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8. 17:00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장곡으로 학교 다닐 때는 신작로가 아닌 산길을 이용하면 시간이 조금 단축되었다. 빈정골을 넘어 소라실 고개 앞으로 가거나, 방깔미를 넘어 소라실 고개 앞으로 나가고, 아니면 꽃밭골 뒤로 빠져 계속 등성이를 타고 줌뱅이 뒤로 해서 도산리 뒷길로 빠지는 길이 있었다. 지금 그 길들은 아무도 다니지 않아 흔적조차 희미해졌지만 예전엔 학교 애들이 신작로보다 그 길을 더 많이 다녔다. 3월은 날이 추우니까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집으로 오갈 때 한눈 팔 일이 없지만 4월 중순이 넘어가면 애들 마음 뺏는 많은 것들이 산길에 있다.
시금털털한 맛밖에는 느낄 수 없었지만 진달래꽃을 한 움큼 훑어 입에 넣고 씹었으며, 삐비(삘기)를 뽑아 씹으면 그 달착지근한 여운 때문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다른 지역에도 있는지 모르지만 굴뚝삐비도 훑을 만 했다. 게다가 눈치 빠른 아이들은 찔레순도 꺾어 먹을 수 있었다. 이런 재미있는 일들이 많아서 집에 올 때는 의레 산길을 택해서 다녔다.
5월 초가 되면 새들이 알을 낳을 때가 된다. 실제 이름은 정확하지 않은데 우리가 골리새(요즘 책을 찾아보니 이 새의 이름은 휘파람새인 것 같다)라 부르던 새가 가장 만만했다. 이 새는 그리 크지 않은 소나무 속에 집을 지어서 나무에 오르지 않고도 새집을 찾을 수 있어 좋았다. 새가 알을 품을 때는 찾기가 쉽지 않다. 나뭇가지 속에 교묘하게 숨어있는 새집은 아무리 찾아도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러나 알에서 깨어 나오면 새집을 찾기가 수월해진다. 우리들이 새집을 찾으려고 돌아다니면 어미 새가 불안에 떨며 자기 집이 있는 근처에 높이 떠서 소리를 지르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이라 해도 그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새가 높이 떠서 소리를 지르는 아래 부근을 샅샅이 찾아본다. 그러면 새 새끼도 어미 소리에 따라 자기 소리를 내기 때문에 아이들이 쉽게 새집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 새 새끼들은 대부분 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솜털에 싸여있고 눈도 뜨지 못한 것들이었으나 이것들을 꺼내다가 집에서 기른다고 가져와 대부분 죽이고 말았다. 이것은 우리 저학년들 얘기고, 고학년들은 이런 어린 새 새끼들은 가져오지 않았다.
나보다 4년 선배인 영세 형이 새 잡는 데는 거의 도사였다. 이 형은 새끼가 웬만큼 자라, 날 때쯤의 새를 주로 잡았다. 새집 속에서 어미가 물어다주는 모이를 먹으며 자라던 새끼들은 한 달쯤 지나면 제법 날 만큼 자란다. 이렇게 큰 새끼들은 하늘을 나는 연습을 하는데 영세 형은 이때를 노리는 거였다. 제 집에서 나와 조금씩 나는 새들을 긴 막대를 휘두르며 쫓아다니면 몇 번 도망 다니다가 지쳐서 떨어지게 된다.
난 새 잡을 때, 영세 형만 따라다녔다. 영세 형은 골리새 말고 물새를 잡는데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 새는 나중에 알고 보니까 물새가 아니라 물총새였다. 물총새는 나무에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숲 속의 낭떠러지 위에 구멍을 파고 알을 낳았다.
새가 구멍을 판 것이 아니라 뱀 구멍 같은 곳을 이용한 것일 게다. 비록 남의 구멍을 이용한다 해도 스스로 안전하게 높은 곳에 위치한 곳에 집을 지었으므로 무등을 타고 올라가 구멍에 손을 넣어 새를 잡아야 했다. 그런데 이것은 좀 위험한 일이었다. 잘못되면 뱀이 들어있는 구멍에 손을 넣어 뱀에게 물리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세 형은 그런 실수가 전혀 없었다. 물론 아무나 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영세 형 얘기를 들으니 물총새가 있는 구멍은 물고기 비린내가 나기 때문에 그 구멍이 새집인지 아닌지 알 수가 있다고 한다. 영세 형은 새끼를 잡는 일은 하지 않았다. 손을 넣어 어미가 있으면 꺼내오고, 없으면 구멍만 확인해 놓고는 다른 곳에 더 다녀와서 다시 손을 넣는 거였다. 거의 틀림없었다. 이렇게 잡아서 얻어온 새는 다리를 묶어놓거나, 상자 속에 넣어서 기르려 했지만 다들 이틀을 못 넘기고 죽었다.
