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한 단정학(丹頂鶴)을 보았다

2012. 3. 20. 21:21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학이 두루미인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백로나 왜가리를 학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왜가리를 백로라고 하면 백로가 화를 낼 것이고 백로를 학이라고 하면 두루미를 무시하는 일이다. 오로지 두루미만이 학이 될 수 있다. 학은 품위가 넘친다. 학은 말 그대로 군계일학(群鷄一鶴)이요, 선학(仙鶴)이다.

 

나는 학을 보았다. 서울대공원 새장에 갇힌 학을 본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서 학을 보았다. 인중지봉(人中之鳳)을 본 것이 아니라 인중지학(人中之鶴)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이 나에게 있었다. 내가 학을 본 것은 경희대 국문학과에서였다. 나는 거기서 고고한 선학을 만날 수 있었다.

 

경희대 국문과에 복학을 했지만 솔직히 나는 국문과에 어떤 교수님이 계신지는 전혀 몰랐다. 3년 전에 입학을 했을 때 시간표를 보니까 조병화 선생님, 서정범 선생님의 이름이 있어 이분들이 여기 교수님인가보다 했을 정도이지 내가 입학 전부터 어떤 교수님이 계신가에 신경을 쓸 정도로 치밀한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데 복학을 하고 나서 얘기를 들으니까 조병화 선생님은 인하대로 가시었고, 황순원(黃順元) 선생님이 명예교수로 계시다고 했다.

 

중학교 때 국어책에서 황순원 선생님의 소나기를 읽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문학을 꿈꾸는 몽상가는 아니었어도 책은 좋아하여 어떤 책이든 닥치는 대로 읽었던 터라 카인의 후예, 나무들 비탈에 서다등의 선생님 소설을 읽은 기억이 있었다. 특히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그 배경이 내가 근무하던 철책 부근이라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소설을 쓰신 분이 내가 다니는 학과의 교수로 계시다는 것이 신기했다. 내가 황순원 선생님에 대해 아는 것은 그런 정도였다. 그리고 가끔 먼발치에서 선생님이 지나가면 아이들이 저분이 황순원 선생님이라고 수군거리는 얘기를 들었을 뿐이다.

 

2학년이 되면서 국문과 전공과목 수업이 늘어나면서 1학기 시작하자마자 문장 연습이라는 과목에 황순원 선생님이 우리 강의를 들어오셨다. 곱게 늙으신 멋진 신사 같다는 생각이 첫인상이었다. 말씀도 많지 않으시고, 웃음도 근엄했고 음성도 그리 높지 않아서 노강 선생님과 많은 대조가 되셨다. 모든 여학생들이나 많은 남학생들도 선생님께 강의를 듣는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둘 만큼 선생님은 누구나가 다 존경하는 분이셨다.

 

우리에게 교양 영어를 가르치시던 영문과의 교수님이 강의시간에, 당신께선 지금도 황순원 선생님의 뒷모습만 봐도 마음이 셀렌다고 하시며, 우리에게 그런 훌륭한 선생님에게 강의를 받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 모를 거라는 말씀을 하셔서, 웃은 적이 있었지만 얼마 안 가서 그 말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어디에 가서든 황순원 선생님에게 강의를 듣고 있다고 하면 다들 너무 놀라는 거였다. 나는 처음엔 남들이 그러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었다. 대학에 연세 드신 분이 어디 한두 분이며, 젊어서 이름을 떨치신 분이 황순원 선생님뿐이겠는가 생각했지만 황순원 선생님에 대한 사람들의 경외심은 그게 아니었다.

 

내가 경희대 국문과에 다니고 있다면 하면 대개 첫 물음이 황순원 선생님 강의를 들어봤냐고 물었다. 거기 다니고 있는 나도 선생님이 경희대에 계시다는 것을 입학하고 한참 뒤에 알았으니 그런 얘기가 나오면 처음엔 많이 황당했다. 물론 1학년 때야 나도 선생님을 뵙지를 못했기 때문에 그런 물음에 우물쭈물했지만 2학년이 되어서는 내가 자신 있게 강의를 듣고 있다고 하면 다들 부러워하는 모습들이 역력했다.

