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야 청산 가자

2012. 3. 20. 21:24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내가 학교에 다니면서 그래도 내어놓을 것이 있다면 많은 선생님들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는 자랑이다.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에 다닐 때까지 정말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복학한 82학년도 경희대학교 국문과에는 박노춘, 황순원, 서정범, 김태곤, 고경식, 최동호 선생님 등 여섯 분의 교수가 계셨다. 박노춘 선생님과 황순원 선생님은 당시에 이미 정년퇴임을 하신 뒤였다. 나는 이 여섯 분의 선생님과 수원캠퍼스에 계셨던 박이도 선생님께 문학을 배웠다.

 

노강(盧江) 박노춘(朴魯春)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2학년이 되어서였다. 대학 1학년 수업은 대부분 교양과목이고 2학년이 되서야 전공과목에 들어갔다. 전공과목 중에 고전문학을 선생님께 배웠다. 처음 뵈었을 때 노강 선생님에 대한 느낌은 하얀 할아버지셨다. 아주 왜소한 체구에 등이 굽은,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고 머리가 하얀 분이 들어오시어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대학 교수라고 하면 연세가 드신 것이 당연하겠지만 선생님의 처음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 교수의 모습이 아니셨다. 아인스타인(Albert Einstein)처럼 폼이 나게 늙으신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한복을 입은 근엄한 한학자(漢學者)는 더더구나 아니었다.

 

그저 복덕방에서 볼 수 있는 노인 같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시골스러워 보였다. 게다가 아이들 앞에서 가끔씩 보여주는 웃음은 천진무구하다 못해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선생님의 모습은 한 마디로 언밸런스(Unbalance)’였다.

 

이 언밸런스라는 말이 내가 받은 노강 선생님의 첫 인상이다. 당시에 우리는 80여 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전부 수업을 받을 때라 강의실이 어수선할 때가 많았다. 이 어수선한 분위기를 질타하는 선생님의 고함소리에 너무 놀라 경기가 이는 학생이 있을 정도였다. 선생님은 강의를 온몸으로 하셨다고 해도 좋을 만큼 손짓발짓도 잘 하셨고, 칠판에 많은 것을 판서하여 보여주셨다.

 

선생님은 겉모습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도 세상의 속된 삶은 전혀 도외시하고 그저 책과 공부밖에 모르시는 진정한 학자이셨다. 사모님이 돌아가신 뒤에 재혼을 하시었고, 그 사모님께서 무슨 큰 사업을 하시다가 실패하시어 말년을 빈한하게 지내셨지만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셨고 댁으로 가서 뵈면 늘 책 속에 묻혀 지낼 뿐이셨다.

 

경희대 졸업생 중에 나만큼이나 선생님을 아는 제자도 드물 거라 생각한다. 선생님이 구산동에 계실 때 나는 홍제동에 살고 있어서 그래도 다른 제자들보다는 선생님을 더 많이 뵈었다.

 

노강 선생님은 경희대 국문과 출신이신 서정범, 김태곤, 고경식 교수님의 직접 은사이셨다. 경희대의 전신(前身)인 신흥대학 시절부터 황순원 선생님과 함께 강의를 해오셨고 경희대로 바뀐 뒤에 국어국문학과장, 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시고 이미 정년퇴임을 하신 분이셨다. 그러니 선생님과 나의의 관계는 사제지간(師弟之間)이라기보다 선생님 제자의 제자가 더 자연스러우니 사손(師孫)의 관계라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 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내가 어른들을 잘 대한다고 말을 하지만 솔직히 나도 어른들이 부담스러울 때가 많다. 그럼에도 노강 선생님 앞에서 재롱을 떨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이 늘 귀엽게 봐 주신 덕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에 지도교수이셨던 금봉 선생님은 아버지처럼 어려워서 늘 조심스러웠지만 노강 선생님은 오히려 할아버지 같아서 더 편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노강 선생님은 내가 홍성 출신이라는 것에 반색을 하시었다. 선생님은 고향이 충남 연기군 전의면이셨고 젊었을 적에 전의에서 말을 타고 홍성 군수 따님에게 장가를 가셨다고 한다. 홍성 군청, 그러니까 예전에 홍주목 관아가 있던 곳으로 장가를 가셨던 거였다. 게다가 내가 고전문학을 전공하겠다고 하니까 더 관심을 주셨다. 아니 내가 고전문학을 하신 할아버지 같은 선생님을 더 따랐다고 해야 옳다.

