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8. 17:09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요즘 외곽으로 나가다 보면 길가에 칡즙을 파는 아저씨들이 있다. 어디서 캔 것인지 보기 좋게 크고 매끈한 칡뿌리를 여남은씩 진열해 놓고 그것으로 짠 칡즙을 컵으로 판다. 나는 그런 곳을 만나면 자주 사서 마신다. 무슨 특별한 맛이 있다기보다는 추억이 그리워서이다. 그런데 요즘 그런 칡뿌리조차 중국산이 많다고 해서 먹기가 찜찜해졌다. 예전에 내가 먹은 것은 누가 뭐래도 100% 국산이라 아무 거리낌이 없었고, 또 직접 우리가 캔 것이라 의심할 것도 없었다.
우리 어릴 때는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될 정월 보름이 지나면 칡뿌리 캐러 다니는 시기였다. 그것이 언제부터 그렇게 인식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거의 성년이 되어 갈 때까지 나도 칡뿌리를 캐러 다녔다. 그것은 우리에게 연례행사로 인식되어 있었다.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는 먹을 것이 없어 이 칡뿌리를 캐 말려서 가루로 만들어 양식으로 썼다고 한다.
그 얘기가 우리 오서산 아래에도 해당되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런 얘기가 책에 있었다. 옛날이야기 중에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것이 바로 이 칡뿌리가루와 산나물을 많이 먹어 항문이 약해진 이유 때문이라는 거다. 하지만 우리가 어릴 때에는 오서산 아래서 칡으로 무엇을 만들어 먹는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고 그저 아이들이 캐다가 간식으로 먹었을 뿐이다.
칡뿌리를 캐어 먹는 것은 비단 오서산 아래에만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지금도 봄철에 시골 장을 지나다보면 그것을 도막으로 파는 할머니들을 자주 볼 수 있고, 내가 군에 가 있을 때도 부대에서 칡뿌리를 캐어 나르는 것을 본 적도 있다. 화천에서 이등병으로 군무할 때 부대 주임상사님이 칡뿌리를 캐다가 칡차로 만드는 것을 보았고, 원주 치악산 아래 하사관 학교에 갔을 때 거기서도 많은 생도들이 칡뿌리를 캐어먹는 것을 보았다. 물론 내가 가장 앞장을 서 캤지만…….
그런데 지역에 따라서는 칡을 캔다고도 하고, 칡뿌리를 캔다고도 하여 어느 것이 바른 말인지 모르겠다. 분명 캐어내는 것은 칡뿌리지만 칡을 캐면 뿌리가 나오니 혼란스럽다.
난 성벌에 학교가 생기기 전에는 주로 성벌 애들과 캐러 갔고, 학교가 생긴 이후엔 광제 애들과 캐러 갔다. 그때 광제엔 우리 반 친구들이 많았고, 특히 광석이는 내가 칡뿌리를 캐러 간다고 하면 광제로 가자고 해서 내 몫의 칡을 많이 캐줬기 때문에 굳이 동네 애들과 같이 갈 이유가 없었다. 어디로 가나 마찬가지지만 난 사실 삽질이나 괭이질에 서툴러서 주로 구경만 하다가 다른 아이들이 캔 것을 얻어오는 것이 일이었다.
우리 어린 시절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산에 다녔다. 물론 여러 살 위인 형들을 따라서 갔다. 봄에 아이들끼리 진달래꽃을 꺾으러 산에 간다고 하면 용천배기가 아이들의 간을 빼어 먹는다고 가지 못하게 하였다. 용천배기란 문둥병 환자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용천배기를 본 적은 없다. 또 산에 가서 죽었거나 행방불명된 아이도 없었다.
우리가 말하는 산은 빈정골이나 앙산, 용배 등이 아니라 적어도 공덕재를 넘어가는 오서산을 말한다. 마을에서 가까운 야산은 칡뿌리도 없었고 있다 해도 주인이 있는 산은 산을 파면 피해가 온다고 캐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니 칡뿌리를 캐려면 주인이 없는 산을 찾아야 해서 공덕재를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거다.
