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8. 17:13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내 어릴 때 기억 중에 긴가 민가 하는 것이 내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외상을 먹었다고 놀림을 받은 거였다. 나는 중학교에 다닐 적에도 어느 상점에서 외상을 먹고 갚지 않아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어 외상 먹는 문제는 지금도 부끄러운 일 중의 하나이다.
학교도 안 들어 간 내가 외상을 먹었다는 얘기 자체도 우습지만 그것이 내 자의에 의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는 게 더 웃기는 얘기이다. 어른들이 장난삼아 한 것인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지만 그 일이 잘못된 습관이 되어 뒤에 문제가 많았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처럼 내가 커서도 외상을 잘 먹었던 것은 이 어렸을 때의 일에서 비롯된 거였다.
내가 여섯 살 쯤 되었을 때 우리 집에서 조금 떨어진 냇가 도로 빈터에 집을 짓고 드물에 사시던 삼봉이 아저씨가 이사를 왔다. 아저씨네는 나보다 더 아래인 아들까지 세 식구였는데 그 아저씨는 농사일과는 거리가 멀었던 분이다. 작은어머니 쪽으로 먼 친척이 되셔서 어머니나 작은어머니께 ‘누님’이라고 부르셨다. 아저씨는 우리 마을에서는 보지 못했던 판자집 모양으로 지은 집에 진열장도 변변치 못한 하꼬방을 차리고서는 이것, 저것 물건을 가져와 팔았다.
그 시절에는 우리 마을에 가게가 하나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집 마루 같은 곳에 진열장이 있었던 것 같지만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물건을 팔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 때는 어린 아이에게 돈을 주는 사람도 없었고 가게로 물건을 사러 갈 아이도 없었을 때다. 도시 아이들은 몰라도 시골에서는 무엇을 사서 먹는다는 것이 신기할 만큼 낯선 일이었다. 그런 시절에 어떻게 외상을 먹었느냐 하면, 내가 혼자 지나갈 때 그 아저씨가 나를 불러 과자를 내어 주는 거였다.
그 과자라는 것은 포도가 그려진 조잡한 곽에 들어있는 젤리 비슷한 거였다. 그때는 그것을 ‘미리끄’라고 불렀다. ‘밀크 카라멜’을 ‘미리끄’라고 불렀다고 들었으나 지금 생각하면 무슨 맛인지도 모른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자주 먹은 것도 아니고 불과 몇 번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쪽에 내가 자주 놀러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몇 번 얻어먹은 과자가 문제를 일으켰다. 내가 외상으로 먹은 것을 갚아달라고 우리 집으로 찾아온 아저씨 때문에 난리가 난 거다. 영주가 여러 차례 와서 외상을 먹었으니 그 외상값을 달라는 거였다.
난 그때 아주 어려서 외상이 뭔지도 몰랐고 날 귀여워하는 아저씨가 먹으라고 주시기에 그냥 주는 것으로 알고 먹었을 뿐인데 가을에 추수가 끝날 무렵 아저씨가 우리 집으로 와서는 내가 먹은 과자 값이라며 쌀 몇 말 값을 내어 놓으라고 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내가 무슨 과자를 쌀 몇 말 값을 먹었단 말인가? 집에서는 깜짝 놀랐고 할아버지께서도 화를 내셨으나 결국 내가 먹은 것이니 갚으라고 해서 어머니가 갚으셨다. 그때는 할아버지가 늘 나를 감싸 주셨기 때문에 크게 혼나지는 않았지만 집안 친척들에게 두고두고 놀림을 받았다. 내가 먹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냥 주기에 먹은 것이고, 어떤 때는 할아버지와 함께 갔을 때도 그냥 주는 것처럼 내게 주셨다.
나도, 할아버지도 과자를 달라고 안 했던 것을, ‘영주야, 이거 먹어라’하고 내어주었던 게 확실하다. 그리고 내가 그 어린 나이에 분개했던 것은 실제로 내가 먹은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쌀 몇 말이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먹었다는 액수와 내가 먹은 양은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그래서 그 얘기를 어머니한테 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 집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따지지 않고 다 주셨다고 들었다.
