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8. 17:50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오서산은 산의 크기에 비해 규모 있는 절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천에서 올라가는 정암사는 그래도 조금 갖춘 편이지만 광성리로 올라가는 내원사는 그 역사나 이름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나마 아버지 친구 분이 주지로 계실 때는 절의 면모를 갖추었었지만 그 분이 돌아가신 뒤로는 아예 절 같은 느낌도 들지 않는다. 그 분이 어떻게 출가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광제에 살던 박광덕인가 하는 스님이셨다. 그 분 묘지가 바로 절 뒤에 있다는 것도 절을 절답게 하지 않는 흠이었다.
내가 일곱 살이던 때에 할아버지 사십구재를 지내러 처음 내원사에 따라 갔고 그 때 절에서 하루를 잤다. 아버지, 어머니, 고모, 당숙들까지 스무 분 가까이 되는 많은 분들이 다들 어디서 주무셨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오서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1, 2학년은 광제 위 폭포수로, 3, 4학년은 그보다 조금 위에 있는 용문암으로, 5, 6학년은 그 위에 있는 내원사로 소풍을 갔고 더러는 아예 오서산 상봉까지 올라갔었다. 그 시절에는 내원사로 공부하러 내려오는 서울 대학생들도 있었다. 이런 형들이 학교에 와서 학교 책상과 걸상 같은 것을 빌려 가곤 할 때에 그런 형들을 따라서 내원사까지 놀러 간 적도 있다.
내가 그 때 내원사에서 읽은 안내판에는 그 절이 백제시대에 겸익 대사가 지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국사에서 배운 백제의 고승은 겸익과 관륵만 기억하기에 그 중의 한 분인 겸익 대사가 지은 절이라고 생각하니 무척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그 표지판을 세운 주체가 장곡초등학교여서 나중에는 신뢰가 가지 않았었다. 이런 저런 일들로 열 살이 넘어서 스무 살 무렵까지는 해마다 오서산에 올랐고 내원사에 들렀다.
지금은 광천에서 담산리로, 담산리에서 정암사 앞으로 해서 오서산 7부 능선을 따라 내원사로, 내원사에서 용문암 앞으로 그리고 광제 뒤로 해서 오서초등학교로 이어지는 도로가 개설되어 4륜구동차를 가지면 어렵지 않게 올라갔다가 내려 올 수 있다.
우리 오서초등학교 출신들에게는 오서산과 함께 내원사가 마음속에 깊이 간직된 고향의 일부이기에 내원사가 점점 쇠락해 가는 것이 무척 안타깝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생각한 것이지만 광성리(廣城里)가 정말 백제 때의 성(城)이라고 한다면 내원사가 백제 때에 지어진 절이라고 해도 틀린 얘기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왕 그 자리에서 명맥을 이어가려면 제대로 된 절로 탈바꿈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화계교회는 정확한 명칭이 대한기독교침례회 화계교회로 이름은 화계교회지만 광성리 끝자락인 뒷동산 발치에 있었다. 나는 교회에 잘 나가는 기독교인이 절대 아니면서도 광성리에 있는 교회가 화계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 불만이었다. 이 화계교회는 그 깊은 역사에 비해 늘 초라한 모습으로 뒷동산 아래에 서 있다가 지금은 안골고개 위로 옮겨가 여전히 그 이름으로 서 있다.
화계교회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내가 태어나기 이전인 것은 확실하다. 처음 시작이 새뜸 할아버지 댁 앞에 사시던 원종이 할아버지였다는 것만 알고 있다. 이 어르신이 나중에 김 집사로 불리셨다. 원종이 할아버지는 교회를 짓기 전부터 전도활동을 하시고 신도를 모아 화계교회를 시작했다고 한다.
내가 대여섯 살 때쯤부터 크리스마스 전후에서 교회에 나가곤 했었다. 이때는 나뿐만이 아니라 성벌, 동살뫼, 새뜸 애들은 다 나왔다. 집에서는 교회에 나가지 말라고 했었지만 엄하게 막은 것은 아니어서 1년에 한 달 정도씩 다녔다.
