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剝製)가 되어버린 한림회

2012. 3. 20. 21:28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내가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시골이라 그랬는지 모르지만 학교에서 하는 특별활동이 전부 반만 편성이 되어 있고 실제 활동은 거의 없었다. 그 시절에는 대학에나 가야 그런 동아리활동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여 처음 학교에 나갔더니 사방에 신입생을 뽑는 동아리들의 광고가 눈에 띄었다. 지역모임에서부터 학술, 취미, 봉사 등 다양한 갈래의 동아리들이 신입회원을 뽑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바로 입대를 했기 때문에 어느 동아리에도 들지 못했다가 다시 복학을 하고 보니 3년 전과 똑 같은 동아리들이 또 신입회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나는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서 봉사동아리에 가입하고 싶었다. 그중에 눈을 끈 곳이 향봉이었다. 향토봉사대의 준말이라고 하는데 내가 시골출신이라 그런 곳에 가서 봉사활동을 할까 했더니, 선일이가 나를 말렸다. 봉사활동을 표방하는 대부분이 이념 서클이니 그런 동아리활동은 신입생들에게 맡기고 그냥 우리는 술이나 마시면 된다는 거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 같은 늦은 학생이 가입하면 동아리 내의 서열도 문제가 될 것 같기는 했다. 그래서 동아리활동을 하겠다던 생각을 접고서 늘 복학생들끼리 어울려 당구장에 가거나 술집에 돌아다녔다. 내가 당구장에는 많이 따라다녔지만 당구를 쳐 본 적은 없었다. 그냥 따라가서 남들 하는 것 구경하다가 끝나면 바로 술집으로 갔을 뿐이다.

 

그렇게 2년이 흘러가고 3학년이 되었을 적에, 나는 우연인지 인연인지 경희대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동아리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 동아리 이름이 한림(翰林)회다.

 

내가 한림회에 가입하고 싶었다는 얘기는 안 했지만 관심은 꽤 있었다. 내가 복학을 했을 적에, 아니 입학을 했을 때였다. 한림회를 창립한다는 광고를 아주 여려 번 보았는데 거기는 좀 특이한 곳이었다. 우선 가입대상이 1학년 신입생이 아니라 3학년 학생부터 가능했고, 거기다가 학교의 선발장학금을 받는 장학생만 대상으로 한다는 광고였다. 선발장학생이면 각 학과의 한 학년에 한 명뿐인 학비전액 장학생이었으니 거기 가입할 수 있는 사람은 학과 당 한 명이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때 나는 가입조건도 안 되었지만 경이원지(敬而遠之)이면서도 별 이상한 놈들 다 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고는 잊고 있었는데 나더러 한림회에 가입을 하라는 권고가 들어온 거였다. 우리 국문과의 4학년이 되는 승인이가 거기 회원이었다. 한림회는 4학년이 되는 회원이 자기학과의 3학년 학생을 추천해야 입회가 가능하다고 했다. 승인이는 내가 학회장에 출마할 때에 나를 추천하는 조건으로 나를 한림회에 추천을 하겠으니 가입해 달라고 요청했다.

 

잊고는 지냈지만 학교에서 제일가는 엘리트동아리인데 굳이 거절할 것도 아니어서 나는 그러기로 대답을 했고, 승인이가 국문학과 학회장선거에서 나를 추천해 준 덕에 나는 전 학년 고루 몰표를 받은 셈이라 승인이에게 이끌려 한림회에 가입했다.

