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8. 17:11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어릴 때 옛날이야기를 무척 좋아하였다.
그러니까 대여섯 살 먹은 때부터 옛날이야기를 들었지만 할아버지나 할머니에게 들은 기억은 거의 없다. 할아버지는 나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처럼 귀여워 하셨으나 나는 할아버지를 어려워했다. 항상 나를 앞세우고 다니기를 좋아하셨는데도 할아버지께 옛날이야기를 들은 기억은 전혀 없다. 내가 얘기를 좋아해서 두어 번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말을 꺼냈지만 할아버지는 옛날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해진다고 말씀을 하셨다. 그러니 할머니에게도 더 이상 조를 수가 없었던 거다.
내게 옛날이야기를 가장 많이 해 주신 분은 정혁이 외할머니다. 정혁이 외할머니가 정혁이네 집에 오시면 심심하다고 우리 집에 놀러 오신 적이 많았다. 그 때 우리 집에는 동네 할머니들이나 아주머니들이 많이 오셔서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셨는데 그런 분위기 때문에 그 할머니도 우리 집에 오셨을 거였다.
동네 분들 중에서는 내게 얘기를 해주신 분이 별로 없었고 혜정이 할머니가 몇 가지를 들려 주셨지만 지금은 기억이 안 나는 것들이다. 어떤 얘기들은 중복되는 것도 있었으나 그래도 좋았다. 정혁이 할머니가 해주신 것 중에 충청도 박 포수 얘기는 지금도 기억이 난다.
〈강원도 금강산에 아주 무서운 호랑이가 살았는데 그 호랑이를 잡기 위해 전국의 유명한 포수들이 다 금강산으로 몰려들었으나 모두 호랑이에게 잡아 먹혔고, 충청도의 유명한 박 포수가 그 호랑이를 잡으러 떠난다. 박 포수가 떠날 때, 부인이 임신 중이었는데 낳은 애가 아들이면 자기가 금강산으로 호랑이를 잡으러 갔다고 전해 달라며 작은 칼을 하나 주었다. 포수는 간 지 10년이 넘어도 소식이 없고, 아이는 아들로 나서 열 살이 넘도록 자랐는데 동네 애들이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놀렸다. 아이가 엄마에게 울면서 왜 아버지가 없느냐고 하소연하자 엄마는 아들에게 칼을 전해주면서 아버지는 10년 전에 금강산으로 호랑이 잡으러 떠난 아주 유명한 포수였다고 말해 준다. 아들은 그날부터 열심히 사냥 훈련을 하여 얼마 가지 않아 전국에서 유명한 포수가 된다. 포수로서 이름을 날린 아들은 자기도 금강산으로 아버지 원수를 갚으러 호랑이 사냥을 가겠다고 한다. 그러자 어머니는 여러 해 동안 지어 만든 사냥 옷을 주면서 아주 위급할 때에 옷을 찢으라고 말하면서 보내준다. 금강산에 가서 사냥을 시작한 아들은 많은 호랑이를 잡았지만 아버지를 잡아먹은 호랑이는 찾지 못한다. 그래서 그 호랑이를 찾아 점점 깊이 들어갔더니 어느 동굴 앞에 사람의 뼈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그 호랑이인 줄 알고 굴로 뛰어 들어갔는데 호랑이가 어찌나 크던지 총을 아무리 쏘아대도 죽지 않고 아들을 한 입에 삼켜 버렸다. 호랑이 뱃속에서 정신을 차린 아들은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나서 옷을 찢었더니 그 옷 속에 총알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래서 호랑이 뱃속에서 그 총알을 장전하여 마구 쐈더니 호랑이가 날뛰다가 죽어버렸다. 아들은 아버지가 전해 준 칼로 호랑이 배를 가르고 나와 호랑이 가죽을 벗기고 호랑이가 잡아먹은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얘기 말고도 아주 여럿을 들었는데 지금은 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정혁이 외할머니는 오실 때마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시어 정혁이네 애들보다 내가 더 할머니를 기다렸었을 거다. 내가 얘기를 너무 좋아하니까 정호 아버지가 해주신 것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옛날에 이야기를 너무 좋아하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얘기를 들으면 그 이야기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주머니에 넣고 끈으로 묶어 놓았다. 아이는 점점 자라서 장가갈 때가 되었는데 장가가기 전날 그 집 머슴이 사랑채 부엌에서 여물을 데우며 졸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야기 주머니 속에서 도란도란 이야기가 들려 왔다. 