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 술집이 있었다

2012. 3. 20. 21:11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학생에게 단골 술집이 있었다고 하면 불량 학생으로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대학에 다닐 때도 단골 술집을 정해 놓고 다녔다. 남자에게 반드시 단골집이 있어야 할 것으로는 술집과 이발소, 양복점을 꼽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술집만큼은 단골집을 정해 놓고 다니는 것이 좋았다.

 

단골 술집의 개념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견해로는 외상을 먹을 수 있는 곳이 단골집이라고 본다. 요즘이야 카드가 보편화 돼서 외상을 먹을 일도 없겠지만 그때는 카드라는 것이 없었다. 카드가 없던 시절에 돈이 떨어지면 당연히 외상을 먹어야 했다.

 

학생에게 외상을 주는 곳이 흔치야 않겠지만 나는 경희대 부근 세 곳에서 외상을 먹고 다녔다. 근사한 술집은 아니었어도 어느 때나 가서 돈 없이도 마실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고 할 수는 있지만 나중에 그 외상값을 갚으려면 무척 힘이 들기도 했었다.

 

1학년 때는 우리 늦은 학생들과 재수생들이 함께 술집에 갈 때가 많았지만 2학년이 되다보니 재수생 그룹이 군에 가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끼리만 어울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때로는 교수님들을 모시고 나가 술을 마셔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술집도 조금 나은 곳으로 바꿔야하는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많이 가게 되었던 곳이다모아.다모아는 학교에서 한참 내려와서 회기역 부근에 있었다. 정확하게 분류하기는 어렵지만 방이 많고 여자가 있는 맥주집이었다. 물론 양주도 팔았겠지만 거기서 양주를 마신 기억은 없고 가면 늘 맥주를 마셨다.

 

맥주는 생맥주가 아니라 사홉 병맥주였다. 거기 여자들에게 무슨 봉사(?)를 받아 본 적도 없고 봉사료를 주어 본 적도 없지만 술을 마실 때는 아가씨들이 같이 자리를 했다. 아가씨가 곁에 앉았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그냥 곁에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

 

사실 그보다 난처한 일도 없는 일이었다. 곁에 모르는 여자가 앉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색한 일인지는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일이다.다모아는 주 고객이 대학원생과 대학교수들이었다. 그런데도 우리 국문과 상급생들이 많이 다녔다. 술값이 생맥주집 보다야 더 비쌌지만 그래도 크게 비싼 편은 아니었다. 우리 넷이 모여서는 안 다녔지만 국문과 행사가 있거나 하면 자연스럽게 그리로 갔다.

이화형 선생이 조교를 할 적에 많이 다녔다. 자주 다니다 보니 낯이 익은 얼굴도 있었다.

 

거기는 자주 다니는 국문과 학생들에게 외상까지 주어서 나도 가끔은 외상으로 마셨다. 늘 얻어 마실 수만은 없는 일이어서 어쩌다 한 번은 나도 살 수밖에 없었고 그럴 때는 외상으로 마셨다. 우리가 4학년이 되었을 때에 주인이 술집을 정리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 뒤로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내 마지막 외상값이 25,000원 정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받으러 오지 않아서 주지 않았다. 그 집이 이사를 갈 때에 국문과 출신으로 외상값을 기십만 원씩 갚은 사람이 여럿이라고 들었다. 우리 조교 선생은 교직에 나가 첫 월급을 몽땅 쓸어 넣었다고 들었다. 그게 혼자서 마신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은 내가 잘 안다.

 

다모아가 주인이 바뀐 뒤에 다니게 된 집이도림(桃林)이다.도림은 학생이 다니는 술집은 아니었다. 주로 경희대 국문과 출신의 어른들이나 우리 교수님들이 간혹 들르는 곳이었다. 경희대 출신으로 경희중·고등학교에서 근무하는 선생님들이 많이 다니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여기도 생맥주는 없고 병맥주였다. 그리고 소주도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집이라서 나는 맥주보다는 소주를 더 많이 마셨다. 하나 뿐인 방은 주인아주머니가 살림을 하는 곳으로 연세 드신 분들은 안에서 마시고 보통은 밖에서 마셨다. 탁자가 여섯 개밖에 안 되는 작은 술집이었으나 늘 사람이 북적거렸다.

