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에 들어가지는 못했어도

2012. 2. 28. 17:04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보리밭은 콩밭과는 달랐다. 지난 가을에 심어 겨울에도 푸릇푸릇 언 땅위에 자라고 있던 보리는 봄이 되면 더욱 생기를 띄고 무성하게 자라기 시작한다. 봄이 지나고 초여름이 되어 겨울 양식이 떨어져 갈 무렵에 농촌 사람들이 가장 바랐던 것은 보리가 빨리 익어 수확할 수 있게 되는 거였다. 아니 절실하게 보리 익기를 기다렸으니 이때가 보릿고개였다. 굶어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보리, 보리는 콩보다 훨씬 소중한 농사였다.

 

보리밭은 우선 어감에서 콩밭보다 훨씬 더 낭만적이다. 무슨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는…….' 노래 가사 때문이 아니라 그 넓은 들에 푸르게 자라던 보리가 주는 인상이 낭만적이란 얘기다. 비록 지금의 논들처럼 경지 정리가 된 밭은 아니라 하더라도 연이어 밭에 보리를 심었기 때문에 늦봄에서 초여름까지는 넘실거리는 보리가 보기에도 좋았다. 그러나 지금은 오서산 아래에서 보리밭 보기가 어렵다. 보리농사를 지어봤자 별 소득이 없으니까 소득이 많은 다른 작물로 바뀌면서 보리밭은 구경하기 어렵게 되었다.

 

보리농사는 다른 것처럼 손이 많이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을에 심어 여름에 걷어 들이니 그 기간이 너무 길었다. 게다가 그때는 쌀에 비하면 보리쌀이 너무 싸서 여름철에 보리밥을 먹는 사람들은 쌀밥을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털이 짧고 통통한 강아지는 "쌀 강아지", 털이 길고 볼품없는 강아지는 "보리 강아지"였다. 지금에 와서는 보리음식을 많이 찾고 그 가격도 실제로 쌀보다 더 비싸다고 하니 정말 격세지감(隔世之感)이지만…….

 

하지만 보리밭은 소중한 거였다. 겨울에 눈이 많이 와야 봄 농사가 잘 된다고 하는 얘기는 보리밭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겨울에 눈이 많이 와서 보리밭을 덮고 있어야만 봄에 보리가 더 잘 자랄 수 있었다. 가을에 심어 눈 속의 겨울을 이겨내는 작물이 보리밖에 더 있던가?

 

가을에 심는 마늘은 겨우내 두엄으로 덮어두지만 보리는 이미 싹이 나서 맨 몸으로 겨울을 이겨내니 그만큼 생명력이 강했다. 봄이 되어 서릿발이 돋으면 뿌리가 뜬다고 밟아는 줄망정 보리에게 보온은 필요 없었다. 그렇게 강인하니 봄이 지나면 초록 융단이 될 수밖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나가던 어떤 재벌그룹 회장이 유엔군 묘지에 보리를 심고, 잔디라고 둘러대서 미군으로부터 많은 돈을 받아냈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것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닐 거다. 겨울철 묘지에 잔디를 심어달라는 그 요구도 우리나라 사정을 모르는 얘기였지만, 거기에 보리를 심어 보여줬다는 것도 얼마나 재치 있는 일인가?

 

보리밭이 융단이 된다는 말은 조금 어폐가 있지만, 아직 이삭이 패기 전 40-50센티미터쯤 자란 보리밭은 젊은 남녀가 뛰놀기에 더없이 좋은, 융단보다 더 실감나는 자리였다. 사실 이런 말 하기는 좀 낯이 뜨겁지만 뛰놀기보다는 뒹구는 자리였다고 하는 것이 더 나은 표현일지도 모른다. 4월 하순에서 5월 초순 사이의 보리밭은 바람 든 청춘남녀에게 최고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나는 정말로 보리밭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나만 안 들어간 것이 아니라 내 또래는 보리밭에 가서 놀았던 사람이 드물 거다. 우리가 그런 짓을 할 만큼 자랐을 때는 이미 오서산 아래서도 보리밭이 거의 사라졌고 나이 들어가는 여자애들도 다 서울로 가고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 어릴 때는 맷방석만큼씩 짓이겨진 보리밭을 여러 군데서 봤다. 장곡으로 학교 가다가도 보았고, 옻밭들에서도 봤으며, 홈다리에서도 봤다.