할아버지가 계실 때 나는 소설에서 읽은 소공자 이상으로 대우를 받았었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내어 놓고 귀여워하지 않으셨지만 할아버지는 나를 정말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귀여워하셨다. 그 당시엔 우리 집이 살 만큼 살았고 아버지는 장곡면에서는 알아주는 유지라고 할 수 있었으니 내가 무슨 어려움을 알았겠는가? 고모들이며 당숙, 당고모들께서도 정말 나를 왕자처럼 받들어 주셨다. 그렇다고 내가 그런 것을 뻐기고 다닐 만큼 막 되어먹은 아이는 아니었다. 어디 가서나 조용하고 말썽을 일으키지 않아 더 귀여움을 받았으나 그 아저씨 덕에 사람들 웃기는 일을 만든 거였다.
남의 집에 가면 떡이나 과일 같은 것을 다른 애들보다 더 많이 얻어먹었고 친척집에 가면 거기 동생들보다도 더 많이 챙겨주어 그 아저씨가 준 과자도 그런 줄로 알고 받았건만, 졸지에 외상을 먹고 갚지 않은 파렴치범이 되고 말았다. 그 아저씨 말씀은 내가 달라고 했다는 것이고, 나중에 어머니가 갚아주신다고 했다고 했으나 전혀 아니다.
어찌 되었든 어머니가 갚으셨고 이것은 뒷날 내가 외상을 먹으면 어머니가 갚아주신다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어 외상 먹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으니 아주 좋지 않은 버릇이 된 거였다.
장곡으로 학교를 다닐 때에는 거기에 아는 집이 하나도 없었고 무엇을 사먹을 곳도 없었다. 이후에 학교가 우리 마을로 오고 가게가 둘이나 생겨 과자 같은 것은 돈만 있으면 먹을 수가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시골에서 아이들이 돈을 마련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그때는 용돈이라는 개념이 없을 때라 군것질을 할 돈은 누구도 없었다. 그래도 먹고 싶으니 방법이 없지 않은가?
다 아는 집들이니 나중에 갚겠다고 하면 외상으로 그냥 주었다. 그런데 외상을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부모가 갚을 능력이 있는 아이만 주었다. 난 그렇게 외상을 먹고는 내가 나중에 갚지 못하면 어머니가 갚아주셨다.
내게 돈이 모이면 내가 갚았지만 외상을 먹은 액수가 일정액 이상이 되도 갚지 못할 때에는 가게 주인이 나에게 갚으라고 채근하지 않고 어머니를 찾아가 얘기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아셨던 모양이다. 그럴 경우 대개는 어머니가 조용히 갚아주셨다.
광천으로 중학교를 다닐 때는 담산리 가게에서 외상을 먹곤 했었다.
이십리 가까이 되는 먼 길이라 학교에 갈 때는 몰랐어도 학교에서 돌아 올 때는 많이 힘들고 어려워 담산리쯤에서 과자나 빵을 먹으면 집에 오는데 힘이 덜 들어 자주 군것질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늘 사 먹다보니 나중에는 외상을 주어 돈이 없어도 겁을 안 내고 먹었다. 한 집에서 오래 먹다보니 외상값이 누적되어 문제가 되었으나 여기도 어머니가 갚아주셨다.
속담에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고 했지만 외상도 결국 갚아야 된다는 사실을 안 것은 나이를 먹어서이다. 예전에야 다 어머니가 갚아주셨지만 어머니 곁을 떠나온 뒤로는 내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늘 수입을 생각한 뒤에 지출을 하는 것이 몸에 배였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얼마 뒤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어 가세가 기울었다. 어머니나 내가 흥청망청 가산을 탕진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내 학비를 마련하느라 땅을 조금씩 팔아야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돈에 큰 욕심을 가지지 않았다. 돈 무서운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고자하면 어머니가 다 해주시어 세상 힘든 줄도 몰랐다. 천성은 타고나는 것이라 하지만 환경도 무시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외상 사건도 그래서 일어난 거라고 생각한다.
그 삼봉이 아저씨도 세상을 떠나신지 이미 오래지만 난 아직도 그때 받아 가신 외상값이 터무니없이 많은 것이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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