깜짝 놀라 자세히 들으니, 주머니 속의 이야기들이 주인집 아들이 자기들을 가둬 놓고 풀어주지 않은 것에 앙심을 품고 해코지를 하려는 거였다. 첫 번째 얘기가 말하기를, 나는 산길 가에 산딸기로 둔갑해 있다가 신랑이 그 딸기를 먹으면 죽게 만들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두 번째 얘기가 만약에 첫째가 실패를 하면 자기는 길가의 옹달샘이 되어 있다가 신랑이 그 물을 마시면 죽게 하겠다고 했다. 세 번째 얘기는 둘 다 실패할 경우 자기는 뱀이 되어 신방에 숨어 있다가 신랑이 들어오면 물어 죽이겠다고 하는 거였다. 머슴은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는 다음 날 신랑이 신부 집으로 장가를 가는데 자기도 따라가겠다고 우겼다. 신랑은 그 머슴이 마음에 안 들어 같이 가고 싶지 않았으나 아버지가 그러라고 하여 할 수 없이 같이 길을 떠났다. 머슴이 나귀의 고삐를 잡고 길을 가다보니 길가에 예쁜 산딸기가 빨갛게 익은 것이 아주 먹음직스러웠다. 이를 보고 신랑이 머슴에게 산딸기를 따오라고 하자 머슴이 전부 발로 짓밟아 먹을 수 없게 만들었다. 신랑은 무척 화가 났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길을 오래 가다보니 목이 말라 힘들었는데 마침 길가에 옹달샘이 하나 있어, 물을 마실 수가 있었다. 옹달샘을 보고 신랑이 물을 마시려하자, 머슴이 갑자기 돌을 샘에 던져 흙탕물로 만들어 그 물은 마실 수가 없게 되었다. 신랑은 속으로 이를 갈며 돌아가서 보자고 혼자서 다짐을 했다. 식이 잘 진행되고 신랑은 낮의 일은 다 잊은 채 즐거이 신방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자기 집 머슴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뛰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신랑은 너무 어이가 없어 부끄러움과 수치심으로 말을 못하고 있는데 머슴이 신방에 들어가 커다란 독사를 한 마리 잡아내는 거였다. 모든 사람들이 머슴이 신랑을 살렸다고 칭송이 대단했다. 신랑이 하도 이상해서 머슴에게 물으니 머슴이 어제 들은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신랑은 머슴에게 많은 재산을 나누어 주어 잘 살게 하고 이야기 주머니를 끌러 그 속에 있던 이야기들을 다 날려 보냈다〉
나중에 자라서 비슷한 이야기를 책에서 읽기도 했지만 어른들로부터 직접 얘기를 듣는 것은 우리끼리 하는 얘기보다 몇 배 더 재미있었다. 옛날이야기를 들을 때는 아무리 밤이 깊어도 잠이 오질 않았다. 이야기가 사실이고 아니고는 따질 것이 못 되었고, 그 상황을 그려보며 흐뭇해하기도 했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추석 전 날 학교에서 숙직을 하시는 선생님께 드실 음식을 가지고 학교에 갔다가 교무실 한 쪽에 있는 「한국고전문학선집」이란 책들을 보았다. 그래서 한 권을 빌려 가지고 왔는데 그게 『조웅전』이었다.
그 책은 지금까지 내가 할머니들에게서 들어 왔던 옛날이야기하고는 차원이 다른 거였다. 장편이고 사건이 구체적이어서 아주 재미가 있었다. 그 뒤로 그 문학선집을 모두 빌려다가 읽었다.
5학년 때에 새뜸에 살던 복순이가 『삼국지』를 빌려 주었다. 여러 권으로 된 것은 아니고 700면 정도의 분량인데 세로 글씨에 상, 하 2단으로 된 책이다. 이 『삼국지』를 읽고서 독서에 대한 내 실력이 진일보하게 되었다.
이 『삼국지』를 읽은 뒤에 다시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은 책이 김광주 선생이 쓴 『정협지(情俠誌)』란 무협지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두 책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무협지에 빠져 모든 시간을 거기에 다 쏟아 부어 그게 내 인생을 어렵게도 만들었지만 지금의 내가 있게 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시우 수필집 > 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얼음과자와 팥빙수 (0) | 2012.02.28 |
---|---|
외상으로 먹었다지만 (0) | 2012.02.28 |
칡인가 칡뿌리인가 (0) | 2012.02.28 |
나도 싱아를 먹었다 (0) | 2012.02.28 |
보리밭에 들어가지는 못했어도 (0) | 2012.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