원종이 고모가 교회의 대부분 일을 챙겼었다. 교회는 예배를 보는 마루로 된 강당 같은 예배실과 풍금 한 대, 강단과 십자가가 새겨진 교탁이 전부였다. 한 쪽에 작은 방과 부엌이 딸려 있었으나 여기서 살림하는 사람은 없었다. 원종이 고모가 몇 살쯤이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새뜸 종설이 할머니 제사 때 먹은 음식이 체해서 시집도 가기 전에 세상을 떴다. 그런데 교회에서 애들이 떠들면 이 고모가 나타나 조용히 하라고 밖에서 소리쳤다는 얘기가 떠돌아, 고모가 귀신으로 와서 교회를 지킨다는 얘기도 있었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겠지만 교회가 외진 곳에 있어 그 근처를 지나려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 교회에 오랫동안 열심히 봉사하신 분이 지금 안양에 사시는 새뜸 막내당숙이다. 당숙이 어떤 계기로 교회에 나가게 되셨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기억하는 거는 당숙께서 20대부터 30대에 이르러 새뜸을 뜨기 전까지 교회를 지키셨다는 사실이다. 어떤 직책도 직함도 없이 혼자서 하신 적도 있고 어디서 목사가 오시면 그 목사님을 도와 지극 정성으로 교회를 위해 봉사하셨다.
화계교회는 어른 신도는 거의 없었고 조무래기들만 철에 따라 다녔었다. 이 조무래기들 말고는 신풍리 어덕말에 사는 서씨네와 광제에서 두어 집 그리고 꽃밭골에서 두어 집, 오성리에서 두어 집 정도해서 한 열 집 정도가 교회에 나오는 신도였다.
그러니까 신도 수가 더 늘지도 않고 줄 일도 없이 그저 자그마한 교회로 수십 년을 버텨온 거다. 한번은 서울에서 왔다는 아버지와 딸이라는 두 사람이 교회에서 살림을 한 적이 있었다. 교회에 와서 산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도 어린 마음에 반가워 도배도 도와주고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은 조금씩 갖다 주었다. 그 딸이라는 분이 무척 상냥해서 우리 당숙하고 결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1년인가 지내다가 다른 곳으로 가버렸고 또 다시 당숙 혼자서 교회를 지키셨다. 나중에 들으니 침례교 교단에서 정식으로 목사님들이 발령을 받아 내려오게 됐고 안골 어느 분이 땅을 희사해서 안골 언덕 위로 교회를 짓고 이사를 갔다고 했다. 뒷동산 발치, 교회가 있던 자리는 교회 땅이 아니었던 거다. 성벌 만중이 형이 뒷동산을 산 뒤에 교회가 옮겨간 것이 아닌가 싶은데 정확한 내막은 듣지 못했다.
안골 넘어가는 언덕 꼭대기 길가에 교회가 있지만 한 번도 가보지는 않았다. 내가 광천으로, 홍성으로 학교를 다니느라 동네에서 생활하지 않아서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방학 때면 더러 길에서 만나 인사를 나눈 목사님이 있었다. 오래 전 일이라 기억도 잘 안 나지만 그 목사님의 아들이라는 꼬마들을 본 적 있다.
그런데 작년에 ‘오서국민학교 카페’에 그 목사님 아들이라는 임진혁 군이 결혼하고 캐나다로 유학 간다는 글을 올렸다. 몇 회인지는 잘 모르지만 오서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그 글이 올라오자 광제 살던 유선이, 오성리 명린이, 상풍 순재 등이 축하의 글을 올려 그 화계교회도 내가 예전에 알던 화계교회가 아님을 실감했다.
오서산 자락, 오서학군 내에 아직도 교회가 하나뿐이고 그 세력이 미미하다는 것은 오서산 아래 사람들이 배타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일 거다. 화계교회를 그렇게 열심히 지키시던 당숙은 서울로 오시어 노량진 동광교회에서 30대 후반부터 장로로 봉직하고 계신다.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 날은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와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박목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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