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탑과 다보탑

2012. 3. 20. 20:58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내가 수필가로 존경하는 분은 윤오영 선생과 피천득 선생 두 분이다. 좋은 글을 남긴 수필가도 많고, 성공을 거둔 수필가도 많지만 나는 수필이라는 글을 떠 올릴 때마다 수필가로는 이 두 분이면 더 얘기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사람 많은 자리에서 이 두 분과 함께 내가 한국의 3대 수필가가 되겠노라고 공언을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분위기에 흥분이 되서 말한 객기였다. 솔직히 내 욕심으로야 그렇게 하고 싶지만 어디 감히 두 분과 나란히 하겠다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있겠는가? 너무 과한 욕심이라는 것을 내 스스로 안다.

 

나는 두 분을 우리나라 석탑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다는 석가탑과 다보탑에 비유하고 싶다. 내가 생각하기엔 윤오영 선생이 석가탑이고 피천득 선생이 다보탑이다. 어려서는 다보탑이 훨씬 더 멋있게 보였다. 단순하게 보이는 석가탑보다 화려한 다보탑이 좋아서였다. 석가탑은 너무 밋밋하여 아무런 멋이 없어 보였고, 다보탑은 탑의 치장이 아름다워 더 나은 것 같았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두 탑은 서로 어느 것이 낫다고 말하기 어려운 난형난제(難兄難弟)라고 했다. 석가탑은 단순하지만 아주 세련되고 균형미가 뛰어났고, 다보탑은 섬세하고 치밀한 선이 돋보인다고 한다. 다보탑이 국보 20, 석가탑이 국보 21호다.

 

윤오영 선생을 네이버(http://search.naver)에서 지식 검색으로 찾아보았다.

 

윤오영(尹五榮, 1907~1976) : 수필 창작과 이론전개에 힘써 현대 수필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수필가이다. 호는 치옹(痴翁동매실주인(桐梅室主人)이다. 1907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경기도 양평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1928년 양정고보(養正高普)를 졸업했으며, 보성고보(普成高普)에서 20여 년 동안 교직생활을 했다.

 

1959년 문학잡지인 현대문학에 수필 측상락(厠上樂)을 발표한 이래 본격적으로 수필을 쓰기 시작해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아름다운 수필을 많이 발표했다. 50세가 지난 후 수필을 발표하기 시작해 20여 년 동안 수필과 평론을 끊임없이 발표해 필봉에 신이 들었다고 할 정도로 문단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달밤,방망이 깎던 노인,마고자,양잠설,온돌의 정,곶감과 수필등 주옥같은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19723월에 창간된 수필문학수필문학의 첫걸음수필문학강론을 연재하고, 이론서인 수필문학입문등을 통해 수필문학관을 피력하며 수필문학의 이론정립에도 힘을 기울였다. 수필은 문학의 한 장르이므로 잡문이나 만필(漫筆)과는 구분되어야 하며, 타 장르의 작가들처럼 습작과 문장수련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197410여 년 동안 발표한 작품을 엄선해서 첫 수필집 고독의 반추를 출판함으로써 한국 수필문학의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했다. 주변의 모든 사물을 동양고전의 세계에 접합시켜 독특한 정취를 이룬 작품들은 전통에 연결된 우리 글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실증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내간체의 특장을 잘 살린 간결하고 절제된 문체와 시각적 이미지가 빼어난 서정적인 문장은 여백의 함축미가 돋보이는 개성적인 작품세계를 이루어낸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저서에 수필문학강론, 수필문학입문등의 이론서와 수필집 고독의 반추, 방망이 깎던 노인, 조약돌등이 있다.

 

피천득 선생을 역시 네이버(http://search.naver)에서 지식 검색으로 찾아보았다.

 

피천득(皮千得, 1910.5.29~ ) : 호는 금아(琴兒). 1910529일 서울에서 태어나 중국 상하이(上海) 공보국 중학을 거쳐 1937년 호강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때 경성중앙산업학원 교사로 근무했고, 8·15광복 직후인 1945년 경성제국대학 예과교수를 거쳐 1946~1974년까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46년 서울대에서 영시(英詩) 강의를 시작, 1954년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하버드대학교에서 1년간 영문학을 연구하였으며, 1966년 서울대 대학원 학생과장을 역임했다.

1930신동아서정소곡(抒情小曲)을 처음으로 발표하고 1932동광에 시 소곡(小曲)(1932), 수필 눈보라 치는 밤의 추억(1933) 등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다. 대체로 투명한 서정으로 일관, 사상·관념을 배제한 순수한 정서에 의해 시정(詩情)이 넘치는 생활을 노래하였다.

 

그의 문학세계는 시보다 오히려 수필을 통해 진수가 드러난다. 생활에 얽힌 서정적이고 주관적·명상적인 것을 소재로 삼는 그의 수필은 섬세하고도 다감한 문체로써 서정의 세계를 수필화하고 있다. 대표적 수필로 1933~1934년에 발표한 눈보라 치는 밤의 추억, 기다리는 편지, 은전 한 닢등이 있다. 그 외에도 특히 수필은 수필 형식으로 쓴 수필론으로, 은유법을 적절히 구사해서 수필의 본질과 특질을 잘 나타낸 그의 대표적 작품이다.

 

이밖에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토머스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의 시구를 부정하면서 봄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 지휘자보다 무명의 연주자를 택하겠다는 플루우트 연주자, 영국 대사관에서의 엘리자베스 여왕 생일 축하 가든파티에 참석한 소회(所懷)를 쓴 가든 파아티, 성모 마리아상과 같은 구원의 여인상을 찾는 구원의 여인상등 수많은 수필 작품이 있다.

 

나는 이 두 분이 친구였다는 사실에 놀랐다. 윤오영 선생이 피천득 선생보다 세 살이 위지만 서로 친구로 지냈음이 두 분의 수필에 나온다. 두 분은 서로 공경하며 지내신 사이였다.

 

두 분이 어느 해인가 창덕궁 비원에서 우연히 만나셔서 피 선생님이

우리가 가을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볼 수가 있을까?”

라고 물었을 때, 윤 선생님이

앞으로 그리 길지 못한 가을이나마 또 몇 번이나 이렇게 둘이 한가하게 즐길 수 있겠소?”

하고 웃었다고 한다.

 

그 해가 몇 년도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윤 선생님이 돌아가시고도 피 선생님은 30년을 더 살고 계시다. 피 선생님이 장수하시는 비결은 술과 담배를 즐기지 않으셔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윤 선생님도 술을 크게 즐기시지는 않았지만 술자리를 마다하지는 않으신 것 같고 담배도 즐겨 피셨다.

 

윤오영 선생의 수필 중에는 피천득 선생의 회갑을 축하하는 수금아회갑서(壽琴兒回甲序)가 있고, 피천득 선생의 수필 중에는 윤오영 선생의 얘기를 쓴 치옹(痴翁)이란 글이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뛰어난 수필가 두 분이 서로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이 경이롭고 서로를 무척 위해주는 마음이 가득했다는 것이 더 없이 반갑다. 수필을 쓰는 데에 무슨 경쟁의식이 있겠는가? 그런 얘기는 호사가들의 입에나 오르내릴 일이지만 두 분에게는 그런 얘기조차 없다는 것도 흐뭇한 일이다.

 

내 비록 두 분과 일면식도 없고 까마득한 후학이지만 내 스스로는 두 분 선생님이 내게 좋은 스승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앞으로 수필을 쓸 욕심을 가지고 있으니 두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분들의 수필에 버금가는 좋은 글을 꼭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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