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심할 때 쓰던

2012. 2. 28. 17:33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국사시간에 나왔던 것으로 청동기 시대에 반달형 돌칼이 있었는데 이것으로 벼이삭을 잘랐다고 한다. 그것과는 조금 다른 용도지만 벼이삭을 추수할 때 쓰는 가장 간단한 도구가 홀태(홅태?)였다. 홀태는 쇠로 만든 얼개빗 같은 모양으로 날이 위로 가게 되어 있어 거기다가 벼이삭을 걸고 당기면 낟알이 떨어졌다. 많은 벼를 이렇게 털어 내기는 힘들지만 임시로 조금 먹을 양식은 이렇게 홀태로 거두는 집도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풍요로운 때는 가을이고 그 중에서도 추수하는 날이 제일 흥겨웠다. 황토로 맥질을 하여 깨끗한 마당 위에 나무 절구통을 엎어놓고 바짝 마른 볏단을 후려 때리는 바심 -아마 바수다에서 바시다로 거기서 '바심'이란 말이 왔을 거다- 하는 날이 일하는 분들이나 부엌에서 밥을 준비하는 분들이나 가장 즐거운 날이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한쪽에서는 호롱기로 벼이삭을 털어 냈다. 이 호롱기는 정확한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고 호정기가 아닌가 싶으나 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다. 이 호롱기는 넓이가 150센티미터에서 200센티미터쯤 되는 것으로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이 각기 발을 하나 발판 위에 올려놓고 밟으면 반복되는 운동이 기어에 의해 회전운동으로 바뀌어 발판 길이만한 큰 통이 돌아가는 기계였다. 그 통 위에는 못을 반쯤 박아 구부려 놓은 것 같은 브이(V)자 거꾸로 된 것들이 열을 지어 겨끔나기로 배열해 빈 공간이 없게 하여 거기에 벼이삭이 닿으면 떨어져 나가게 되어있다.

 

우측에서 볏단을 풀어 한 묶음씩 가지런하게 떼어서 줘야 일을 능률적으로 할 수 있다. 두 사람 또는 세 사람이 우측에서부터 벼 묶음을 받아 대고 털다가 옆 사람에게 주면, 그 사람이 조금 더 대고 있다가 다시 좌측으로 주면 거기서 마무리하고 짚단을 던져 버린다.

 

이 호롱기는 돌아갈 때 소리가 와롱 호롱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밟는 것도 서로 호흡이 맞아야 하지만 위에 벼를 털 때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벼가 딸려 들어가고, 심한 경우 손이 딸려 들어가 크게 다친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우리 마을에서 이 호롱기를 가장 먼저 장만했던 집이 우리 집이다. 아마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아버지가 서울에 가서 사 오신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사 오신 이 호롱기는 우리 마을에서는 처음 보는 것이라 사람들의 큰 구경거리였다지만 내가 어렸을 때에 이미 못 쓰게 되어 토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고 새로 산 것으로 벼를 털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절구통에 때려서 털고 호롱기로 털고 한 낟알들은 검불이 많아서 그냥 가마니에 담을 수가 없었다. 이런 검불들을 처리하는 것이 풍구다. 풍구는 덩치가 무척 컸다. 위에다 낟알을 집어넣고 아래서 손으로 돌리면 속에서 날개가 회전하며 바람을 만들어 검불이나 먼지가 날아가면서 낟알은 아래 출구로 나오게 된 기구였다. 풍구는 목재로 만들었고 상당히 정교한 설계와 공정을 요하는 기구였다. 이것이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목수들에 의해서 주문생산 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우리 동네에 우리 집을 비롯해서 세 집인가에 풍구가 있었으나 다 조금씩 모양이 달랐다.

 

풍구를 옮겨 다니려면 적어도 장정 네 사람의 힘이 필요할 만큼 크고 무거워서 이것 대용으로 나온 것이 손풍구이다. 이것은 공장에서 나온 것이 확실하다. 손풍구는 선풍기와 비슷한데 양철로 만든 날개가 50센티미터 정도의 길이로 네 개씩 풍차 모양으로 달려있고, 손으로 손잡이를 돌리면 날개가 돌면서 바람을 일으키는 기계였다.

 

(T)자를 거꾸로 한 모양의 가운데에 날개가 있고 기둥 뒤에서 손잡이를 돌리는 것이니 아주 단순한 모양이었다. 한 사람은 손잡이를 돌려서 바람을 일으키고 한 사람은 그 앞에서 나락이나 곡식을 위에서 아래로 떨어뜨린다. 그러면 날개의 바람으로 검불이나 먼지를 날릴 수 있었다.

