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만 찍었지만

2012. 3. 20. 21:14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어려서부터 우리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책에서 보거나 하면 아주 반가웠다. 까마귀를 만나도 고향 까마귀가 반갑다고 했으니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거다. 나는 책 속에 들어있는 많은 위인이 충청도 출신이라는 것에 늘 자부심을 느끼고 산다. 이왕이면 충청도에서도 홍성, 그리고 광천이나 장곡이면 더 좋겠지만 우리 쪽에서는 별로 내세울 사람이 없다는 것이 늘 불만이다.

 

내가 군에 가 있을 때에 읽은 책 중에 만다라가 있다. 이 소설을 쓴 김성동 님이 보령 사람이다. 그보다 조금 뒤에 전역해서 읽은 중편 중에 으악새 우는 사연이 있다. 이 소설을 쓴 사람은 역시 보령의 이문구 선생이다. 으악새 우는 사연에 내가 아는 지명이 많이 나와 깜짝 놀랐더니 작가가 그쪽 사람이라 그랬다. 이 두 분이 우리 고향에서 가까운 곳 출신이다.

 

나는 그때부터 이문구 선생의 열렬한 독자가 되었다. 내가 책이 새로 나왔다는 말을 듣고 꼬박꼬박 사서 보는 것은 이문구 선생과 이외수 선생의 작품뿐이다.

 

이문구 선생을 네이버에서 찾아보면 이런 소개가 나온다.

 

: 우리말 특유의 가락을 잘 살려낸 유장한 문장으로 작가자신이 경험한 농촌과 농민의 문제를 작품화함으로써, 소설의 주제와 문체까지도 농민의 어투에 근접한 사실적인 작품세계를 펼쳐 보여 농민소설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작가로 평가된다. 주요작품으로 이삭(1968) 이 풍진 세상을(1970) 암소(1970) 해벽(1972) 추야장(1972) 관촌수필(1~3)(1972) 백면서생(1974) 우리동네 김씨(1977) 우리동네 최씨(1978) 우리동네 유씨(1979) 우리동네 장씨(1980) 우리동네 조씨(1981) 강동만필1(1984) 강동만필2(1985) 장곡리 고욤나무(1991) 유자소전(1991) 더더대를 찾아서(1994) 장척리 으름나무(1994) 장동리 싸리나무(1995) 장천리 소태나무(1998) 등이 있다.

 

작품 경향을 살펴보면,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의 애환과 그러한 상황을 초래한 시대적 모순을 충청도 특유의 토속어로 잘 포착해 형상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농촌을 소재로 한 대표적인 연작소설 관촌수필19501970년대 산업화시기의 농촌을 묘사함으로써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현재의 황폐한 삶에 대비시켜 강하게 환기시켜 주는 작품이고, 새마을운동 이후 변모된 농민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또 다른 연작소설 우리동네는 산업화 과정에서 농민들이 겪는 소외와 갈등을 가감 없이 보여줌으로써 일종의 농촌문제보고서와 같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나무이름을 제목으로 하는 단편모음집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1990년대 이후의 영악해진 농민과 삭막해진 농촌풍경을 각기 다른 양태를 지닌 나무에 비유해 정감 있는 토속어로 맛깔스럽게 그려낸 작품이다. 작가의 문학과 인생역정의 또 다른 표현으로 평가되는 이 작품집으로 2000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내용출처 : 두산동아 엔싸이버 백과사전

 

이밖에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호는 명천(鳴川)이며, 출생지는 충남 보령이라는 것도 나와 있다. 그가 참여했던 단체나 활동은 여기에 옮기지 않았다.

 

내가 왜 이문구 선생에 대해서 이렇게 장황한 내용을 다 옮겨 놓았느냐면 선생을 두 번 만났고 술을 한 잔 하자는 약속을 했으나 끝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을 뜨신 선생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나는 정말 한 번만이라도 같이 한 잔 하고 싶었었다.

 

대학 4학년 문학평론 시간에 우리 국문과에서 깐깐하기로 소문이 난 최동호 교수께서 강의를 하셨다. 전공과목이라 해도 많은 학생들이 최 교수님의 강의를 피해서 수강신청을 할 정도였으나 나는 그렇다고 피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어려운 과목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고, 또 국문과 학생들 사이에 내 위치로는 전공과목을 피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4학년 1학기 4월에 교생실습을 나가느라 한 달을 휴강하였다. 휴강하기 전에 선생님께서 한 달 뒤에 바로 발표를 시킨다고 준비를 하라고 했으나 실습이 끝나고 첫 시간에 아무도 준비를 해온 사람이 없었다. 선생님이 화를 내시자 할 수 없이 내가 나가서 이문구, 농촌 그 영원한 고향에 대한 향수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사실 교생실습을 나가서는 공부를 했을 리가 만무했고 애들 틈에서 신나게 놀다가 왔으니 그 발표가 교수님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

 

그래서 호된 평을 받고는 나중에 다시 준비해서 교수회관으로 선생님을 찾아뵙고 다시 발표를 했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이문구 선생의 소설집 관촌수필우리 동네는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여러 번을 반복해서 읽어도 재미가 있었고, 내가 어려서 쓰던 말들이 그대로 다 나와 볼수록 신기하였다. 그래서 시골 친구들에게 책을 선물할 때는 반드시 이 두 책 중 하나를 한다.

