밤에 잡던 가재와 그 시원한 국물 맛을 꼭 말하고 싶다.
지금은 우리 마을 아래에 큰 저수지가 생겨서 내{川}가 더욱 짧아졌다. 그리고 냇물도 줄어 완연히 예전 내와는 달라졌다. 그 가재들, 내가 잡지 않아 더욱 늘었을 텐데 요즘은 가재 잡는 아이들도 없을 거다.
여러 해 전에 강화도에 가서 아이들에게 가재를 잡아 준 적이 있다. 물이 마른 냇가 돌 속에 가재가 들어있는 것에 애들이 그렇게 신기해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즈덜만할 때는 잡아서 매운탕을 끓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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