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2012. 2. 28. 17:54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고등학교를 1년 늦게 들어갔다. 그냥 실력에 맞춰서 고등학교를 택했으면 될 것을 학교 성적보다 월등히 잘 나오는 모의고사를 믿고 내 실력보다 훨씬 위인 공주사대부고에 시험을 쳤다가 떨어져 재수했다. 그 바람에 청주 막내고모 댁에 가서 1년 학원 생활을 했고, 청주고등학교에 시험을 쳤다가 또 떨어져서 후기로 홍성에 있는 홍주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청주에 가 1년 지내면서 성적도 많이 올랐고, 배운 것도 많아 그게 꼭 손해를 본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록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들 보다 1년 늦어서 동창을 선배로 두기는 했지만 좋은 친구들을 여럿 만났으니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로 자위한다.

 

고등학교 다닐 적에도 1회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홍주고등학교 1회에 초등학교 동창은 하나도 없었다. 중학교 동창은 여럿 있었지만 선배가 된 친구들을 찾아다닐 정도로 넉살이 좋지는 못했다. 나는 그들을 소 닭 보듯 하며 생활했지만 늘 현실에 만족하는 성격이라 다른 갈등 없이 고등학교 생활을 평탄하게 할 수 있었다. 나는 홍주고등학교에 2회로 다니면서 오서초등학교 2회 때와 별로 다르지 않게 공부도 열심히 했고 선생님들로부터 모범학생으로 인정을 받으며 지냈다.

 

몇 년 전에 고등학교 동문체육대회에 참석을 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적에 많은 상을 받았고 우리 동기 중에 대표로 일을 했기 때문에 고등학교 행사는 늘 내게 빚이 되고 있다. 여러 차례 초대장을 받았지만 일요일에 하는 행사여서 사진을 찍느라 못 가다가, 우리 동기들이 주관하는 행사라 어쩔 수 없이 내려갔었다.

 

그때 거기서 뜻하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 누가 내게 다가와 자기는 1회라고 얘기를 하면서 나더러 이영주가 아니냐고 물었다. 맞다고 했더니 자기는 박영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냥 인사치레 말을 하였더니 다시 나더러 혹 장곡이 고향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자기를 모르겠냐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도 다시 얼굴을 자세히 봤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솔직히 모르겠다고 했더니 오서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전학을 갔다면서 나를 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다시 듣고 보니, 영길이, 박영길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내가 세상에 박영길이를 기억하지 못하다니……. 분명히 그때는 키가 나보다 작았고 머리도 짱구였다. 그런데 눈앞에 서 있는 영길이는 키도 나만큼이나 컸고 얼굴도 그때의 모습이 전혀 없었다. 아무리 그렇다하더라도 내가 영길이를 못 알아봤다는 것은 나답지 않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영길이는 구항에서 전학을 온 아이였다. 그때는 구항이 어딘지 몰랐고, 단지 홍성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고만 들었다. 영길이네는 우리가 오서분교로 왔던 직후에 마을 공회당으로 이사 해 전학을 왔다. 영길이네는 부모님이 계시고 아들 셋, 딸 셋인가 되는 식구가 여럿인 집이었다. 이사 와서 영길이네는 공회당에서 학교 애들을 상대로 작은 구멍가게를 했다.

 

영길이네가 구항에서 왔다는 것만 알지 자세한 것은 알지 못했다. 영길네 남매들은 하나같이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 하였다. 제일 위가 형이었는데 이름이 영주였다. 영주 형은 공회당에서 풀빵을 구워서 팔기도 했다. 학교를 보고 이사를 왔겠으나 지금 생각하면 학생 수가 불과 200여 명에 불과했고 시골이라 어디 돈을 쓸 수 있는 애들이 없었으니 장사가 될 리가 없었다.

 

영길이 아버지가 무엇을 하신 분인지는 모르지만 이사 와서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셨다. 아버지는 영길이 아버지를 박 주사라고 부르셨다. 영길이네는 식구는 많은데 작은 가게 하나에 의지해서 살아가자니 생활에 어려움이 많았을 거다. 영길이 큰 누가가 광천중학교에 합격을 했는데 학비 때문에 포기했다고 들었다. 그때 그런 것을 알 나이가 아니었던 우리는 아주 친하게 지냈다. 영길이 바로 위의 누나가 우리 막내누나와 친했고, 그 아래 동생은 내 막내아우와 같은 나이였다.

 

영길이는 전학을 오자마자 실력을 드러냈다. 1년 반 정도 학교에 다니면서 월례고사를 볼 때마다 3등 밖으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나도 그 정도는 되었으므로 성적도 비슷했고 애가 온순해서 같이 놀기 좋았다. 영길이 별명이 하니 슨쟁이였다. 이것은 내가 붙인 별명이 아니다.

