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만에 깨어난

2012. 3. 20. 21:08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문태진을 만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7, 8년 전 어느 초가을에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느라 좌석버스를 탔다. 그때만 해도 55, 66번 좌석버스가 학교 앞에서 광화문으로 다니고 있었다. 버스가 인공폭포를 지날 때, 어떤 장애인이 글자가 적힌 엽서를 돌리며 성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흔히 있는 일이라 그런가보다 했지만 무어라 말을 하는데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갑갑해서 엽서를 읽어보니 나는 권투선수 문태진입니다. 1983년에 쓰러져서 의식불명에 있다가 14년 만에 깨어났습니다. 후유증으로 말도 잘 못하고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내용이었다. 그 글을 읽고는 너무 놀랐다. 죽은 줄 알았는데 문태진이라니…….

 

주머니에 돈이 4,000원밖에 없었다. 교통카드를 쓸 때가 아니라 집에 갈 차비를 남겨야하겠기에 3000원을 꺼내어 내밀었다. 웃는 얼굴이 찡그러져서 이상한 모습이었지만 내가 손을 잡으며 문태진 선수, 당신을 압니다. 지금 어떻게 지내세요?” 했더니, 교회에서 지낸다고 했다.

 

그는 고맙다고 몇 번을 인사하며 교회 전도지 한 권을 내밀었다. 무어라 더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버스는 성산회관 앞에 도착하여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정말 다시 만나면 몇 만원이라도 주고 싶었지만 그 뒤로는 만나지 못했다.

 

권투를 몹시 좋아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권투 보는 것을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다.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후반까지는 권투가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이었다. 그 시절의 주간스포츠스포츠동아는 매우 인기가 있는 주간지였다.

 

그 스포츠잡지들의 표지는 항상 권투선수였다. 198212월에 우리나라는 동양챔피언 열두 체급 중 밴텀급을 제외한 열한 개 체급을 석권하고 있었다. 동양챔피언이 되면 곧 세계챔피언에 도전한다는 얘기였고 가능성도 그만큼 높은 것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권투선수는 홍수환 선수 이후부터이다. 염동균, 유제두, 김태식, 김환진, 김성준, 박찬희, 장정구, 유명우, 박종팔 등은 프로복싱에서 세계챔피언이 된 사람들이다. 세계챔피언은 못 되었어도 김득구, 정순현, 김사왕도 이름을 날린 선수이다. 나는 이 선수들이 타이틀전을 하거나 랭킹전을 할 때마다 어떻게든 그 중계방송을 보려 하였고 대부분 보았다.

 

세계챔피언전이 열리면 온 국민의 눈이 TV로 쏠렸고, 타이틀전이 아니라 해도 TV에서는 주간 프로그램으로 권투중계를 해줄 정도였다. 우리 시골 마을에서는 권투중계가 있다고 하면, 들에서 일을 하다가도 들어와 그 경기를 볼 정도였다. 국내 유명 선수뿐만 아니라 외국의 이름난 선수들까지 대부분 알고 있었고 전적도 기억할 정도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수는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알리 말고도 마빈 헤글러, 아론 프라이어, 토머스 헌즈, 알렉시스 아르게요, 로베르트 두란, 피피노 쿠에바스, 알폰소 자모라, 카롤로스 자라테, 슈가레이 레너드 등 한 시대를 풍미한 권투 선수들은 지금도 기억하고 좋아한다.

 

솔직히 권투선수 문태진은 좋아하지 않았다. 주니어라이트급 동양챔피언을 지낸 문태진은 19834월까지 3227(15KO) 31무의 전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펀치가 강한 편이 아닌데다가 아웃복싱을 해서 그리 화끈한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는 아니었다. 주니어플라이급의 김태식처럼 맞더라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치고 들어가는 선수가 더 인기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83년 여름, 8월 어느 날로 기억한다. 당시 주니어라이트급 세계챔피언이던 미국의 록키 로크리지에게 도전했던 문태진은 도전자다운 모습은 보여주지 못한 채 시종일관 피해 다니는 경기를 해서 보는 사람을 짜증나게 만들었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질 때는 지더라도 도망 다니지 말고 맞받아치는 것을 더 원한다. 어차피 이기지 못할 거면 차라리 도전하지를 말 것이지 피해 다니다 질 도전을 왜 한단 말인가?

 

그때의 세계타이틀전은 15회 경기였다. 12회까지인가 계속 피해 다니며 맞기만 하더니 한방을 제대로 맞고 그대로 TKO패를 당했다. 당사자야 더 속이 아프겠지만 더운 날씨에 중계를 본 사람들도 다 짜증스러워했다. 예전에는 세계챔피언에 도전하려면 전부 일본의 에이전트에게 의뢰를 해야 했고, 그러다보니 한참 좋은 전성기를 넘긴 뒤에야 도전이 성사가 되었다.

 

그런 상황이라 좋은 실력을 가지고도 챔피언이 되지 못한 선수가 많았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 간신히 도전권을 따내 경기를 했으면 지더라도 화끈하게 싸워주는 것이 국민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할 때다.

 

그날 저녁 뉴스에 문태진 선수가 TKO패를 당한 것이 나오면서 쓰러진 문 선수가 깨어나지 못하고 의식불명이 되어 병원으로 실려 갔다고 했다. 뉴스를 보면서 차라리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덜 창피한 일일 거라고 악담까지 했는데 그 뒤로는 소식을 들을 수가 없어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 문태진 선수가 14년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깨어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앞에 와서 그와 이야기를 한 거다. 문태진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런가보다하겠지만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 사람은 나를 전혀 알지 못하지만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비록 장애의 몸으로나마 일어났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일이었다.

 

복싱이 예전처럼 인기가 높은 스포츠라면 문태진 선수도 매스컴의 각광을 받았을지 모른다. 혼수상태에서 14년 만에 깨어났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뿐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드문 일이니 말이다. 그러나 프로복싱의 쇠퇴와 함께 그런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문태진 선수가 아직 살아 있다면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다시 만나면 주머니를 털어 몇 만원이고 주고 싶다. 예전에 악담을 한 것을 사과하고 정말 멋진 선수였다고 말해주고 싶다. 캔버스 바닥에 누운 지 14년 만에 일어선 권투 선수는 아직 없기 때문이다.

 

 

 

 아래 여러분들이 댓글을 달아주셔서 제가 생각하고 있던 문태진 선수가 제가 만난 그 사람인지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마는 제가 버스 안에서 만난 사람이 분명하게 자신이 문태진이라고 했던 건 기억합니다.

 

 저는 그때 생중계로 본 걸로 기억했는데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녹화중계였던 게 맞습니다.

 

[황현철의 복싱인사이드-13]한국 주니어라이트급 도전사

 

(2년 후인 84년에는 동양챔피언 문태진이 알래스카에서 WBA 동급 챔피언 록키 록클리지에게 11TKO패로 도전에 실패한다. 마의 주니어라이트급은 20년 동안 한국 복서의 왕좌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나와 있는데 제가 쓴 글이 문태진 선수를 비하하는 건 절대 아니고, 또 제가 겪은 일을 쓴 것이니 글을 내리지는 않겠습니다.

 

 문태진 선수가 건강하게 잘 지내신다니 더없이 반갑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좋은 나날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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