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8. 17:07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박완서 님이 쓴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나오는 싱아를 우리 마을에서는 쉬엉이라고 불렀다. 어릴 때, ‘달래 먹고 달려가고 쉬엉 먹고 쉬어가자’는 말이 있었는데 우리도 쉬엉은 많이 먹었다. 우리 약방 밭 덤불 둑에 쉬엉이 많이 자생하여 돌을 몇 개 거두어 내면 뽑을 수 있었다. 아주 뿌리까지 캐는 것은 아니지만 뿌리줄기를 먹으니까 웬만큼 잘라내어야 먹을 것이 있어 돌을 들어내며 캐냈다.
아이들은 쉬엉 줄기가 땅 밖으로 노출된 것보다 땅속에 들어 있는 것을 좋아했다. 쉬엉은 신맛이 무척 강해서 먹고 나면 입맛을 다시며 다시 씹어야 했다. 달래는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찬으로 먹는 것이라 실제로는 여자애들이나 캐는 거였다.
찔레순도 어릴 때는 많이 잘라 먹었다. 사람 눈에 잘 안 띄는 곳에 있는 것들은 제법 굵게 자랐고 잘라서 먹으면 단맛이 강한 것은 아니어도 조금은 구미가 당겨 씹는 맛도 있었다. 더러는 머루넝쿨 순도 잘라서 먹었다. 이것도 신맛이 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봄이 되면 산에 가서 진달래꽃을 먹었다. 책에서 보면 화전(花煎)이라고 하여 진달래꽃을 위에 놓고 부친 부침개 얘기가 많이 나오지만 우리 고장에서는 이런 것은 보지 못했고 그저 조무래기들이 산에 가서 손으로 훑어 먹는 정도였다. 진달래가 지고나면 얼마 뒤에 피는 아카시아꽃잎도 먹었다. 아카시아꽃잎은 진달래보다 훨씬 달착지근해 밀가루를 넣고 쪄서 먹기도 했다.
우린 그 시절에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먹었다. 논에 자생하는 꼴꼬랑이라고 하는 잡초 뿌리도 캐서 먹었고, 덤불 가에 나는 돼지감자도 캐서 먹었다. 무슨 맛이 있어 먹은 것이 아니라 그냥 먹는 것이라니까 먹은 거다.
봄이 되면 나물을 많이 먹었다. 나물은 그냥 먹는 게 아니라 다 반찬으로 먹었는데 가장 많이 먹은 것이 쑥이다. 냉이와 씀바귀도 자주 먹었지만 오서산에는 산나물이 많이 나서 산에서 뜯어다가 먹은 것도 많았다. 많은 종류의 산나물을 먹었지만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많다는 게 아쉬운 일이다. 삶아서 무쳐 먹는 것들이라 대부분 밥상 위에서만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에도 나물이나 채소류보다 고기를 더 좋아해서 나물류를 많이 먹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나물류를 무척 좋아하시어 집에 많은 나물들이 들어왔지만 나는 그 맛을 몰랐다. 나중에 군에 가니까 내가 집에서는 쳐다보지도 않던 것들을 맛이 좋다고 먹어서 나도 많이 먹게 되었다. 내가 조교로 있던 80년과 81년에는 두릅을 정말 많이 먹었다. 내가 아는 곳에 두릅나무가 많아 훈련을 나갔다가 한 자루 따가지고 와서는 애들 시켜 데쳐 가지고 고추장을 사다가 술안주로 먹었다.
나물 중에 가장 맛이 있기는 누가 뭐라 해도 옻나무 순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먹어 본 것 중에서는 옻순이 제일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 옻순을 목숨 걸고 먹었다.
옻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옻을 타는 사람은 몸이 부어오르고 가려움증에 시달리는데 심한 사람은 죽을 수도 있다고 들었다. 옻을 타는 사람이 옻순을 먹고 잘못되어 몸속에서 옻이 오르면 살릴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실제로 죽은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런 말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번 먹어 본 옻순이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옻순의 맛을 아는 사람은 목숨을 걸고 먹는다는 얘기가 전혀 틀린 것이 아니라고 할 만큼 옻순은 맛이 있었다. 그렇게 고소하고, 그렇게 순한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내가 옻순을 처음 먹어 본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그 전에는 아버지가 다 드신 것인지 아니면 위험하다고 내게는 주지 않으셨는지 모르지만 먹어보지 못했었다. 내가 옻을 타는지 잘 모르고 먹었더니 먹고 나서 옻이 올라 심하게 고생을 했다. 손으로 만진 부위는 다 옻이 올라 벌겋게 부어오르고 가려워서 견디기가 힘들 정도였다.