 

하니라고 우리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아래 동네에 살던 아저씨로 이름이 슨쟁이(선장이?)’라는 분이 있었다. 봄티고개 넘어가는 길가에 살았고 그 어머니가 주단장사를 하셨다. 얼굴이 조금 얽고 약간 부족했다고 한다. 그 아저씨가 말을 더듬는 경향이 있었는데 영길이가 가끔 말을 더듬을 때가 있어 그런 별명을 얻었다.

 

우리가 만나서 친구로 지낸 것은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영길이 하고는 속마음을 터놓을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늘 우리 집에 놀러 와서 같이 지냈으며 콩 한쪽도 나눠 먹을 정도였다.

 

우리가 4학년이 되던 해 봄에 영길이네는 다시 홍성으로 이사를 갔다. 영길이네가 이사를 간 뒤에 공회당으로 이사를 온 것이 은복이네다. 이사를 갔으니 영길이도 홍성으로 전학을 갔다. 영길이네가 전학을 가고 한 보름도 안 돼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때 표현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으니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어디 부고를 할 겨를도 없어 영길이네도 알리지 못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닷새인가 지나서 영길이 아버지가 어디서 소식을 들으셨는지 찾아 오셔서 조문을 하고 가셨다. 그것이 영길이네와 알고 지낸 마지막이었다.

 

내가 영길이와 얼마나 편지를 주고받았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전학을 가고 몇 번은 편지가 오고 갔었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워낙 가깝게 지낸 사이라 이사를 갔다고 해서 그냥 잊고 지내지는 않았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영길이는 내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져 갔다.

 

직장에 다니면서 고등학교 친구들을 자주 만나지 못하였다. 친구들은 사방에 흩어져 있고 나 또한 홍성에 내려갈 일이 별로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번은 천안에 있는 용대가 홍성 상가(喪家)에 다녀왔다고 하면서 1회 졸업생인 박영길이 부친상(父親喪)이었다고 했다.

 

천안에 있으면 홍성이 멀지 않기 때문에 동문들 일에 안 다니기는 어려운 일이라 그런가보다 했더니, 나더러 '박영길이를 아냐?'고 물었었다. 그래서 나는 1회는 잘 모른다.’고 말했더니 홍성 출신으로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여 홍성 검찰청에 과장으로 근무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동문에 그런 사람도 있나 생각했지 그 박영길이가 어렸을 적의 그 영길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옛 기억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그러나 눈앞의 박영길이는 이미 하니 슨쟁이가 아니었다. 어색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고향친구 같은 생각은 안 들었다. 그래 아무리 무심했어도 어떻게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3년 동안 전혀 몰랐단 말인가……. 세월이 그만큼 간 거였다.

 

대전에서 근무한다는 얘기를 들었고, 나는 교직에 있다는 얘기를 했다. 나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했다. 동문모임에 나가 단편적인 얘기는 조금씩 들었던 모양이다.

 

오 헨리(본명 : William Sydney Porter)의 단편 20년 후를 보면, 친했던 친구 사이에 20년 뒤에 만나자는 약속을 지키러 갔다가 지명수배자로 체포되는 친구 이야기가 나온다. 20년이면 강산이 변할 시간이라고 했는데 나와 영길이는 30년을 넘어서 만났으니 강산이 변했어도 한참은 변했을 시간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 긴 시간이 지난 뒤에 아무 문제없이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일지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자주 하는 얘기가 같은 학교를 나온 동문이라도 서로 자주 만나지 못하면 얼굴을 잊어 버려 길에서 싸움이 일어나도 알 수 없다는 거다. 그게 농담 삼아 하는 얘기지만 누구도 아니라고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도 오랫동안 잊고 지냈으니 나을 것도 없지만, 고등학교 다닐 적에는 학교 일에 많이 앞장 선 나를 영길이가 몰라보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이것은 내 속 좁은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뒤에는 다 잊혀지기 마련인가 보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평생 기억할 수 있는 친구라 생각했는데 세월이 두 사람의 사이를 너무 벌려 놓은 것 같다.

 

그날 술잔을 몇 번 부딪히기는 했지만 예전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혹 만난 장소가 고등학교 교정이 아니고 술집에서 단 둘이 만났다면 또 달랐을지도 모른다. 동문모임이라 우리 둘만 얘기하기도 그랬고 또 서로 말을 건네기도 영 어색했다. 게다가 나는 명함도 없는 사람이고 흔한 휴대폰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영길이에게 줄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영길이도 어색해서 그랬는지 다음에 다시 만나자는 얘기가 없었고, 명함도 건네지 않았다. 나는 은사님들 앉아계신 곳에 가서 여러 은사님이 주시는 잔을 받다가 취해서 자리를 떴고 그 후로 영길이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