칡뿌리를 캐러 가는 날은 아침을 일찍 먹고 나무하러 가는 아저씨들을 따라 빙애길로 해서 공덕재까지 갔다. 그때는 연탄을 때는 집이 아주 드물었고 대부분 산에서 나무를 하여 그것으로 밥을 짓고 난방을 하던 시절이었다. 야산은 산 주인이 있으니 임자가 있는 산에서는 나무를 할 수가 없어 주인이 없는 큰 산으로 다녀야 했던 거다. 내가 알기론 홍동이나 홍성에서까지 오서산으로 나무하러 다녔다. 그리고 우리 마을 어른들도 대부분 공덕재를 넘어가서 나무를 했었다.
해마다 나무가 줄어들어 더 먼 곳으로 가다보니 나중에는 거기서도 한참을 더 가야 했지만 공덕재까지만 해도 한 시간이 훨씬 넘는 거리였다. 그러니까 칡뿌리를 캐러 가는 일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닌 셈이다. 며칠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어른들께 허락을 얻어서 가야했다. 칡뿌리를 캐는 데는 삽과 괭이, 낫도 필요해서 혼자서 캐는 것이 아니라 보통 두세 명이 팀을 짜서 같이 캐고, 다 캔 뒤에 공평하게 나누어 가졌다. 많이 캔 팀들이 적게 캔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고…….
성벌 아이들은 그렇게 멀리 가서 칡뿌리를 캐는데 광제 애들은 그들의 집 뒤라 할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곳으로 갔다. 마을에서 5분, 10분이면 족히 갈 수 있는 데였다. 물론 광제는 산자락 밑에 있으므로 산이 훨씬 가까운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마을 아이들이 그런 곳으로 간다면 15-20분 거리였다.
내 기억으론 오서산 아래에서 칡뿌리 캐는 것도 광제 애들과 성벌 애들이 차이가 많이 났다. 이 두 곳 외에 다른 마을 아이들은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성벌과 광제에서 아이들이 칡뿌리 캐는 것을 내가 직접 같이 했기 때문에 그 차이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우리 마을 아이들은 무조건 큰 것을 캐려고 칡이 굵은 것만 찾아다녔다. 적어도 어른 손가락 굵기나 엄지 굵기는 되어야 했는데 이런 정도라면 그 뿌리는 어른 발목이나 허벅지만큼 굵었다. 이런 것들은 크기는 했지만 묵은 칡뿌리라 쓴맛만 강하지 칡뿌리 특유의 고소한 맛이 없었다. 지금 생각한다면 칡즙이나 만들면 좋은 것들일 텐데 우리는 그 씁쓸한 것을 씹으며 만족했었다.
그런데 광제 애들은 이렇게 묵은 칡은 절대 캐지 않았다. 내가 보면 눈에 안 차는 가느다란 칡을 골라 어린애 팔뚝만한 칡뿌리를 캘 뿐이었다. 그러나 씹는 맛은 이것이 훨씬 좋았다. 한 입 가득 넣고 씹을수록 고소하고 나중에 남는 것도 거의 없었다. 그러니 양보다는 질을 더 쳤던 셈이다.
하나 더 차이점을 지적하면 우리 마을 아이들은 캐다가 갈라진 가지가 나오면 그것은 무시하고 본줄기만 캤는데 광제 애들은 언제나 본줄기는 놔두고 곁줄기부터 캤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본줄기를 쉽게 캐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성벌 아이들은 본 뿌리 하나만 캐는데 비해 광제 애들은 뿌리 전체를 다 캐어내는 거였다. 이것은 가까운 마을 사이라 해도 문화의 차이가 있다는 것 아닌가? 불과 500여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한 산골짜기 아래 마을에 이런 차이가 있다는 것이 내게는 늘 신기한 일이었다.
칡뿌리를 캐러 갈 때는 영주 형하고도 많이 다녔지만 정호하고 가장 많이 갔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광제로 칡뿌리를 캐러 다니기가 좀 쑥스러워서 마음 편한 정호하고 같이 다녔다. 정호는 삽이나 괭이 다루는 일에 아주 능숙하여 누구보다도 좋은 것을 많이 캘 수가 있었다.
어쩌다 시골 장터를 지나다보면 칡즙이 아닌 칡뿌리를 도막으로 파는 할머니들이 보였다. 사서 씹고 싶지만, 이제 마흔이 넘은 나이에 아무리 추억이 어린 것들이라 해도 선뜻 손이 가질 않는다. 내가 그만큼 변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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