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고등학교로 오다

2012. 3. 20. 20:49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업 문제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대학원을 진학하기 위해 시험을 보기는 했지만 대학원은 일주일에 두 번만 나가면 되니까 어디든 자리를 구해서 먹고 살 방편을 찾아야 했다. 그 당시에도 인문학과에서 취업을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부분 상경계열을 뽑았고 어쩌다가 인문계열을 모집하는 곳은 영업직이 전부였다.

 

내가 시험을 본 곳은 모두 세 군데였다. 가장 먼저 시험을 본 곳이 한화이다. 그때는 한화가 아니라 빙그레였다. 우선 서류 전형에서 인문학과도 가능하다고 해서 원서를 냈다. 빙그레 계열회사 임직원의 추천서가 필요하다고 해서 기숙사에서 알고 지낸 천안 출신 미숙이의 아버지 추천서까지 받아다가 제출했다.

 

서류전형에 합격을 해야 면접시험을 볼 수 있는데 발표 날짜가 되어도 소식이 없어서 떨어진 줄로 알았었다. 그때 마침 대전에서 재진이가 약혼을 한다고 초대를 하여 용인이와 대전에 가서 하루 자고 왔더니 학교 기숙사로 서류 전형에 합격을 했으니 일요일에 필기시험을 보러 오라는 전갈이 왔던 모양이다.

 

내게 연락을 취하려고 아는 사람들에게는 다 전화를 하고 시골집에까지 연락을 했으나 결국 연결되지 못해서 시험을 보러 가지 못했다. 같이 기숙사에 있던 기계과의 동호가 엄청 몸이 달아 백방으로 수소문했다고 한다. 기숙사에 저녁 때 들어왔으니 이미 흘러간 물이 되고 말았다. 다음 날 빙그레 본사로 찾아가서 항의도 해봤지만 다시 기회가 올 리가 없었다.

 

그 다음으로는 서울시내 사립중등학교 교사 임용시험을 보았다. 우리가 졸업을 하던 해는 공립학교 임용고사가 없었고 사립학교 임용고사만 있었다. 사립학교에서 교사 채용에 비리가 많다고 하니까 사립도 공립처럼 임용고사로 선발하여 합격한 사람만 임용하는 것으로 협의가 되어 내가 그 1기로 시험을 봤다.

 

서울 마포고등학교에서 시험을 봤는데 전공과목과 교직과목이 전부였다. 시험을 크게 잘 보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남들만큼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믿는 구석도 있었다.

 

시험을 쳐 놓고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에 유한양행에 시험을 보러 갔었다. 유한양행은 제약과 펄프를 생산하는 곳으로 거기 가봐야 영업직이었지만 대우가 상당히 좋다고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곳 중의 하나였다. 서류 전형에서 합격을 한 뒤에 필기시험을 봤지만 떨어지고 말았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필기시험이다. 특히 객관식이 아닌 긴 답안 작성은 아무리 잘 해도 점수가 잘 나오지를 않아 그런 시험이라면 치루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거기는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떨어졌어도 실망하지 않았다. 대학원 합격자 발표가 날 때까지는 대학원에 진학하면 최소한 조교라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당연히 되리라 믿었던 대학원 시험에서 떨어진 것은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혼자서는 전혀 술을 마셔 본 적이 없는 내가 합격자 발표하던 날 혼자서 술집에 갔었다. 만두와 순대를 파는 집으로 아직 안주가 준비가 되지 않아 조금 기다려야 했다. 혼자 가서 그러는 것도 청승맞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안쪽에 앉은 여학생이 대학원에 합격했다고 사방에 전화를 하는 거였다. 마음이 더 언짢아져서 술을 마시지 않고 그냥 나와 버렸다.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이제 믿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은 임용고사를 합격하는 것밖에 없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시험은 자신 있어 했었다. 왜냐하면 처음 실시한 사립학교 임용고사에 이미 시험 전부터 상당한 점수를 따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누가 그런 제안을 해서 결정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400점 만점 중에 고등학교 점수가 100점이고 대학 점수가 200, 그리고 시험점수가 100점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성적이 취업 시험에 반영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으나 이미 좋은 성적으로 졸업을 했기 때문에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비록 시골의 고등학교지만 나는 거기서 문과 수석으로 졸업을 했다. 대학도 국문과를 수석으로 졸업을 해서 이미 300점의 점수로만 본다면 상위 1% 안에 충분히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시험에서 큰 실수만 없다면 쉽게 합격을 하리라고 믿고 있었고 또 시험에서 다른 사람들과 크게 차이가 날 것도 없었다.

