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8. 17:53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내가 장곡초등학교에 입학하였을 때에 우리 반에 나보다 다섯 살인가 위인 형이 있었다. 광제에 살던 주철이 형으로 왜 그렇게 늦게 학교에 왔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모른다. 광제 고잔 김씨네 큰 집 막내아들이라고 들었다. 어려서 보약을 잘못 먹었는지는 모르지만 보통 사람보다 조금 정신연령이 늦어서 우리와 함께 다니고 있었다. 그 당시엔 대부분 아이들이 형이라고 부르지 않고 ‘주철아, 주철아’ 하고 불렀다.
1학년 때부터 우리 반이었는지는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2학년 때 우리 반에 오성리 연분이라는 누나가 있었다. 나보다 몇 살이 위인지는 정확히 모르나 서너 살은 위인 것이 확실했다.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아기를 가진 여자 선생님이셨는데 종종 집에 가서 아이를 보라고 선생님 댁으로 보내곤 했다. 우리가 장난삼아 이름을 부르고 까불다가는 된통 혼날 만큼 힘도 셌다. 당시 우리 눈으로 봐도 같은 또래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학교가 너무 멀어서 걸어 다니기가 힘들던 시절이었다. 장곡초등학교가 있는 도산리까지는 우리 성벌에서 30분, 광제에서 40분, 참뱅이와 안골에서는 그보다 5분 정도는 더 걸렸을 거리였고, 오성리에서는 한 시간 가까이 걸어서 다녀야 했다. 비가 오면 흠뻑 젖을 수밖에 없었고, 겨울에는 찬바람에 울면서 다니는 아이가 많았다. 그래서 학교에 들어가는 나이가 도시 애들 보다 늦을 수밖에 없었다.
도시에서는 다 차를 타고 다니니까 문제가 없지만 시골에서는 산길, 들길로 한참씩 걸어서 다니다보니 학교를 오가며 많은 사건이 있었다. 남의 밭에서 서리도 하고 동네끼리 힘자랑도 하고 힘이 센 아이들이 저보다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그러다가 학교가 우리 동네로 오고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가장 혜택을 본 것이 우리 동네인 광성리 1구인 것은 분명하고 광성리 2구인 안골이나 참뱅이, 3구인 광제도 다 괜찮아졌다. 조금 서둘면 10분 거리에 학교가 있으니 다른 아이들에게 당할 일이 없어졌을 뿐더러 텃세까지 부리게 되었다.
주철이 형은 무척 명랑한 사람이었다. 공부하고는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장난 좋아하고 잘 웃었다. 마음 편하게 학교를 다닐 수 있었으니 본연의 쾌활한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여자 애들에게 장난치기를 좋아했다. 장난한다는 것이 소꿉장난 같은 것은 아니고 애들을 가볍게 때리고 도망가고 하는 거였다.
더러 그런 문제 때문에 집에 가서 이르는 아이가 있어, 그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와서 꾸중도 듣고 했지만 그 때 뿐이었다. 특히 키가 큰 여자애들을 많이 귀찮게 했다.
연분이 누나와 다시 같은 반이 된 것은 3학년 때였다. 한 학기는 서로 다른 반이었었다. 주철이 형이 다른 여자애들에게는 장난을 잘 쳤어도 연분이 누나에게는 꼼짝 못했다. 가서 건드리면 그냥 당하지 않고 힘으로 대들었기 때문이다. 연분이 누나는 나서서 다른 여자애들을 보호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스스로 자기 방어는 충분히 했다.
우리는 주쳘이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연분이도 누나나 언니라고 부르지 않고 늘 이름을 부르며 다른 애들과 똑 같이 대했다. 요즘은 애들이 같은 학년이라도 두 살 정도 차이가 나면 대부분 형으로 대접을 해주지만 그 시절에는 그런 것을 몰랐고 선생님도 그렇게 하라고 시키지를 않았었다.