어떤 때는 산 아래 밭에 갔다가 꺼병이(꿩 새끼인데 병아리만 한 것)도 잡아올 때가 있었다. 이 꺼병이들은 어린애 주먹 정도 크기라도 얼마나 빠르게 도망가는지 잡기가 쉽지 않았다. 주로 산 위쪽으로 도망가므로 위에서 두어 사람이 막고 아래서 한 사람이 몰면 도망가다 당황해서 땅에다 머리를 쳐 박는다. 이렇게 잡아 온 꺼병이를 중병아리보다 조금 작을 때까지 키운 적이 있었는데 날개를 자르지 않아 도망가고 말았다.
갱변말 아래로 내려가면 내{川}가 넓고 물은 많지 않아 잡초가 무성한 자갈밭이었다. 무슨 작물을 가꾸는 밭이 아니라 그냥 불도저로 넓게 밀어 물이 많이 불었을 때 원활하게 흐르도록 만든 것으로 여기에는 논둑병아리가 많았다. 나는 어미 논둑병아리는 직접 본 적이 없으나 그 새끼는 많이 보았다. 꼭 병아리처럼 생겼고 등치만 작을 뿐이었다. 우리는 가끔 이 논둑병아리도 잡아서 가지고 놀았지만 오래 사는 것은 없었다.
새 중에서 생명력이 강한 것은 역시 맹금류였다. 선교네가 광제 담불에서 주워온 부엉이 새끼는 죽지 않고 제법 크게 자라 산으로 날려 보낸 적이 두어 번 있다. 이 부엉이 새끼는 개구리를 잡아다주면 스스로 찢어 먹어서 우린 가끔 구경하러 가기도 했었다. 토끼를 키우던 곳에 넣어두고 길렀지만 다른 새들처럼 쉽게 죽지 않았다.
우리가 어릴 때 잡아다가 죽인 새들이 무척 많아서 그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다. 새를 죽이려고 잡아 온 것은 절대 아니었으나 키우려면 죽어버렸다. 하기야 거의 다 큰 새를 성냥 통 속에 넣어서 기르려 했으니 죽을 수밖에 없었겠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어디서 날아왔는지 집비둘기 한 쌍이 오서초등학교에 왔었다. 나는 그 비둘기를 갖고 싶어 몸 달았었는데 영세 형이 밤에 그것들을 잡아서 나에게 주었다. 너무 신이 나서 우리 집으로 가져 왔고 비둘기 집을 만들어 지붕 위에 얹어 놓았더니 날아가지 않고 거기서 살았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또래는 모두 신이 나서 비둘기에게 잘 해주려고 애를 썼지만, 사실 무슨 도움이 될 일은 없었고 마당에 모이만 뿌려 준 것이 전부였다.
어느 날, 무엇을 잘못 먹었는지 한 마리가 죽어버렸다. 그래서 그 비둘기를 뒷동산에 묻어 주었더니 남은 한 마리가 날마다 구슬프게 울어 어른들이 걱정하셨다. 사실인지 확인은 못 했어도 동산에 묻은 비둘기 무덤에 가서 운다는 얘기까지 떠돌고 밤에도 계속 울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머니께서 머슴 아저씨에게 지붕에 있는 비둘기 집을 치우라고 하셨는데 밤에 집을 치우면서 자고 있던 비둘기를 잡아먹지 않았나 싶다. 물론 내가 먹은 것은 아니고 사랑방에 모이는 아저씨들끼리 안주를 삼아 드셨을 거다. 내게는 잡아먹지 않았다고 그러셨지만 비둘기가 집이 없어졌다고 하루아침에 날아간단 말인가?
우리가 했던 새 잡기와는 다른 것이지만 언젠가 건만이 형이 뜸부기를 잡아 온 적이 있었다. 뜸부기는 약으로 쓰던 것으로 논의 벼 포기 속에 집을 지었고 거기서 새끼를 까고 길렀다. 그 집을 발견하면 밤에 조용히 다가가서 그물을 씌워 잡아 온다고 들었다. 그렇게 잡아다가 얼멩이 속에 넣어 둔 것을 내가 가지고 논다고 얼멩이를 들었더니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힘들게 잡아온 것을 순간의 실수로 날려버렸으니 참 무안했다.
지금은 오서산 아래에 새 잡을 아이도 없고 새 잡는 어른도 없을 것이다. 이제 아이들은 새가 아니라도 가지고 놀 것이 많은데다가, 자연보호 차원에서도 새를 잡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워즈워드의 시 「뻐꾸기에 부쳐」에 나오는 내용처럼 신록이 무르익어 갈 때 산 속을 헤매던 일이 내게는 많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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