 

대부분 길가의 보리밭은 그런 흔적이 없지만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보리밭에는 놀다간 자리가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길가에서 조금 들어간 자리에 있다고 해도 낮에 보면 다 표가 나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꼭 가보고 싶어 했다. 그 짓이겨진 자리는 누군가 청춘남녀가 사랑을 나눈 자리라는 것을 초등학생이라고 모를 것인가? 우린 그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현장의 주인공이 누구일까 추리하느라 골몰했었다.

 

우리가 추리를 하지 않아도 금방 이름이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아무 소문을 내지 않고 감쪽같이 즐긴(?)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멍청한 팀은 은복이네 가게에 와서 보리밭에 간다고 자랑삼아 얘기하며 음료수를 사가기도 했다고 들었다. 우리 그때 나이 10-15세쯤이었고, 그 주인공들은 17-20세쯤이 대부분이었으니 대충 짐작이야 왜 안 가겠는가?

 

어쩌면 우리 같은 꼬맹이들도 나중에 보리밭에 갈 상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야 누가 가르쳐서 아는 것이 아니지 않던가? 지금 그 얘기하면 배꼽을 잡고 웃겠지만 다 올챙이를 거쳐서 개구리가 되는 거다. 뜨거운 청춘들이 사랑을 나누느라 짓이겨진 보리밭은 그 수확이 한참 줄 수밖에…….

 

그래도 밭주인은 그 주인공들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설령 안다고 해도 물증이 확실치 않은데 뭐라 얘기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주인들도 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처지도 아니었을 거다.

 

시골서 자랐다면 누구나 추억이 있음직한 보리밭……. 봄에 가끔 보리밭이 많은 서산 쪽으로 사진을 찍으러 나가면 혹 보리밭에 짓이겨진 곳이 있나하고 유심히 살펴보지만 그런 곳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하기야 지금 누가 그 껄끄러운 보리밭으로 가겠는가? 도시고 시골이고 생겨나는 것이 러브호텔뿐이라는데, 보리밭으로 가자고 하다가는 단번에 차이겠지…….

 

보리가 밭에서 자랄 때는 그렇게 낭만적이지만 보리를 베는 일은 벼를 베는 일보다 몇 배 더 힘들었다. 벼는 다 익어도 엎치는 일이 드물지만 보리는 거의가 엎치고 터럭이 많아 키가 작은 사람들은 얼굴에 상처를 입기 일쑤였다. 보리 거둘 때가 장마철이라 자칫하면 썩거나 낟알에서 싹이 나왔다. 보리바심을 하고 나면 온 집안에 보리티끌과 먼지가 쌓이나 이것들은 불심{火力}도 없어 그냥 밖에서 태울 수밖에 없었다. 큰돈도 안 되는 것이 거두기는 무척 힘들었다.

 

내가 나이가 들어 어느 문학지에서 읽은 것으로, ‘보리밭이란 노래의 가사가 잘못 전달되고 있다는 얘기를 보았다. 탤런트 여운계 님이 쓰신 글인데, 그 노래 가사 끝 부분의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에서 빈 하늘뷘 하늘의 잘못된 표기라고 지적을 하셨다. 원 시의 의미는 노을이 꽉 찼다는 것으로 쓴 말이나 노래를 부르며 빈 하늘이 되었다는 지적이었다.

 

글자 하나를 잘못 적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으로 되니 그 지적이 맞을 거다. 그렇지만 보리밭은 저녁때보다 아침 이슬에 젖어 있는 모습이 훨씬 싱그럽고 풋풋하여, 저녁 때 보는 것보다 아침나절에 보는 것이 훨씬 생동감이 있다.

 

나는 정말 보리밭에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내게 다시 고향에 내려가 살 기회가 주어진다면 소득이 적더라도 보리밭을 만들고 싶다. 누렇게 익은 보리들이 바람에 출렁거리는 것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지금 오서산 아래에는 보리를 심지 않지만 전라도 완도와 경상도 하동 등은 많이 심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이 큰 돈벌이는 안 된다 하더라도 보리밭을 생각하면 무척 낭만적인 장면들이 떠오른다.

 

보리를 심어 뜨거운 청춘이 그들의 사랑을 나누는 추억의 장이 될 수 있도록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면 내가 너무 낭만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