회기역 바로 앞이라 여기서 술을 마시다가 전철을 타기가 좋았다. 내가 2학년이 되었을 때부터는 기거하는 곳이 석관동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도림에서 술을 마시면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여기서도 외상은 언제나 통했다.

 

내가 가깝게 지내는 여자 후배들하고 자주 드나들었더니 나중에 결혼한 집사람을 보고 아주머니가 깜짝 놀랐다고 한다. 늘 같이 다니던 사람이 아니어서 그랬다고 한다. 나와 가까이 지낸 사람으로 도림에 안 가봤다면 그것은 가짜다.

 

이 집에 즐겨 갔던 것은 안주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쇠머리를 삶은 고기를 내어 놓았는데 기름을 뺀 편육이 아니라서 그냥 숭덩숭덩 썰어서 내었다. 식으면 맛이 떨어졌지만 데워서 내왔고 한 접시 가지면 소주 두세 병이나 맥주 대여섯 병은 마실 수 있었다. 우리끼리 가서 교수님들을 뵈면 조금 어색하기도 했지만 그 안주 맛에 자주 다녔다.

 

아주머니가 조금 수다스런 것이 흠이긴 했어도 이 집은 내가 무척 많이 다닌 곳이다. 경희대 국문과 교수님들이 처음 다닐 때는 아주머니도 한창 젊었었다고 들었다. 노강 선생님, 황순원 선생님께서도 자주 다닌 곳이라고 하니 꽤나 오래 된 집이었다.

 

그 밖에 자주 다니던 몇 집이 있지만 가장 많이 다닌 곳은 회기시장 안에 있는 순대국집이었다. 청주가 고향이라는 아주머니는 도림 아주머니보다도 더 수다스러웠지만 안주를 아주 푸짐하게 주셨고 특히 내가 가면 더 많이 주어서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었다. 여기는 교육대학원에 다닐 때도 많이 다닌 집이다.

 

소의 혀는 우설(牛舌)이라고 해서 상당히 높게 치지만 돼지 혀는 따로 떼어서 나오지도 않는다. 대부분 사람들은 혀라고 하면 그게 고기가 얼마나 나올까 생각하지만 혀만 싹둑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혀뿌리까지 따라오기 때문에 한 접시 수북하게 나온다. 나는 이 돼지 혀를 무척 좋아했다. 그리고 돼지 염통도 먹을 만해서 순대국집에 가면 혀와 염통을 시켜서 먹었다.

 

내가 결혼하던 날, 순대국집 아주머니가 하객으로 와서 놀랐다. 내가 청첩장을 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얘기를 듣고 찾아 오셨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지만 학교 다닐 때의 단골집 아주머니가결혼식에 왔다는 것은 흔한 얘기는 아닐 거다.

 

4학년 때 광운대학교 병설인 광운중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갔었다. 학교는 버스에서 내려 조금 걸어야 했다. 버스 정류장 앞에 아주 허름한 술집이 마음에 들어 교생실습이 끝난 뒤에도 자주 갔었다. 상호가동산집으로 대학을 졸업하고도 한동안 찾아 다녔다.

 

주인 내외가 예산 사람으로, 가끔 예당저수지에서 잡아왔다는 민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였지만 그것보다는 돼지고기 부산물로 끓인 찌개나 양념구이를 잘 했다.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친절하여 오래 다녔다. 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고 가서 술을 마시고 다시 버스를 타고 오는 번잡한 길이었으나 한동안 그 맛에 끌려서 자주 다녔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학교 앞 술집들은 다 멀어졌다. 그래도 한동안은 회기동에 자주 갔었다. 학교 행사가 있으면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고 학교 앞에 가게 되면 다니던 집으로 가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학교 앞에 가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그러다보니 거기 술집도 멀어져갔다.

종로까지는 자주 나갔어도 종로를 벗어나서 외곽으로 나갈 일은 없어지니 경희대 부근은 더더구나 갈 일이 없었다. 세월이 간다는 것은 그런 것에서도 표가 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외상값을 두고 만 곳은 없어서 언제라도 부담 없이 갈 수는 있지만 먼 기억 속의 일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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