 

나는 한림회 4기였다. 3기는 당시 4학년이었고 1, 2기는 졸업한 선배들이었지만 의대와 한의대의 1, 2기는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한림회에 가입하고 싶은 지원자가 있어도 한 학과에 한 학년에 한 명이라는 규정 때문에 들어올 수가 없고 반드시 앞의 선배가 추천을 해야 했으니 실제로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동아리활동은 자신이 선택해서 해야 애착도 가고, 열성일 수 있는데 한림회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들어 온 사람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아주 열성적인 회원도 있기는 했지만 융화되지 못하고 소 닭 보듯 하는 회원들도 있었다. 다른 동아리보다 훨씬 늦게 생기기는 했지만 적어도 경희대에서는 질시와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한림회회원이라고 하면 학교 내에서는 공부 잘하고 모범학생인 것만큼은 틀림없었기 때문에 누가 봐도 잘 나가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태생에 대해 의문의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학교 측에서 사주하여 만든 어용 팀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엘리트의식과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과대망상의 환자들 집단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한림회의 지도교수님은 무역학과의 서청석 선생님이셨다. 처음에 한림회를 만든 창립멤버들은 지도교수를 모시는데도 엄청 신경을 써서 장래가 촉망되고 학교 내에서 신망이 높은 젊은 교수님을 찾아 삼고초려로 모셨다고 했다. 이런 면도 남들이 보기엔 안주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한림회 제 4기 회장은 정외과 79학번 인수였고 내 직책은 조직국장이었다. 거기다가 경제학과 79학번 순홍이가 총무국장을 맡아 우리 셋은 잘 어울렸다. 나는 아무 하고나 잘 어울리는 성격이라 금방 한림회에서 큰 소리를 칠 수 있었다. 모임에 잘 안 나오는 회원들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언제 모임을 갖는다는 대자보를 준비해서 붙이는 일도 했다. 내가 글씨를 못 쓰기 때문에 그런 대자보는 서도회에 다니는 명희가 많이 만들어줬다.

 

한림회는 한 달에 한 번 세미나를 개최하면서 그것이 정기모임이었다. 전혀 다른 학과 학생이 자기 전공에 대해 세미나를 하는 데에 참여해서 듣는 것도 조금은 이상했지만 세미나에 참석하는 한림회 회원들은 다들 진지했다. 다만 참석하는 인원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아서 그게 좀 아쉬웠다. 수원에 가 있는 학과는 그때까지 회원이 없었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학과 40여 개 중에 가입회원이 없는 학과도 있어서 우리는 다 모이면 70여 명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보통 모임을 가지면 20여 명에서 30명이 고작이었다.

 

우리는 세미나를 시작할 때에 반드시 국민의례와 한림선언서 낭독을 했다. 처음에는 좀 황당했으나 나도 그 분위기에 익숙해져 갔다. 나는 네 뒤의 기수에 여미경이를 추천했고, 그 다음은 지형이가 들어왔다. 4기는 여자가 몇 없었지만 5기에는 여자들 숫자가 꽤 늘어나서 그래도 조금 활기가 있었다.

 

연말에는 졸업한 선배도 참여하는 그럴듯한 송년회가 있었고, 졸업한 선배들이 한림회 정회라고 해서 거기도 회장, 총무가 존재했고, 학부에 있는 한림회는 부회라고 지칭했다. 그렇지만 한림회는 태생적으로 자생력이 부족한 곳이었다. 선배가 추천해서 가입해도 당사자가 안 나오면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회비도 다른 부서보다 더 부담이 돼서 그것도 문제였다.

 

졸업하고 한림회에서 만난 가관과 성례 덕에 오랜 시간 한림회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또 모임에도 나가긴 했는데 나도 내 일에 바쁘다보니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아마 희섭이와 성례가 아니었으면 진작 끊어졌을지도 모른다.

 

근래에는 작심을 하고 나가는데 이제 학부에는 한림회가 존재하지 않고 졸업생 모임으로만 있다고 했다. 그렇게라도 만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작에 문호를 개방하여 오고 싶은 사람이 올 수 있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든다. 박제剝製)가 되어버린 천재처럼 선발장학생의 모임이었던 한림회는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다.

 

비록 자의 반, 타의 반에 의해서 가입한 한림회였지만 내 대학생활에 유일한 동아리 활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