 

손풍구는 풍구보다 훨씬 편했지만 안전도 면에서는 크게 떨어졌다. 안전장치라고는 전혀 없어 회전하는 날개에 다치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지만 풍구가 이동하기에 불편하고 가격이 비싼 것에 비하여 손풍구는 옮기기에 수월하고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하여 이것을 장만한 집이 많았다.

 

추수할 때 가장 진보했던 기구는 탈곡기이다. 지금은 탈곡기도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당시에는 사람의 힘이 아닌 발동기의 힘을 이용해서 곡식을 터는 진보된 기계였다. 이 탈곡기는 자체 동력이 없어 소형 발동기를 돌리고 발동기 바퀴에 벨트로 탈곡기 바퀴를 연결하여 낟알을 털었다. 탈곡기 안에 들어있는 통은 호롱기의 그것과 아주 유사했다. 다만 호롱기는 사람이 발로 밟아 동력을 일으켰고 탈곡기는 발동기의 동력을 이용했다는 점이 서로 달랐을 뿐이다.

 

이 탈곡기는 가격이 상당히 비싸서 집집마다 살 수 있는 기구가 아니었다. 또 일의 효율성이 좋아 농사를 많이 짓는 집이라 해도 탈곡기를 하나 쓰기엔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고객이 많은 방앗간이나 영업으로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구입했다. 게다가 발동기라고 하는 것이 고장이 잦아서 탈곡을 하다가 중간에 멈추고는 며칠씩 수리에 들어갈 때가 많았다.

 

전기가 들어왔다면 아주 간단하게 모터를 돌릴 수 있었겠지만 전기가 없으니 그렇게 어려웠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새뜸 방앗간이 먼저 이 탈곡기를 샀다. 그런데 이 탈곡기는 고장이 잘 났던 모양이다. 어느 해인가 우리 집 마당에서 벼를 털다가 고장이 났을 때 쉽게 고치질 못해 탈곡기를 치우고 호롱기와 절구통을 엎어놓고 털었다.

 

벼를 낫으로 베어 한 단씩 묶은 것을 벼 토매라고 한다. 이것을 논둑으로 옮겨다가 말려야 제대로 털어 낼 수가 있었다. 막 베어낸 벼는 아직 물기가 많아 무척 무거웠다. 이것을 들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며칠을 말린 다음 다시 지게에 지거나 마차에 실어서 집으로 가져오는 것도 큰일이었다. 게다가 가을비라도 한번 내리면 벼가 다 젖어 다시 말리려면 무척 힘이 들었다. 어느 해인가는 비가 아니라 눈이 내려 볏가리를 덮느라 고생한 적도 있었다.

 

요즘은 콤바인으로 수확을 하기 때문에 논에 나가 벼를 낫으로 벨 일도 없고, 볏단을 집으로 날라 올 일도 없이 그냥 논에서 바로 거둬들인다고 한다. 우리 시골도 그런지는 내가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가을 추수가 어렵다는 얘기가 없는 것을 보니 거기도 그렇게 하는 것 같다. 이제는 오서산 아래에서도 호롱기, 풍구, 손풍구, 탈곡기가 다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그 이름을 기억할 사람도 흔치 않을 것 같다.

 

 

납작한 쇠살을 나무판에 촘촘히 박고 그 사이에 벼이삭을 끼워서 훑는 그네도 많이 썼습니다. 쇠로 만든 큰 빗처럼 생겼는데 홀태라고도 부릅니다. 훑는 방식에 대비되는 게, 벼를 어디엔가 때려서 알곡을 털어내는 방식입니다.

나무절구 같은 큰 통을 뉘어 놓고 볏단을 새끼로 두른 다음 내리치면 낟알이 떨어지게 되지요. 이 방식 역시 근래까지 많이 쓰였지만 힘과 기술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헛손질하기 십상이었습니다

탈곡도구의 제왕은 누가 뭐래도 회전식탈곡기였습니다. 발로 밟아서 동력을 얻는다고 해서 족답식(足踏式)탈곡기, 혹은 호롱기(돌릴 때 나는 소리에서 나온 이름일 거라고 짐작됩니다)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둥근 통에 쇠를 ^자형으로 박아 넣은 구조인데, 사람이 페달을 밟으면 그 통이 와룽와룽~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통 위에 벼를 대면 알곡이 떨어지게 됩니다.

콤바인이나 트랙터가 보급되기 이전인 70~80년대까지만 해도 족답식탈곡기가 우리 농촌의 바심을 전담했습니다. 다른 도구나 방식에 비해서 군계일학 소리를 들을 만큼 효율적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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