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0. 21:18ㆍ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나는 명색이 국문과를 나왔지만 시를 대할 때는 왠지 모를 거리감이 있다. 김소월, 한용운, 이육사 등의 옛 시인이 쓴 시라면 몰라도 요즘 나오는 시는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적어도 70년대 이전에 나온 시가 아니면 정말 난해하다고 생각한다. 변명이긴 하지만 그래서 점점 시를 멀리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내가 아는 시인은 한 사람뿐이다. 시 때문에 만난 시인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이야기하고 많은 술잔을 주고받은, 내가 아는 시인은 조태일(趙泰一) 님 한 분이고 또 그 한 분이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조태일 시인을 경희대 국문과에서 만났다.
경희대 국문과 출신으로 구성된 경희문인회는 꽤 쟁쟁한 분들로 되어 있다. 실제로 그분들이 다 참석하고 활동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망라된 이름을 보면 현재 활동 중인 시인, 소설가, 수필가, 극작가, 평론가들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나야 문인이 아니고 문인의 꿈을 꾸어 본 적도 없지만 경희대에 다니다보니 경희문인회 모임에도 몇 차례 나가 심부름을 하거나 안내를 맡은 적이 있었다. 그런 자리에서 두어 번 뵙고 가깝게 지내게 된 분이 바로 조태일 시인이다.
그런 인연으로 내가 학회장을 하던 84년도에 우리 국문과 초청강연회에 조태일 시인과 조세희 작가를 함께 모셨다. 두 분 다 경희문인회에서 뵌 분이었고 당시 학생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라 호응이 좋았다.
솔직히 그런 행사에 동문 선배를 모실 수밖에 없는 것이 행사비는 적게 나오고 학생들 눈은 높아서 어떤 분을 모시고 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다행히 두 분이 다 기꺼이 응해 주셔서 강연회를 성대하게 마치고 조촐한 자리에서 소주 한 잔 대접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조 시인은 그 시절에 마포에서 ‘시인사’라고 하는 출판사와 창제인쇄공사라는 인쇄공장을 같이 운영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시인이 아니라 소설가 같은 후덕한 얼굴에 눈빛만 날카로웠다. 늘 만나면 하시는 말씀이 “시간 날 때 마포로 놀러오라”였지만 내가 그 말씀만 듣고 얼른 가기엔 너무 어려웠다.
조 시인은 경희대 국문과 대 선배시고 연배도 우리 지도교수이신 금봉 고경식 선생님보다 불과 2년인가 밖에 차이가 안 나서 선배가 아니라 선생님 반열이니 얼굴이 두껍기로 이름이 난 나도 쉽게 대할 수 있는 분이 아니었다.
어느 여름날 금봉 선생님이 마포로 조 시인을 만나러 가신다고 같이 가자고 하시어 내가 선생님을 모시고 길을 나섰다. 그날 처음으로 시인사에 들렀고 마포에서 술을 마셨다. 금봉 선생님도 주량이 대단하시지만 조 시인도 난형난제여서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옮겨 다니며 마셨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인의 생각도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만남이 계기가 되어 나는 마포에 자주 가게 되었다.
조태일 시인하면 떠오르는 것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된 경력이다. 조 시인은 군부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1974년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창립하고 여기서 활동하다가 1979년에 긴급조치 9호로 투옥되었다. 그리고 1980년 5월 계엄해제 촉구 지식인 124명 서명에 참여한 참여문학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니 나 같은 평범한 사람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인 줄로만 생각했는데 만날수록 그 따뜻한 인간미에 반해서 내가 자주 전화를 드렸다.
나는 맥주보다 소주를 더 좋아하나 조 시인은 맥주를 더 좋아한다는 것이 차이일 뿐 어떤 얘기도 서로 간에 막힘이 없었다. 혼자서 간 적도 있지만 대개 친구나 후배를 불러서 두셋이 같이 갔다. 맥주를 마시면 꼭 열 잔은 마셔야 일어났다. 지금이야 다 500cc 잔으로 마시지만 그때만 해도 보통 1,000cc 잔으로 마실 때다. 그러니 열 잔이면 맥주 10,000cc를 마신 거다.
안주는 따로 시키지 않고 맥주집에서 주는 기본 안주인 양배추를 먹었다. 양배추 가늘게 썬 것을 은박 도시락에 담아 케첩을 뿌려 내어오는 것이 전부다. 나는 안주를 좋아하지만 안주를 시켜달라고 조를 정도는 아니어서 그냥 나오는 대로 마셨다.
한번은 82학번 은경이를 불러서 마포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혼자 가서는 후배를 부르겠다고 하니까 그러라고 하시어 은경이에게 전화를 했다. 나와 조 시인은 여섯 시쯤에 만났고 은경이는 여덟 시쯤에 왔다. 셋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자리가 열한 시가 넘도록 끝나지 않았다.
은경이가 늦어서 먼저 간다고 하는 것을 내가 곧 끝난다고 붙잡은 것이 여러 번이었지만 끝내 같이 일어나지 못하고 먼저 보냈다. 무슨 특별하게 나눌 얘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한번 만나면 그렇게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마시고 얘기할 때가 많았다.
마포에서 맥주를 많이 마시고 회기동 경희대 기숙사까지 가려면 가는 것이 상당히 고역이다. 가는 도중에 적어도 두 번은 내려서 실례를 해야 했다. 술이야 늘 얻어 마시는 것이지만 끝나면 늦은 시간이라 택시를 타야 해서 택시비가 만만치 않게 나왔다.
