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레방아

2012. 2. 28. 17:48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물레방아와 물방아가 같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것은 지역에 따라 그 방식이 다르고 이름도 다르기 때문이다. 둘 다 물을 이용하여 방아를 찧는 것은 같지만 내가 어려서 보았던 것은 요즘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다른 거였다. 관광지에서 볼 수 있다는 것도 실제 방아를 찧는 것은 없고 다 시늉만 내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 충분한 고증을 거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내가 아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물레방아라고 하는 것은 물레처럼 생긴 수차(수레바퀴)를 물로 돌려 그 힘을 이용하여 방아를 찧었던 기계였다. 즉 수차를 돌려 동력을 얻어 그 힘을 이용한 거다. 물의 힘으로 돌리는 큰 바퀴와 연결된 장치로 다른 기구를 작동시켜 방아를 찧을 수 있었다. 이것은 말은 쉬워도 정교한 기계적 설계와 장치가 필요한 것이라 쉽게 만들 수 있던 기계가 아니다. 아마 영업을 목적으로 한 곳이 아니면 설치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한다.

 

물방아는 물이 떨어지는 낙차를 이용한 것이므로 수차(水車)가 없이도 가능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위에서 물을 모아 아래로 떨어뜨려 그 힘으로 지렛대를 움직여 그 힘으로 곡식을 찧었다. 디딜방아라고 부르는 것처럼 긴 지렛대를 이용하여 지렛대 작용으로 곡식껍질을 벗길 때 사용했다. 디딜방아는 사람이 발의 힘으로 그 끝을 밟았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찧었는데 물방아는 사람의 힘 대신에 물의 낙차를 이용하여 사람의 수고를 덜게 한 거다.

 

지렛대 끝에 긴 물통이 있어 물이 차면 한쪽으로 기울면서 그 물이 떨어질 때 나오는 힘을 이용하는 물방아의 구조는 매우 단순하게 보였다. 사용할 물과 물의 낙차가 가장 중요한 요소이므로 그런 지형만 찾으면 설치는 쉬웠을 것으로 본다. 내가 다니며 본 지방에 있던 것들은 대부분 이런 물방아였다. 물레방아와 물방아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요즘은 많은 관광지에 수차로 돌리는 물레방아를 만들어 놓아 오히려 혼란스럽다.

 

물레방앗간은 보리밭과 함께 시골 처녀 총각들의 밀회 장소로 각광을 받았고 여기에 얽힌 얘기들은 어느 시골 마을이든 다 있는 거였다. 특히 이효석님이 쓴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봉평 시냇가의 물레방앗간은 허 생원이 성씨네 처녀와 만나 보낸 무섭고 기막힌 밤으로 많은 사람들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은가? 나도 봉평에 사진 찍으러 갈 때마다 거기 만들어 놓은 물레방앗간을 보지만 내가 알고 있는 물레방아는 거기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오서산 아래서 내가 본 기억이 있는 물레방아는 새뜸에 있던 방앗간과 들마당 건너편에 있던 물방앗간 터뿐이다. 지금이야 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기억에는 어렴풋이 남아 있다. 먼저 기억나는 것이 들마당 앞에 있던 물방앗간이다. 이 물방앗간은 광성리 1구 사람들이 주로 썼던 것으로 내가 어릴 때에 이미 그 흔적만 남아 있었다.

 

오서산에서 내려오는 큰 내를 광제에서 막아 용배 들을 끼고 아주개 쪽으로 흐르는 큰 보()가 상보(上堡)였다. 지금은 이름만 남아 있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이 상보가 아주 큰 수로였다. 겨울만 빼고는 늘 물이 흘렀고 그 양도 제법 많아 용배, 앙산 아래, 아주개 논들까지 이 물에 의지하여 논농사를 지었다. 아 상보가 당시에 있던 보들 중에서는 가장 컸었다. 새뜸 아래로 내려가면 다른 보의 물을 이용하는 논들이 많았지만 광성리 일대에서는 상보가 가장 길고 수량도 풍부했다.