 

내가 노강 선생님과 더욱 가까이 지낼 수 있었던 계기는 대학 2학년 여름방학 때 울릉도 답사를 모시고 가면서부터였다. 그때 노강 선생님이 울릉도에 가면 탁본을 하신다고 그 준비물을 내게 시키셔서 그 준비를 하면서 끝까지 내가 곁에서 모셔야 했고, 난 그때 처음 탁본을 배울 수 있었다.

 

울릉도에 도착한 다음 날, 비가 조금씩 내리는 가운데 울릉도 군청 안의 바위에 새겨진 글을 탁본을 하다 보니 점심 먹을 때를 놓쳤다. 다들 배고프다고 아우성이었으나 선생님은 들은 척도 안 하시고 그 곁에 공원으로 가서 탁본을 더 해야 한다고 자리를 옮기시니 선생님을 가장 가깝게 모시고 있는 나만 죽을 지경이었다.

 

선생님께 진지를 드시고 하자고 사정도 해 보고, 투정도 부리고, 내가 별 짓을 다해도 선생님은 요지부동이셨다. 결국 비를 맞으며 탁본 하나를 더 끝내고서야 점심을 드시러 가셨지만 탁본을 하러 따라왔던 다른 학생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은 것은 선생님이 아니라 나였다. 울릉도에서 있었던 선생님과의 관계는 꼭 그일 뿐이 아니다. 울릉도 일주 유람선에서는 내가 계속 선생님께 술을 권해 선생님이 취하셔서 다른 사람들을 다 떨게 만들기도 했다.

 

다들 선생님이 일찍 잠자리에 드시기를 바라도 선생님은 끝까지, 새벽까지 안 주무시고 술을 드시니 같이 갔던 교수님들도 무척 어려워하시고 선생님을 감당해야할 대학원생들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야 그때만 해도 그런 눈치를 전혀 안 볼 때라 선생님 곁에 앉아서 잔을 비우시면 따라 드리고, 잔을 주시면 받아 마셨으니 뒤에서 돌이 날아오고 있다는 현실을 알 리가 없었다. 그렇게 울릉도에 갔다가 온 뒤로 나는 더욱 선생님 곁에서 재롱을 피웠다.

 

나는 선생님 과목은 늘 좋은 점수를 받았다. 솔직히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를 했기 때문이지 선생님이 나를 잘 봐서 점수를 더 주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글씨를 못 쓰는 것만 뺀다면 당시 고전문학에 대해서는 웬만한 대학원생보다 낫다고 스스로 자신하고 있었을 때다.

 

4학년 1학기에 선생님이 99점을 주시어 A+를 받았다. 나는 성적을 확인한 뒤에 선생님을 국문과 학회실에 가서 뵙고, “선생님, 이왕 주시는 김에 1점만 더 주시어 100점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 드렸더니, “이놈아, 대학에서 100점이 어디 있어?”, “선생님, 그래도 이왕이면 100점을 받고 싶습니다. 기념으로 100점을 주십시오.”하고 떼를 써서 선생님이 100점으로 고쳐 주셨다.

 

장학금을 서로 받으려고 경쟁이 심하던 때였지만 99점이나 100점이 아무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어거지를 써서 100점을 받기도 했다. 나는 전공과목에서 100점을 세 번 받았다. 노강 선생님, 금봉 선생님에게서 한 번씩, 그리고 깐깐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최 교수님에게서도 100점을 받았지만 그게 다 억지로 떼를 써서 받은 것은 아니다.

 

선생님을 모시고 답사를 간 것은 울릉도 한 번 뿐이지만 원주에 있는 양근열 선배가 초대를 하여 원주에 두 번 갔었다. 양근열 선배는 우리 국문과 대 선배로 원주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양 선배 덕에 원주에 두 번 갔는데 먼저 간 것은 대학 3학년 때에 원주시 부론면에 있는 법천사지(法泉寺址)에 탁본하러 갔을 때다.

 

국문과 후배인 82학번 순희, 성일이, 83학번 은경이 금화와 함께 선생님을 뫼시고 가서 법천사지를 둘러보고 거기 있는 지광국사 탑비를 탁본하려 했더니 부근 마을에 있는 노인이 나오셔서 탑이 훼손된다고 못하게 막으셨다. 선생님이 화를 내시며 누구 마음대로 못하게 하시냐고 두 분이 다투시어 아주 난처해 하다가 탑비는 그냥 두고 부근에 있는 돌조각의 문양만 탁을 해왔다.