늦어서 내가 시계를 자주 보면 조 시인이 말씀하시기를 “걱정하지 마라, 내가 택시 태워 보내줄게”라고 하셨고 정말 일어설 때는 택시타고 가라고 차비까지 주셨다. 이러니 자주 가기는 어려웠지만 시간이 나면 마포로 가고 싶었다.
조 시인은 술값을 늘 중간에 정산했다. 몇 잔 마시고서 얼마냐고 물은 뒤에 돈을 내시고는 계산이 조금 남았으니 한잔씩만 더 하자고 말씀하시어 조금 있으면 끝나나 싶어도 그런 계산이 두세 번 반복되니까 시간도 거의 열두 시 가까이 되고 마신 술도 늘 10,000cc가 넘었다. 아마 평소 습관이 그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조 시인하고 만나서 하는 얘기는 아주 다양했다. 정치판 얘기는 서로 꺼낸 적이 거의 없었고, 그냥 사는 이야기와 고향 얘기, 부모님 이야기, 조 시인이 학교 다닐 때 얘기, 결혼해서 너무 피곤하게 살아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일, 선배들과의 만남, 김지하 시인을 등단시킨 일, 이문구 선생과의 만남 등을 아주 구수하게 말씀하셨고 나는 주로 듣는 쪽에 해당했다.
지금 생각하면 조 시인도 많이 외로웠던 것 같다. 동료 시인이나 문인들을 만나면 늘 하는 얘기가 비슷했을 것이고 시국 돌아가는 얘기는 몸과 마음을 더 피곤하게 했을 것이니 전혀 딴 세상 사람인 나를 만나는 것이 마음이 더 편했을 것 같다.
내가 영일고에 자리를 잡고서 첫 월급을 받았을 때에 그간 신세진 여러 은사님과 선배님들께 작은 선물을 하나씩 준비한 적이 있다. 그때 당연히 조 시인께도 작은 것을 하나 준비해서 찾아갔다. 조 시인은 나를 무척 반겨주시고 고마워하시며 술을 많이 마시면 학교에 가서 지장이 있을 것이니 가볍게 칵테일로 한 잔씩만 하자고 해서 술집으로 갔다.
칵테일 두 잔을 주문하니까 거기 바텐더가 잔으로 시켜 드시는 것 보다 병으로 시켜 마시는 것이 저렴하다고 하면서 병으로 주문할 것을 권했지만 조 시인은 딱 한 잔씩만 마실 거라고 얘기했다. 그래서 속으로 ‘아니 오늘은 정말 이렇게 한 잔으로 끝내실 것인가?’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더니 내가 틀렸다. 그렇게 한 잔씩 시키기를 열 번을 더 했고 술을 마시다가 계산을 한 것이 네 번인가 되었다. 결국 그날도 열두 시가 넘어서야 일어설 수 있었다.
그렇게 열 잔이 넘게 마실 줄 알았으면 차라리 병으로 시켜 마시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었다. 나야 늘 얻어 마시는 입장이라 큰 소리를 낼 형편도 못 되었지만 두 잔만 마시고 일어서신다는 분에게 병으로 시켜달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라 그렇게 마실 수밖에 없었고 또 길게 마실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내가 늘 빨리 가고 싶어 시계를 보면, 당신도 집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도 같이 마시고 있다는 말씀으로 내가 재촉하지 못하게 입막음을 하시었다. 내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써먹는 말이 ‘내가 늦게 들어가면 어머니가 주무시지 못하고 걱정하신다.’는 거였다. 내가 그 얘기를 꺼내는 날은 꼭 끝나고 차를 탈 때에 어머니께 가져다 드리라고 과일을 사 주셨다. 나만 사 주시는 것이 아니라 조 시인도 나와 똑같은 과일을 사가지고 가셨다. 아마 집에서 늦게까지 기다리시는 사모님께 미안해서 그러셨을 거였다.
조 시인이 광주대학교로 교수로 가시면서 자주 뵐 수가 없었다.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경희대 행사에 자주 가지 못했으니 이래저래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았다. 이문구 선생이 〈만해 문학상〉을 수상한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보고 그 행사가 있던 출판문화회관으로 갔더니 조 시인이 거기 와 계셨다.
내가 이문구 작가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듣고서 언제 가까운 시일 안에 셋이 한 잔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여러 번 말씀 하셨으나 그 기회를 갖기 전에 우연히 만나게 된 거였다. 그러나 거기서는 조 시인께 인사만 드리고 나는 사진을 찍은 뒤에 일찍 빠져 나왔다. 내 동문 선후배들이 여럿 와 있어 그런 자리에서 같이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뒤로는 통 소식을 못 듣다가 어느 날 신문에 조 시인이 돌아가셨다는 기사가 난 것을 보고 부랴부랴 일원동 삼성병원으로 조문을 갔다. 국문학과에서 부음을 전해주었더라면 그렇게 정신없이 가지는 않았을 거였다. 암으로 여러 날을 병원에 계셨다고 하는데 나는 전혀 몰랐다. 술을 많이 드셔서 병이 되셨다면 나도 책임이 있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저승에 가서 만나 뵐 수 있다면 그때는 다 잊어버리고 밤을 새워 마셔도 그 자리를 사양하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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