옻이 오른 데는 밤나무 껍질을 삶아서 그 물을 바르면 낫는다고 해서 그것도 해 보았고, 닭의 피를 바르면 쉽게 낫는다고 해서 그것도 해 보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낫지 그런 것을 몸에 바른다고 낫는 게 아니었다.
성벌과 광제 사이의 밭이 있는 들판을 옻밭들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거기에 옻나무가 많았을 것으로 짐작이 되나 내가 어릴 때는 큰 옻나무는 없고 작은 것들만 있었다. 이것들은 해마다 밭주인들이 베어내서 크게 자랄 수가 없었다. 옻나무는 그 진액을 받아 약으로 쓴다고 하나 우리 마을에서는 그럴 만큼의 옻은 나지 않았고, 사람들이 봄에 옻순을 먹거나 가을에 나무를 잘라다가 옻닭을 해먹는 정도였다.
우리 마을에서 옻순이나 옻나무에 관심을 가지고 열을 올렸던 아이는 나하고 아우인 용주뿐이었다. 어른들이야 다 알아서 드셨겠지만 어린 나이에 옻순을 따거나 옻나무 껍질을 벗기러 다닌 것은 우리 둘뿐이었다고 기억한다. 옻나무 껍질은 옻닭을 해 먹기 위해 벗긴 거다.
5학년 때 옻순을 먹고 고생을 많이 하고서도 나는 옻순의 맛을 잊지 못해 해마다 봄이 되면 아주 멀리까지 옻나무 순을 따러 돌아다녔다. 옻순을 따면 손에 옻의 진액이 시커멓게 묻어 며칠씩 지워지지 않는데 그러고 나면 다시 온 몸에 옻이 올라 일주일이 넘도록 고생을 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옻순이 있다고 하면 어디든 가서 따 가지고 왔다. 이렇게 한 삼년하고 나니 옻도 면역이 생기는지 그 뒤부터는 옻이 오르지 않아 마음 놓고 먹었다.
이 옻나무 순과 비슷한 것이 죽나무 순이다. 죽나무는 우리 집 담장 가에도 크게 자란 것이 몇 그루 있었다. 죽나무는 옻나무와는 많이 다른 나무이나 그 잎은 큰 차이가 없었다. 생긴 것은 비슷해도 죽나무 순은 옻순보다 맛이 훨씬 떨어져, 집에 있어도 잘 먹지 않았다.
죽나무 순도 삶아서 무쳐 먹지만 그 냄새가 싫어서 좋아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다른 위험이 없고 집에 나무가 있어 따기도 쉬워 집에서 많이 먹었다. 죽나무 순은 조금 자란 뒤에 삶아서 말려 두었다가 정월보름에 튀각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취나물은 군에 가기 전까지는 날로 먹는 것인 줄 몰랐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수리취라고 하여 가을에 뜯어 말렸다가 떡을 할 때 쓰는 것이 있어, 나도 할머니가 수리취를 뜯으러 갈 때 따라 갔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취나물은 그 종류가 여럿 있었다.
오서산에 지천으로 있던 취나물은 뜯어다가 삶아서 말려 겨울이나 봄에 먹었다. 그렇게 먹던 취나물을 군에 가니까 그것으로 쌈을 싸서 먹어 놀랐었다. 오서산 아래서는 가을이 되면 구절초도 뜯으러 다녔다. 늘 할머니를 따라 갔지만 가을에는 산에 가면 먹을 것이 많아 할머니보다 내가 더 가고 싶어 했었다.
어릴 때는 더덕을 잘 몰랐다. 할아버지가 사시던 집 울타리 아래에 더덕넝쿨이 몇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라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대신 우리 어릴 때는 산 아래에 가서 도라지나 잔대를 캐어 먹었다. 도라지는 그냥 먹으면 아린 맛이 있어 싫었지만 잔대는 아리지 않고 얕은맛이 있어 좋았다. 잔대는 용배 산이나 앙산 아래 큰 둑에도 많아 괭이만 가져가면 캘 수 있었다.
군에 가서 보니 잔대나 도라지는 아예 눈길도 안 주고 다 더덕만 캐려고 해서 놀랐지만 더덕을 먹어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군에 가서 알게 된 더덕이지만 나는 더덕을 쉽게 발견했고 잘 캐어 내가 캐낸 더덕도 무척 많은 양으로 우리 중대장 사모님이 아주 반겼다.
산에서 자생한 더덕은 밭에서 기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맛이 좋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시우 수필집 > 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밤 가는 줄 몰랐다 (0) | 2012.02.28 |
---|---|
칡인가 칡뿌리인가 (0) | 2012.02.28 |
보리밭에 들어가지는 못했어도 (0) | 2012.02.28 |
봄밤의 단골손님 (0) | 2012.02.28 |
새는 (0) | 2012.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