 

임용고사 합격자를 동아일보에 발표했는데 이름이 나온 것이 아니라 수험번호로 나왔다. 나는 거기서 내 번호를 찾을 수 있었다. 합격을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합격을 확인하니 무척 흐뭇했다. 바로 가서 합격증을 찾아왔다.

 

합격자 발표가 있던 다음 날부터는 이 학교, 저 학교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난리였다. 먼저의 경험을 교훈 삼아 연락처를 결혼을 앞에 둔 처가로 해 놓았었다. 당시는 몰랐지만 나중에 들으니 임용할 교사의 3배수를 합격시켰다고 한다. 그 숫자가 123명이었으나 남자는 21명밖에 안 되었으니 서로 먼저 남자 교사를 확보하려고 난리였다. 맨 처음 면접을 보러 갔던 곳이 서라벌고등학교였고, 이어서 성신여중, 숭의여고 등에서 연락이 와 가서 면접을 보고는 영일고등학교로 갔다.

 

영일고등학교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물었더니 당시 교감 선생님이 상세하게 설명을 해 주셨다. 듣고 보니 내가 대학 1학년 때 기거했던 누님 댁 근처였다. 저녁때에 학교에 도착하여 교감 선생님께 서류를 제출하고 간단한 질문에 답변을 하고는 집으로 갔다.

 

나중에 다시 미비한 서류를 준비해 오라고 연락이 왔을 때, 나는 설이라 시골에 가 있어서 장인어른이 대신 가서 제출하고 오셨다. 그때 장인어른이 보니 교문 안쪽에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 서강대 합격자 이름이 백 명을 훨씬 넘더라고 하시면서 꼭 영일고등학교로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서류전형에서 합격을 하여 최종 면접을 보러 갔더니 퇴임을 앞에 둔 교장 선생님과 이사장님이 계셨다. 먼저 질문이, ‘아이들을 잘 다룰 수 있겠냐?’는 것이어서, 군대 훈련소 조교를 해서 자신 있다고 말씀 드렸다. 교감 선생님은 내 이력서를 보시고 내가 고등학교 및 대학 성적이 아주 우수했고 장학생으로 기숙사에서 생활했다는 것에 아주 후한 점수를 주셔서 아주 흡족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최종 면접을 마치고 돌아 온 뒤에도 수도전기공고, 명덕고등학교, 동명여고, 서울여상 등에서 계속 서류를 제출하라는 연락이 왔었다. 그래서 불합격이 되면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하며 더 이상 면접을 보러 다니지는 않았다. 영일고등학교에 될 것이라는 생각을 웬만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대가 헛되지 않아서 영일고등학교로부터 최종 합격이 되었다고 서류를 준비해서 제출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렇게 해서 내가 영일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영일은 신흥 명문 고등학교로 잘 나가고 있었다. 학교를 세울 때는 근처에 국군통합병원 밖에 없는 농촌이었으나 10여 년이 흐르는 사이에 집들이 들어서고 개천이 복개되고 하면서 완전히 변모를 했다고 한다. 내가 왔을 때가 10회 학생이 3학년일 때다.

 

처음 3년은 특지 학교라 하여 서울시내에서 연합고사에 떨어진 학생이 입학하는 곳이었지만 4회부터는 정상적으로 일반 학생을 배정받았다. 그러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7, 8회 때는 서울대학교에 40~50명을 합격시켰고 상위권 대학에 많은 학생을 진학시켜 다른 학교들을 놀라게 했다.

 

내가 영일고등학교에 있다고 하면 다들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때가 그때였다. 훌륭하신 선생님들과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 그리고 그 뒷바라지를 해주는 학부모가 있어 아무 잡음이 없이 영일고등학교가 잘 나가고 있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점점 지역 평준화가 되고 학교에 오는 아이들의 지역이 변하면서 예전의 명성에는 조금 못 미쳤지만 영일은 오랜 시간을 강서지구 최강자로 군림하였다. 그 좋은 시절에 내가 함께 했다는 것이 내게도 큰 기쁨이고 보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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