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지가 아닌데

2012. 2. 28. 17:34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어쩌다가 옛 생각이 떠올라 인터넷 백과사전으로 끄승개와 구루마를 찾아보니 검색 결과가 없다고 나온다. 구루마는 달구지로 바꿔서 찾아보니 바퀴가 둘 달린 말이나 소로 끄는 기구로 나와 있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구루마는 그게 아니다.

 

우리 어릴 때는 오서산 아래에 탈 것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광천에 나가 기차나 자동차를 보고 온 것이 자랑이던 시절이니, 그런 것을 타보는 것은 어디 친척집에 가느라 멀리 갈 때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때는 구루마 또는 마차라고 불렀던 영업용(?) 소달구지가 한 마을에 하나 정도 있었고 이것은 주로 광천 장날에만 영업을 했다. 광천 장에 무거운 것을 내보내려면 마차에다 실었고 그 삯으로 보통 100원 정도를 받았다. 소가 끄는 바퀴 둘 달린 달구지라는 것이 이거였다.

 

방앗간을 하는 집들은 이 마차가 있어야 했다. 벼를 대여섯 가마 정도 방아 찧으러 온다면 자기들이 가서 싣고 와야 했기 때문이다. 성벌과 새뜸, 상풍에 방앗간이 있어, 조금 먼 거리에서 많이 찧으러 온다면 마차로 가지러 다녔다. 벼 한 두 가마라면 리어카 즉, 손수레로 가져 올 수 있으니까 방앗간이 아니라 찧을 집에서 가져왔다.

 

구루마는 애들이 타고 놀던 거였다. 두 개의 각목으로 30센티미터 정도 넓이의 축을 대고 위에는 판자를 대서 앉을 수 있게 하고 아래에 네 개의 바퀴를 달아 사람의 손으로 끌고 다닌 장난감이다. 이것은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아 집집마다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이 구루마를 만들고자 할 때 가장 큰 문제가 바퀴와 그 바퀴를 끼울 축대였다.

 

바퀴지름이 30센티미터 정도는 되어야 좋지만 보통은 20센티미터 안팎으로 만들었다. 통이 굵은 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바퀴의 두께가 너무 얇으면 쉽게 뻐개지고 너무 두꺼우면 끌기가 힘들었다. 바퀴 가운데에 구멍을 뚫으려면 도래송곳이 필요하나 도래송곳은 목수들이나 가지고 있는 연장이라 쉽게 빌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퀴를 끼우는 축대도 가늘면 힘을 못 바치어 부러지기 쉽고 너무 굵으면 바퀴 구멍을 크게 파야 돼서 이 구루마를 만든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고 그래서 있는 집이 드물었다.

 

우리 집에서도 이것을 내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갖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을 뿐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일곱 살 때인가에 집에 오셨던 삽다리 고모가 이 얘기를 듣고 삽다리에 가면 만들어 주신다고 하여 좋아라하고 따라 갔다.

 

아마 어머니 곁을 떠나 혼자 누군가를 따라가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서울 외삼촌댁에도 갔었지만 그 때는 어려웠어도 아버지가 계셔 두렵지는 않았다. 내가 고모를 따라 혼자 나선 것은 순전히 구루마에 마음이 들떠서였다.

 

고모 막내 시동생이 손재주가 많으시어 거의 목수 버금가는 실력이라 고모가 쉽게 생각하셨을 거였다. 가서 나는 이제나저제나 구루마를 만들어 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으나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도 전혀 만들어 줄 생각을 안 하는 거였다.

 

처음에야 마음이 들떠서 갔지만 며칠 지나니 집에 가고 싶고, 구루마도 안 만들어 주고……. 사람들 앞에서야 그럴 수 없지만 혼자 있으면 집에 가고 싶어 눈물이 났다. 그렇게 한 열흘은 지나서 할머니가 나를 데리러 오셨다. 구루마고 뭐고 그냥 할머니보고 빨리 집으로 가자고 보챘더니 하루만 기다리면 정말 만들어 준다고 하루만 더 있다가 가라고 고모가 만류하셨다.

 

할머니도 그냥 가실 생각이 아니신지 하루만 더 기다렸다가 가자고 하셨다. 나는 어린 생각에 속으로 내가 속은 것이지 무슨 구루마냐고 투덜거렸을 뿐이다. 나는 정말 믿지 않았으나 막내 시동생이 어디서 판자 몇 개와 톱 등을 가지고 오시더니 잠깐 새에 구루마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바퀴는 통나무를 잘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판자를 두 개 붙여 재단해 내서 만들고 바퀴를 끼는 축대는 나무가 아니라 무엇에 쓰던 것인지 쇠로 된 철봉이었다.

