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8. 17:16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내가 서울에 처음 가 본 것은 일곱 살 때였다. 그 당시엔 광천 장에만 따라 갔다 와도 자랑거리가 되던 때라 서울에 간다는 것은 동네서 폼 잡을 일이었다. 서울에 친인척이 없으면 갈 일도 없으니 서울에 누가 산다는 것은 큰 힘이 되던 시절이다.
요즘으로 얘기한다면 어디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오는 정도는 되었을 거다. 내가 군에 가서 얘기를 들으니까 군에 올 때까지 서울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애들도 꽤 있었으니 내 얘기가 터무니없이 과장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울에 외삼촌이 살고 계셨다. 큰외삼촌은 결성에 사셨고, 둘 째 외삼촌과 막내 외삼촌이 서울 안암동에 사셨다. 우리 외가는 원래 아래 마을 새뜸에 있었지만 내가 태어나기 전에 그렇게 이사를 가셨다고 한다.
서울에 가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어머니를 따라서 간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따라서 갔다는 거다. 나는 아버지를 무척 어려워해서 마주 앉아있는 것조차 싫어했었다. 그래도 서울에 간다는 것에 끌려서 아버지와 함께 길을 나섰다.
광천역에서 이른 시간에 기차를 타고 출발했다. 그때는 누구나 다 광천까지는 걸어 다닐 때라 새벽밥을 먹고 아버지 뒤를 따라 걸어서 나왔다. 어머니였다면 업고서 왔을지도 모르지만 아버지는 없어 주실 리가 없고 나도 싫다고 했을 거였다.
아버지는 밖에 외출하실 때는 늘 두루마기를 입으셨기 때문에 나를 업을 수도 없었다. 그때 처음 기차를 탔다. 웃기는 얘기지만 우리 어릴 때는 차를 몇 대나 보았냐가 자랑이고 재산이 될 때였다. 나도 결성 외삼촌댁에 갈 때에 버스를 타보기는 했지만 기차는 처음이었고, 또 서울까지 간다는 것은 폼 잡을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처음 탄 기차는 무척 지루했다. 친구하고 탄 것도 아니고 어머니하고 탄 것도 아니니 누구하고 얘기를 할 사람이 없어서였다. 아버지는 근엄한 얼굴로 앉아 계셨고 마주 앉은 어른과 얘기를 나누곤 했으나 나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었다. 잠이라도 잤으면 좋을 텐데 차창 밖의 모든 것이 신기하여 그냥 창밖만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무엇을 먹겠냐고 물었던 기억은 있지만 무엇을 사달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그때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이 카스텔라였으나 그것을 사달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카스텔라를 먹어 본 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게 가장 먹음직스럽게 보여서 먹고 싶었던 거다.
서울역에 도착한 뒤에 시내버스를 타고 안암동으로 갔다. 버스라기보다는 훨씬 작았고 마이크로버스라고 했던 것 같은데 열대여섯 정도가 탈 수 있는 정도였다. 그 시절에는 그런 버스들이 시내버스로 운행된 것 같다. 아마 요즘 높은 동네로 올라 다니는 마을버스를 생각하면 얼추 비슷하다.
외삼촌댁은 둘째 외삼촌과 외숙모, 창진이, 창희, 경단이 누나. 창복이 형, 그리고 나보다 아래인 창숙이와 창호가 있었고 아직 결혼 전인 막내 외삼촌이 살고 계셨다. 친인척사이에서 나는 좀 특별한 대우를 받는 편이어서 여기서도 아주 귀여움을 받았다. 아버지는 잠만 주무시면 나가셨다가 밤에 늦게 들어오시어서 나는 외사촌 남매들 안내에 따라 서울 구경을 다녔다.
어느 계절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추수가 끝난 계절이었던 거는 확실하다. 창진이 누나를 따라 남산에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을 때 나무들이 모두 잎이 진 상태였던 것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납득이 안 가는 것이 내가 남산에 케이블카를 타고 가서 내렸을 때에 거기 움직이는 마네킹을 분명히 봤는데 다들 믿지 않아서 속이 상했던 일이다.
마네킹, 그때는 그냥 큰 인형이라고 생각했다. 양 손에 전기 줄이 연결되어 있고 어떻게 작동을 시키는 것인지는 몰라도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고개를 끄덕이고 방향을 틀기고 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지금 생각하니 옷이 입혀지지 않은 여자 마네킹이었다.
나는 이것을 가장 신기하게 생각했지만 그날 저녁에 외가에 와서 내가 본 것을 자랑삼아 얘기했더니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고 그런 것은 없다고 했다. 내가 보지 않은 것을 어떻게 상상해서 얘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난 지금도 이것이 의문이다.
창진이 누나하고 내려온 곳이 어딘지는 지금도 모른다. 아마 아침에 막내 외삼촌하고 약속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셋이 만나서 간 곳이 ‘계란후라이’집이었다. 그리 넓지 않은 곳이었으나 한쪽 벽에 하얀 접시가 수천 개는 됨직 하게 쌓여 있어 놀랐다. 그렇게 많은 접시는 처음 보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먹어 본 후라이는 인상적이지 못했다. ‘계란후라이’라는 말을 여러 번 들어서 뭐 대단한 줄 알았더니 별게 아니었다. 집에서 먹던 오갈투가리의 계란찜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전차도 타 보았다. 하도 전차 얘기를 해서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고 갔더니 이것도 우스웠다. 크게 빠르지도 않고, 길지도 않고 철로가 박힌 곳으로만 다닌다는 것이 실망스러웠다. 시골아이들이 서울에 오면 꼭 들르는 코스가 창경원하고 백화점이라고 하여 두 곳을 다 데려 갔지만 놀랄 만한 일은 없었다.
창경원에 가서 동물 구경을 했지만 크게 신기로운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실망했다. 난 호랑이나 사자가 엄청 크고 사나운 줄 알았더니 가서 보니까 그리 크지도 않고 그 모습들이 사나울 것 같지도 않았다. 신세계백화점인가 하는 곳도 데려 갔는데 내가 놀랄만한 것은 없었다.
지금 생각하만 우습지만 가기 전부터 스스로 다짐했던 것이 있었다. 서울에 가면 촌스럽게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지 말자는 거였다. 누가 강요한 것은 아니지만 난 어릴 때에도 양반은 점잖아야 한다는 것을 가슴 속에 품고 있었다. 아무리 신기한 것을 보더라도 시골아이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거였다. 그렇게 행동하는 나를 외사촌 누나나 막내 외삼촌이 대견하게 생각했는지, 아니면 신기하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시골아이 같지 않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다.
그렇게 며칠을 여기 저기 이끌려 다니며 서울구경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하고 다시 아버지를 따라 내려왔다. 내가 서울에 갔다 왔다는 얘기가 동네에 퍼져 많은 아이들이 와서 서울 얘기를 듣고 싶어 했지만 크게 자랑할 만한 것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내가 서울을 너무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릅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시골서 자란 일곱 살 나이의 아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가 너무 작았던 거다. 더구나 지금처럼 TV나 라디오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서울은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 뒤로 초등학고 2학년 때인가 어머니를 따라서 서울에 왔었고,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시골에 휴가를 오셨던 막내 외삼촌을 따라 왔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도 않은 것이,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서울에 혼자 올라와 막내 외숙모가 서울역으로 나를 데리러 왔었던 일이다. 지금 중학교 2학년이면 혼자서 외국에 다닌다고 할 것인데 서울에 온다고 데리러 나왔으니 얼마나 촌스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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