 

조태일 시인을 만나서 얘기하다가 어떻게 이문구 선생 얘기가 나온 적이 있다. 조 시인께서 이문구 선생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해서 내가 한번 뵙고 싶다고 청을 드렸다. 비록 조잡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이지만 내가 강의시간에 발표했던 것도 한 부를 복사해서 드리고 언제든 같이 뵐 수 있는 기회가 닿을 때에 나도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기로 말씀은 하셨지만 내가 직장에 나가다보니까 시간을 맞추기도 힘이 들었을 것이고 조 시인은 광주대학교 교수로 나가시면서 둘이서도 자주 볼 수가 없었으니 그 약속을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1993년에 이문구 선생께서 만해 문학상을 수상한다는 얘기를 신문에서 보고 경복궁 곁에 있는 출판문화회관으로 갔다.

 

거기 가서 보니 조태일 시인도 와 계셨고, 내가 알고 지내는 경희대 국문과 선후배가 여럿 있었다. 초대를 받은 것도 아니고 아는 사이도 아닌 것이 무척 어색한 자리였지만 나는 사진기를 꺼내어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다.

 

거기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여럿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으로는 소설가 천금성 선생이 사진을 찍었고 젊은 사람 여럿이 부지런히 셔터를 눌렀다. 사진을 찍고 있는 나에게 조 시인이 어떻게 알고 왔냐고 묻기에 신문을 보고 왔다고 말씀 드렸다.

 

식이 끝나갈 무렵에 이문구 선생에게 찾아가서 광천에서 온 독자라고 얘기했더니 웃으며 나더러 촌에서 올라왔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과 사모님을 같이 서시라고 해서 한 장을 찍고는 집으로 왔다. 조촐한 주연(酒宴)이 있었지만 남의 잔치 같은 곳에 정식으로 초대받지 않은 내가 끼고 싶지 않아서였다.

 

실내에서 찍는 사진은 사진이 나올 때까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조명에 따라 달라지고 사진기 플래시가 제대로 작동이 되었는지는 사진이 나와 봐야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36컷 필름 두 롤을 찍었고 그 필름을 현상소에 맡겨 인화했다. 아주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사진을 보내드리려고 출판사에 주소를 물어 알아냈다. 송파 어디쯤에 살고 계셨다. 차일피일 미루며 사진을 오래 가지고 있다가 겨울방학 직전에 댁으로 우송했다. 그러고는 잊어버렸다.

 

방학 중에 하루는 학교에 나왔더니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고 받으라고 해서 받았더니 뜻밖에도 이문구 선생이었다. 사진을 받고서 여러 번 전화를 했는데 통화가 안 되었다고 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여럿이지만 사진을 전해 준 사람은 하나도 없다면서 사진 값을 보내겠다고 하시 길래 아니라고 말씀드렸더니 책이라도 한 권 보내주겠다고 주소를 알려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언제 만나서 소주나 한 잔 나누자고 해서 그것은 흔쾌히 대답했다.

 

책은 글밭을 일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고는 또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어느 날 신문을 보니 이문구 선생의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서 왔다동인문학상후보에 올라 있었다. 그게 2000년도였던 것 같다. 동인문학상은 그해부터 수상작 선정 방법도 바뀌었고 상금도 5,000만원으로 대폭 인상이 되었었다. 내가 가슴을 조일 것까지는 없었지만 이왕이면 이문구 선생이 수상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정말 수상작으로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서 왔다가 선정이 되어서 조선일보사에서 시상식을 하던 날, 내가 또 사진기를 가지고 가서 사진을 찍었다. 그날 보니 선생은 날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부지런히 사진을 찍고는 다른 사람들을 피해서 일찍 집으로 왔다.

 

이번에도 여러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에 사진을 빼 가지고는 바로 부치지 않고 가지고 있다가 거의 1년이 지나서 우송해드렸다. 사진을 보내고 며칠 뒤에 전화가 와서 통화를 했다. 쓰러져서 한동안 고생했다는 말씀과 사진이 잘 나와서 너무 고맙다는 얘기, 그리고 꼭 한 번 만나서 소주 한 잔을 나누자는 얘기를 하셨다.

 

그로보터 시간이 많이 가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신문에서 보니까 이문구 선생이 세상을 떠서 서울대 병원에 모셨다는 기사가 나와 다음 날 아침 일찍 병원으로 조문을 다녀왔다.

 

내가 먼저 소주 한 잔을 하자고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을 뜨신 이문구 선생과 제대로 한 번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