 

이 상보가 끝나는 지점이 성벌 냇가로 이어지는데 지형의 높낮이 차가 커서 낙차를 이용하여 방아를 돌렸던 모양이다. 여기서 모양이라고 한 것은 내 기억으론 보지 못했기에 하는 말이다. 하지만 물이 흐르는 곁으로 열대여섯 평은 되는 공간이 방앗간 터라고 남아 있었다. 지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이 흘러내려 수차를 돌렸고 수차와 연결되어 방아를 찧던 곳은 마치 움집처럼 땅을 파내고 여러 기구를 놓았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우린 거기서 장난도 치고 놀이도 하며 뛰어 다녔으나 밤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그때는 도깨비불이 나올 때여서 간혹 도깨비불을 보았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도깨비불이 자주 나타났던 곳이 물방앗간과 그 아래 냇가 들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거기 자주 나타났던 도깨비불이 연애하던 사람들의 담뱃불 같기도 하다. 사람들이 다니기를 꺼려하는 외딴 곳이고 으슥한 곳이니 남의 눈을 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더 안성맞춤의 은밀한 공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는 밤이 깊으면 절대 가지 못할 공간으로 알려져 있었다. 우린 그 앞 내가 넓어 거기서 쥐불놀이 등을 많이 했지만 그것은 초저녁까지의 일일 뿐이었다.

 

{}가 넓어도 물이 많지 않고 특히 겨울이면 모래가 드러나서 놀기가 좋았지만 나중에 경후 아버지가 그 들판에 논을 쳐서 그 놀던 공간이 사라지고 말았다. 방앗간 터도 없어지고 들판도 없어지니까 도깨비불도 사라졌다. 예전에 도깨비불이 있었다는 말에 이의를 달고 싶지는 않지만 가장 흔히 나타나던 곳의 도깨비불들이 사라진 것으로 보아 그 불은 사람들과 연관이 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니 물방앗간 옆으로 100여 평이 될까 말까한 논배미가 있었다. 이 논은 어느 가난한 노부부가 순전히 호미와 괭이로 일궈 만든 것이라고 했다. 이 노부부는 자식이 없이 살다가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돌아가셨고 돌아가신 후론 동네에서 관리하고 그 제사를 지낸다고 들었다. 내가 그 얘기를 들은 것은 아주 예전이라 지금도 지내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이 방앗간과는 달리 새뜸에 있던 물방앗간은 단순한 물방아가 아니었다. 단순한 물방아는 물의 낙차를 이용한 그 힘으로 디딜방아를 찧는 것이지만, 새뜸 물방아는 물방아가 아니라 물레방아로 수차로 동력을 만들어 기계로 연결된 정미소를 작동시키는, 지금 생각하면 나도 납득이 잘 안가는 현대식 방앗간이다.

 

옛날 일이지만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발동기 대신에 물로 돌리는 수차가 있었고 그 내부는 다른 정미소와 같았다는 점이다. 아무나 가서는 기계를 작동시킬 수가 없었고, 새뜸에 큰 황 서방네라 불리던 복순이 큰아버지가 관리하셨다.

 

그러니까 이 물방앗간은 그림에서 보는 그런 단순한 물레방아가 아닌 것이고 청춘남녀의 밀회 장소도 아니었다. 방앗간으로 드나드는 문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달려 있었고 잠그면 들어 갈 수가 없었다. 방아를 찧을 때 몇 번 따라가 보아서 알지만 분명히 내부가 현대식 방앗간과 같았다고 기억한다. 쇠로 된 여러 바퀴가 벨트로 연결되어 물레방아의 힘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 물방앗간은 그 뒤에 새뜸 아래쪽에 현대식 방앗간으로 옮겨서 새로 지었다. 그리고 그 주인도 역시 복순이 큰 아버지였다. 동살뫼에 이미 현대식 방앗간이 있었지만 우리 집은 방앗간 아들과의 문제 때문에 그리로 가지 않고 새뜸으로 방아를 찧으러 다녀 내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아주 예전에 냇가에 있던 건물 자체가 완전히 없어져 지금은 거기에 방앗간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 같다. 방앗간이 있던 자리는 어느 사이에 큰 도로가 개설되고 포장이 되어 나도 차를 타고 지나면서 가끔 방앗간의 기억을 떠올릴 뿐이다.

 

물레방아는 원래 박달나무로 만들고 바퀴자체 또한 아주 작았지만 1920년 후반부터 방아의 크기와 방아의 관련된 전체적인 모습들이 많이 변화되었다고 한다. 곡물 가공뿐만 아니라 발전용(發電用), 제지용(製紙用) 등으로 그 범위가 아주 다양해 졌고, 60~70년대를 넘기면서 농촌의 농기계 보급과 전력화 촉진으로 급속한 사양길에 치달아 80년대를 기점으로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새뜸 물방앗간이 이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