 

대학을 졸업한 뒤인 19865월에 원주로 운곡 원천석의 유적을 답사하러 가신다는 선생님을 모시고 국문과에 후배인 지형이, 석만이, 배식이와 함께 원주로 갔다. 석탄일과 일요일이 연휴로 되어 있어 이틀을 작정하고 떠났다. 양 선배 댁에서 하루를 자고 아침에 출발하여 치악산을 뒤로 돌며 운곡의 유적지를 답사하기로 했다.

 

선생님은 어떤 곳은 너무 꼼꼼히 보셨고, 또 지나다가 모내기를 하는 논판에서 막걸리를 청해 마시고 하며 유유자적하다보니 길에서 하루가 다 갔다. 그래서 치악산 자락에서 하루 민박을 하고 바로 돌아오고 싶었지만 선생님은 다음 날 아침에 치악산 정상을 밟아보시겠다고 억지를 쓰셔서 시루봉 꼭대기까지 일흔이 넘으신 선생님을 뫼시고 올라가야 했다.

 

너무 힘이 들어 나는 일행보다 뒤쳐졌는데 선생님도 힘이 부치셨는지 많이 힘들어하시며 나와 함께 걸으셨다. 중간에서 그만 두면 다시 내려와야 하는 일이라 정말 힘들게 산 정상에 올랐다가 반대편 상원사 방향으로 내려왔다. 선생님은 그 뒤로는 다시는 산에 가자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대학을 다닐 때도 그랬지만 졸업하고 학교에 자리를 한 뒤에도 선생님을 가끔 뵐 수 있었다. 11일이나 스승의 날이 되면 꼭 찾아뵈었고 선생님이 무슨 일로 부르시면 득달같이 뛰어갔다. 나는 머리를 쓰는 일은 잘 못해도 몸으로 하는 일만큼은 무엇이든 자신 있었고 또 선생님이 시키시는 일이라면 친구나 제자를 불러서라도 해내야 속이 편했다.

 

선생님이 어딘가로 탁본을 가실 때는 의레 내가 따라갔다. 탁본만이 아니고 무슨 학회 같은 곳에 초대를 받으시거나 어문교육연구회의 행사가 있으면 늘 내가 후배들을 데리고 가서 일을 돕거나 정리를 했다. 그런 인연으로 선생님은 사사로운 것도 다 내게 시키셨고 나는 당연히 내가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관악산 산 속에 있던 이름 없는 마애석불을 탁본하여 서울시 문화재로 올린 일이며, 홍릉 세종대왕기념관에 있던 복각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複刻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을 탁본하여 그 실체를 밝히고 보물로 지정받게 한 일도 노강 선생님이 주선하시고 내가 탁본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물론 나도 혼자서 한 것은 아니고 후배 아니면 영일고교 학생들이 함께 가서 도울 때가 많았다.

 

내가 늘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선생님 제가 수제자지요?” 하고 여쭈면, “이 자식아, 너 같은 것이 무슨 수제자냐?” 하시더니 말년에는 어디에 가면 꼭 나를 수제자로 말씀을 하시어 오히려 내가 부끄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어찌 감히 선생님의 수제자가 될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저 말제자(末弟子)’로도 황송한 일인 것을…….

 

선생님은 내가 결혼식을 올릴 때 찾아주셨다. 오셔서 우리 친구들하고 사진을 찍을 때에 같이 사진도 찍으셨다. 제자 결혼식에 주례를 서기 위해서가 아닌 축하하러 오시는 대학 은사님이 계시다는 얘기를 나는 아직 듣지 못했다.

 

선생님은 하필 내 막내아우가 결혼식을 올리기 하루 전에 돌아가시어 내가 홍성에 내려갔다가 결혼식이 끝난 뒤에야 부랴부랴 올라 올 수 있었다. 또 돌아가신 날이 다들 겨울방학을 하는 날이어서 교직에 있는 제자들에게는 제대로 연락도 되지 않은 곳이 많았다. 나는 그게 제일 아쉬웠다. 제대로 알렸으면 더 많은 제자들이 선생님 가시는 길에 명복을 빌었을 것인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나는 아직 선생님 묘소에도 가 뵙지 못했다. 선생님이 계실 때는 나중에 선생님이 돌아가시면 내 손으로 문학비(文學碑)를 세워드리겠다고 생각했지만 내 삶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면서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직 실천하지는 못 했지만 그 생각만은 잊지 않고 있다. 앞으로 언제든 내가 그 생각을 실천할 날이 꼭 오리라 믿고 있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다.

 

선생님은 나비가 되셨을 것으로 믿는다.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고 청산을 훨훨 나는 그 나비가 되어 오늘도 푸른 하늘을 날고 계실 거라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