우리 반에서 처음엔 연분이에게 힘으로 못 당하고 분위기에 못 당했던 아이들이 조금씩 커 가며 힘으로 극복하기 시작했다. 이젠 역으로 연분이가 남자애들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것이 연분이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문제였을 거다. 4학년이 끝나갈 무렵 연분이가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나이 먹어 다른 사람보다 늦게 학교를 다니는 것도 별로 좋을 일이 아닌데 애들마저 괴롭히니 많이 힘들지 않았나 싶다. 거기다가 아이들이 장난하느라 늘 주철이 형과 연분이를 짝으로 보아주는 것도 싫었을지 모른다. 연분이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우리 반 아이들은 늘 두 사람을 짝으로 놀리기를 좋아했다.
주철이 형이 학교에 늦게 들어 온 것은 정신연령이 조금 낮아서라고 할 수 있지만 연분이는 전혀 그렇지 않았으니 애들이 장난삼아 놀렸다 해도 별로 유쾌할 리가 없었다. 이런 것이 표면으로 드러난 것도 아니니 그만둔 이유를 정확히 모르지만 슬그머니 교실에서 안 보이더니 아예 사라졌다. 그러면서 연분이는 우리 반 아이들에게 잊혀져갔다.
우리가 6학년 때의 겨울이었으니 졸업을 얼마 앞두었을 때다. 오성리 아이들에 의해서 연분이가 결혼을 한다는 얘기가 들렸다. 연분이가 신풍리로 시집을 간다고 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소식이었다. 아무리 올려 잡아도 연분이 나이가 스물이 안 될 텐데 시집을 간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도 얼마 전까지 우리하고 같은 반 친구로 지냈으니 파장이 클 수밖에 없었다. 신랑이 될 사람과는 나이 차가 꽤 나는 것으로 들었다. 그 신랑이라는 사람을 안다는 애들도 꽤 있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이 소식에 놀라면서도 긴가민가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을 하든 그 소문이 나고 얼마 뒤에 연분이가 정말 결혼식을 올렸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리고 며칠 뒤에 연분이가 자기 신랑과 함께 우리가 있는 학교 앞을 지나가는 일이 있었다.
누가 먼저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연분이가 신랑하고 간다는 얘기에 우리 반 모두는 다 운동장가로 뛰어 나갔다. 축하를 한다는 것은 그때는 아예 몰랐고 놀려주러 나갔을 뿐이다. 우리 반 아이들뿐이 아니고 조금 아는 저학년 애들도 모두 뛰어나와 구경을 했다.
요즘 말로 하면 결혼식 뒤에 친정에 후행을 갔다가 시댁으로 가는 길이었을 거다. 정장을 한 신랑과 한복을 곱게 입은 연분이가 학교 앞을 지날 때 우리는 ‘백연분’, ‘백연분’을 연호했다. 연분이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우리를 무시하며 지나갔다. 나는 조금이라도 부끄러워할 줄로 생각했으나 전혀 그런 눈치가 아니어서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 뒤로 연분이 소식은 듣지 못했다. 신풍리 어덕말이면 우리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나 거기에서 살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만약 연분이가 지금 초등학교 동창모임에 나온다면 예전처럼 이름을 부를 수는 없을 것이고 누나 혹은 누님이라고 부를 거다. 더러 짓궂은 친구들은 여전히 옛날이야기 하며 까불겠지만 나는 누님이라고 부르고 싶다.
주철이 형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농사를 짓다가 결혼했다. 가끔 고향에 내려가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해도 예전 같지는 않았다. 나야 반가운 마음으로 대하지만 형이 나를 대하는 것이 늘 어색했다.
주철이 형이 초등학교 시절을 기억하는지는 모르지만 예전의 그 쾌활한 모습은 간 데가 없었다. 결혼을 하고도 오래 자녀를 두지 못했다고 들었었다. 그러다가 한참 전에 의정부 형님 댁으로 명절을 지내러 왔다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떴다고 들었다.
예전에 어릴 때에 주철이 형과 연분이 누나가 결혼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물론 얼토당토아니한 이야기겠지만 만약 두 사람이 결혼해서 살고 지금 같이 초등학교 동창모임에 나온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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