 

경희대 국문과에 다니고 있어서가 아니라 황순원 선생님 강의를 듣고 있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어색했지만 내가 황순원 선생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 대단한 영광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더구나 나는 솔직히 문학도가 아니라 그저 그런 국문과 학생이고 경희대 국문과에서도 오히려 고전문학을 더 가까이하는 이방인이었다. 그런 내가 소설을 쓰시는 황순원 선생님 덕에 우쭐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나 선생님 덕에 늘 부러움을 산다는 것은 고마우면서도 자랑스러운 일 아닌가?

 

금봉 선생님은 황순원 선생님을 말씀하실 때마다 늘 큰 바위 얼굴에 비유하셨다. 정말 황순원 선생님은 경희대학교의 큰 바위 얼굴이셨다. 국문과를 떠나 경희대를 나온 사람이거나 다른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나 누구도 황순원 선생님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하는 것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나라 현대문학이 시작된 이후에 셀 수 없이 많은 소설가가 나왔고 훌륭하신 분들이 부지기수지만 시대를 떠나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는 작가는 아직 황순원 선생님 외에는 듣지 못했다.

 

나는 선생님에게 세 과목의 강의를 들었다. 2학년 1학기의 문장연습’, 4학년 1학기 때의 수필연습2학기 때의 창작연습이 그것이다. 선생님은 점수가 후하신 편도 짠 편도 아니셨지만 나는 두 번은 A학점을, 그리고 수필연습은 A+학점을 받았다. 군대 훈련소에서 만났던 박종륜 상병에 대한 이야기를 쓴 수필로 최고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한 학기에 한 사람에게만 A+학점을 주신다는 얘기를 풍문으로 듣고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한 번은 우리 복학생 몇과 여학생 몇이서 선생님께 시간을 내어달라고 말씀을 드려 학교 앞의 맥주 집으로 모시고 간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늘 말씀을 아끼시는 분이라 우리들 얘기를 들으시면서 입가에 미소만 띠우셨다. 한 시간 쯤 앉아 계시다가 다른 일이 있다고 일어나시어 배웅하러 따라 나섰더니, 그냥 더 마시라고 말씀하시며 카운터에 우리가 마신 것을 계산하시고 나중에 마신 것까지 계산하라며 2만원을 더 주시며 떠나셨다.

 

우리가 얼마나 황홀했겠는가? 살아 있는 전설을 모시고 말씀을 들은 것만으로도 과분한 일인데 선생님께서 술값까지 내어주셨으니 어디 가서 며칠을 자랑해도 부족할 일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을 자주 뵙자고 다들 얘기들 했지만 공염불로 그치고 말았다. 한 번 시간을 내주신 것만도 감지덕지지 어디 선생님이 우리 같은 병아리들하고 만나실 시간적 여유가 있었으랴?

 

3학년 겨울 방학 때 선생님이 사시던 여의도 아파트로 찾아 뵌 적이 있다. 이런 일을 꾸밀 때면 아이들이 꼭 나를 방패막이로 내세우기 때문에 내가 늘 나팔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사모님과 두 분이서 단출하게 사시고 계셨다. 선생님 댁에서 한 시간쯤 말씀을 듣다가 선생님이 우리를 데리고 나와 소주를 사 주셔서 또 황홀하게 마셨다. 누가 술을 준다고 하면 어디든 찾아갈 때이기도 했지만 황순원 선생님을 모시고 술자리를 했다는 것은 같은 국문과 학생이라도 해도 큰 특전으로 생각할 만했다.

 

선생님은 소학교에 다니실 적에 바이올린 강습을 받았다고 한다. 음악에도 뛰어난 재질이 있으셨는지는 모르지만 개인교습을 받으러 다니셨다고 했다. 그런데 그 바이올린 선생님이 연애를 하느라 바빠서 교습에 소홀하여 중도에 그만 두셨다고 했다.

 

그 말씀을 듣고 내가 우리들의 큰 복입니다. 선생님이 계속 바이올린을 하셨더라면 오늘날 소설가 황순원 선생님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했더니, 선생님은 웃으시며 혹시 아나? 내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을지도……하셔서 다들 같이 웃은 적이 있다.