 

별로 시간을 끌지 않고 만들었으나 성벌에서는 생전 보지 못한 멋진 구루마였다. 그 때는 보지도 못한, 마치 요즘의 유모차처럼 생겼었다. 앞부분은 베니어합판으로 둥글게 해서 다리가 안 보이고 뒤는 의자처럼 만들어 의자에 앉듯 앉으면 되고 뒤에서 밀 수 있게 손잡이를 달아 정말 요즘 유모차 같았다.

 

얼마나 흐뭇하던지……. 그것을 기차에 싣고 와서 광천에서 성벌까지 밀고 올 때에 보는 사람마다 멋있다고 하여 어깨를 으쓱거리며 힘든 줄도 모르고 왔었다. 아마 한 3년은 내가 끌고 다녔을 거다. 그러다가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지만 지금도 생생한 기억 속에 남아있다.

 

끄승개는 바퀴가 달리지 않은 탈것이었다. 와이(Y)자로 길게 올라 간 큰 나무를 잘라내어 위에만 판자를 대고 아래는 그 나무 자체가 땅에 닿은 채 끌게 만들었다. 땅에 닿는 부분은 평평하게 깎아내어, 구루마보다 훨씬 더 힘을 들여야 끌 수 있지만 이것도 용도가 있어서 만들었던 거다.

 

우선 아주 큰 끄승개는 소를 길들일 때에 썼다. 소가 커서 중 소쯤 되면 길을 들여야 쟁기질을 할 수 있는데 길들일 때 길에서 이 끄승개를 끌게 했던 것이다. 끄승개 위에 맷돌이나 쌀가마를 싣고 사람도 몇 태우고 여기저기 끌고 다녔다. 소에게 멍에를 씌우고 이 끄승개를 끌게 하면서 다릿심을 기르게 했던 거였다.

 

크기가 작은 것은 마당맥질한 뒤에 바닥을 고를 때 썼다. 대개 마당이 넓고 벼농사를 많이 짓던 집은 초가을에 마당맥질을 했다. 바닥에 황토 흙을 파다가 물로 매끈하게 처리한 다음 흙에서 물기가 빠지고 굳으려 할 때 끄승개를 끌고 다니며 바닥을 다지면서 매끈하게 했다. 마당맥질을 한 집에서는 동네 아이들을 불러서 놀게 했다. 아이들이 발로 다진 위를, 역시 아이들을 몇씩 태운 끄승개를 끌면서 놀게 하면 바닥이 더 매끈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탈 것이 없던 때라 아이들을 여기에 태워서 끌고 다니시는 어른들도 있었다. 아이를 업고 다니는 것보다는 힘이 덜 들었고 아이들도 등에 업히기보다는 이런 것을 타고 노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원시인이 나오는 이야기에 보면, 큰 짐승을 잡아서 운반할 때 무거운 것을 그냥 끌고 오면 가죽과 고기가 상하니까 나뭇가지 위에 싣고 나무를 끌고 오는 얘기가 있다. 아마 이 끄승개가 그런 역할에서 만들어졌을 거다. 산에서 무거운 것을 가져 올 때에는 위에서 내려오는 일이니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운반할 수가 있어 요긴하게 쓰였을 거였다. 여기에 바퀴를 달고 하려면 손이 가니까 그냥 나무를 베어서 썼고, 그러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농가에서 쓰이지 않았나 싶다.

 

지금은 마당맥질이나 벽을 맥질할 일도 없어졌고 구루마나 끄승개를 타고 놀 아이들도 없으니 다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얘기들이다.

 

 

끄승개 : 끌개의 방언

끌개의 형태나 재료는 곳에 따라 크게 다르지만, 가장 흔한 것은 솔가지나 댑싸리를 두툼하게 묶고 이에 손잡이를 붙인 것으로, 위에 사람이 올라앉거나 돌을 얹어서 끄는 것이다. 이 밖에 무거운 나무토막 양쪽에 자루를 박고 여기에 끈을 매어 쓰며, 특히 흙덩어리를 잘게 부수려 할 때에는 둥근 나무토막에 쇠못을 촘촘히 박은 것 2개 이상을 이어 붙이고 이들 사이에 널을 깔고 사람이 앉아 끌고 다니기도 한다.

호남 지방 지리산 일대의 산간지대에서는 서너 그루의 소나무를 뗏목처럼 나란히 묶되 가지를 짧게 쳐서 이[]를 삼아 끌어서 흙을 잘게 부수기도 하는데, 오늘날의 써레나 평생써레는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