 

선생님의 평소 인상은 이웃집 할아버지 같이 인자하게 보이는 편은 아니었다. 눈매가 날카로우셔서 어딘지 근엄한 모습이시지만 환하게 웃으실 때는 마치 활짝 핀 꽃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대학 3학년 때부터는 대학원생들인 선배들을 따라 11일에 선생님 댁에 세배를 다녔다. 그 덕에 나는 여러 해를 선생님께 세배를 드릴 수 있었다. 이것은 학부생으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여러 가지로 선택 받은 학생이었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시절을 고마워한다.

 

한 번은 선생님께, 선생님의 소나기에 나오는 내용 중에 호두 송이를 맨손으로 깠다가는 옴이 오르기 쉽다는 말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에서, ‘이 아니라 이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여쭌 적이 있다. 우리 고향에서는 호두나무를 만지면 이 오른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가볍게 웃으시며 그런가?’하시고는 더 말씀이 없으셨다.

 

선생님은 말씀을 많이 하시기보다는 늘 듣는 편이셨다. 그러면서도 강의에 들어온 제자들에 대해서는 예리하고 냉철하게 파악을 하시고 계셨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그때도 늘 옛것에 대해 향수를 느끼는 뒤떨어지는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 치부되고 있었다. 같이 강의를 듣는 사람들보다 나이 차도 많이 났지만 생각의 차이는 더 컸던 것 같다. 그런 고리타분한 나에 대해서 선생님은 일관성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무슨 발표를 할 때에 논리적이지 못하고 내 주장만 강하게 내세우는 편이라 다른 학생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선생님은 그래도 일관된 생각이라며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다고 편을 들어주셨으니 선생님에 대해 나도 경이원지(敬而遠之)하는 마음으로 더없이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선생님보다 조금 더 연장이신 노강 선생님 앞에서는 잘난 척하고 많이 까불기도 했지만 황순원 선생님 앞에서는 늘 옷깃을 여밀 정도였다.

 

내가 학회장을 맡고 있을 적에 시화전을 하기 위해 선생님께 시 한 편을 써 달라고 부탁을 드린 적이 있다. 고전문학을 전공하신 노강 선생님과 소설을 쓰시는 황순원 선생님이 젊으셨을 적에 시를 썼다는 얘기를 듣고 어렵게 말씀을 드렸다. 그런데 두 분 다 기꺼이 시를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시어 놀랍고도 몸 둘 바를 몰랐다. 말씀을 드리면서도 쉽게 해주실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때 황순원 선생님이 주신 시가 고백이란 시다. 이 시는 시화전이 끝난 뒤에 내가 가져와 우리 집에 걸어 놓은 지가 20년이 넘었다. 선생님이 주신 친필원고는 눈치 빠른 후배가 잽싸게 챙기어 내게 없지만 후배들이 정성을 들여 만든 시화는 지금도 우리 집 식탁 앞에 걸려 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선생님을 자주 뵙지 못했다. 학교에 자리를 가지면서 받은 첫 월급으로 작은 선물을 하나 드렸고, 내가 결혼할 때에 청첩을 드렸는데 축하금만 전해 주시고 오시지는 못하셨다. 졸업하고 몇 해는 대학원에 다니는 사람들과 세배를 다니는 것을 빼먹지 않았지만 오래 계속할 수는 없었다. 대학원에 안 다니면서 그럴 때에 같이 다니는 것에 자괴감이 들면서다.

 

그렇게 돼서 점점 더 멀어지고 선생님을 뵙지도 못했다. 다시 생각하면 나처럼 별 볼 일 없는 제자에게 자상하게 마음을 써 준 선생님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이셨다. 대학에 다닐 때에 어떤 선생님들은 당신께서 지도하는 전공과목을 하지 않는다고 차별을 하시고 눈에 보이게 싫어하시어 당혹스런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런 선생님들과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정말 선생님은 고고한 단정학이고 선학이셨다.

 

그런 고고한 선생님을 뵙고 그 분에게서 배웠다는 것이 내 생애 최고의 자랑이다. 비록 내가 글을 쓰지 못하여 제자로서 선생님의 이름을 높이는 일에 들어서지도 못했지만 그저 선생님의 제자라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