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등생 그리고 장학금

2012. 3. 21. 19:47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예전에 우스갯소리로 우등생은 우겨서 등수를 올린 학생이라고 했었다. 얘기하기 쑥스럽지만 내가 우등생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도 장학금을 탄 적이 있지만 대학에서도 다섯 학기를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다. 고등학교나 대학시절이나 다 성적 우수 장학금이었지만 우겨서 등수를 올린 우등생 적인 면이 많았다.

 

대학 1학년 시절은 공부에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었다. 우선 강서구 등촌동에서 학교를 다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편도에 꼬박 한 시간 반이 걸렸으니 하루 세 시간을 차에서 보냈다. 콩나물시루 같은 차 안에서 책을 본다는 것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다가 2학년이 되면서 거처를 석관동으로 옮기면서 여유를 갖게 되었다.

 

홍성 누나가 잘 아는 집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 2학기 초였다. 석관동에서는 걸어서 10분 거리에 학교가 있으니 정말 다닐 만 했다. 하숙도 자취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였지만 주인집은 마음 좋은 아주머니에 딸이 넷이나 있고, 막내인 아들이 하나 있었다. 중학교에 다니고 있던 그 아들의 공부를 봐주는 조건으로 갔지만 솔직히 공부를 봐 준 적은 거의 없다. 거기 식구들의 식량을 우리 집에서 대어주기로 하고 갔지만 내가 신세를 많이 진 고마운 집이다.

 

학교가 가까우니 걸어 다닐 수 있어 좋았고 시간적 여유가 있다 보니 공부를 하겠다고 도서관에 가서 앉아 있을 수도 있었다. 이것은 혁명이었다. 가까운 곳에 같은 과 친구인 선일이가 살고 있었고, 두어 정거장 거리에는 대희가 있어 그쪽에서 만나 술을 마시기도 좋았다. 그러면서 결정적으로 내가 바뀌게 된 것은 국문과 조교로 온 이화형 선생을 만난 덕이다.

 

대학원에 다니는 선배들이 조교를 하는 것이 통례였다. 내가 2학년이 되었을 때 국문과 조교에 홍성 출신인 이화형 선생이 왔다. 같은 고향이라고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 주었고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많이 배려를 해주었다. 비록 학교에서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우리 둘은 오래 만난 사람 같았다. 그 덕에 대학에서 처음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1학년 성적은 국문과 78명 중에서 대여섯 번째였다. 고등학교 때 하던 가락이 있어서 대학에서도 시험을 볼 때는 밤을 새워가며 공부를 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그래도 괜찮은 성적이 나왔던 거다. 여기에다 가속을 붙게 해준 사람이 이화형 선생이었다. 지금이야 경희대학교 교수가 되어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그 시절에는 같이 술도 많이 마셨고 서로 많은 의지가 되었던 아주 고마운 사이였다.

 

2학년이 되면서 전공과목인 언어학을 들었다. 담당 교수님은 TV에도 자주 나오고 수필도 많이 쓰신 분인데 알타이조어(祖語)에 관심이 많았고 그쪽에서 성과를 자랑하는 분이셨다. 그런데 그 교수님은 세련된 것을 좋아하시어서 나 같이 시골스런 사람들은 가까이 하기가 어려운 분이셨다.

 

나는 나름대로 매우 열심히 한다고 하였고, 또 시험도 잘 치렀다고 생각했지만 첫 성적이 65점인가 나왔다. 나는 너무 황당해서 말을 할 수가 없었고 조교 선생이 부랴부랴 교수회관에 올라가더니 성적을 다시 고쳐서 가지고 왔다. 이번엔 75점이었다. 그러나 그 점수도 내 눈에는 차지 않았다.

 

내가 다시 한 번 사정을 했더니 다시 올라가 이번엔 82점인가로 해왔다. 정말 속으로는 언짢았지만 그래도 감지덕지하고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어쩔 수는 없었지만 솔직히 그 점수를 받자니 배신감이 들었다. 언어학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요, 하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단지 국문과의 전공과목이라는 이유로 밤을 새워 공부를 했는데도 겨우 82점이라 정말 열을 받았다.

 

내가 점수가 안 나온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글씨를 못 쓴다는 이유밖에는 이유가 없었다. 선생님에게 배운 대로 제대로 다 썼고 다른 애들보다 내가 못했다면 할 말이 없지만 시험을 보고 나면 다 알 수 있는 일이라 다른 누구보다 못했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내 스스로는 자신 있게 90점은 넘으리라 생각한 과목이 그렇게 나왔으니 너무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학과에서 학기말 성적이 1등이 되어 30만원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성적을 우겨서 올렸다는 것은 딱 그때 한 번 뿐이었다. 55만원의 등록금을 낼 적에 30만원을 장학금으로 받고나니 나는 계속 1등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1등을 해서 등록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받는다면 시골에 계신 어머니께도 떳떳한 일이고 어려운 집안 살림에도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거다. 그리고 정정당당히 1등을 해야 다른 학생들에게 떳떳할 수 있으니 절대로 부정한 방법을 써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과목은 고전문학이었지만 그것만 할 수는 없었다. 강의를 듣는 모든 과목을 남들보다 잘 하려고 노력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요즘 애들처럼 내신만 신경을 썼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학생이 자기가 배우는 과목을 소홀히 하면서 다른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내가 제일 두려워한 것이 리포트를 내라고 하는 것이었다. 글씨를 못 쓰기 때문에 손으로 쓰는 것은 내용을 보기도 전에 점수가 잘 나올 수가 없었다. 하기는 나도 교사가 되어서 애들 과제물 검사할 때에 글씨가 지저분하면 읽고 싶지 않았으니 글씨 못 썼다고 점수 안 준 것을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리포트를 제출하는 시험에는 항상 후배인 미경이에게 대필을 시켰다. 내 글씨는 내가 봐도 못 알아볼 지경인데도 미경이는 용케 알아보고 제대로 옮겨 주었다. 아마 우리 과 교수가 아닌 분들은 내 이름과 미경이의 글씨를 보고 나를 여자로 생각했을지도 모른 일이다. 그렇게 해서 리포트는 대처해 나갔다.

 

나는 시험을 볼 때마다 맨 왼쪽 첫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어떤 과목이든 맨 먼저 내고 나갔다. 부정행위라는 것은 원래 생각도 안 했지만 1학기에 언어학처럼 조교 선생의 도움을 받는 것도 남들이 들으면 정당한 1등이라고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확실한 방법으로 1등을 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남들보다 더 노력해야 했고 더 열심히 해야 했다. 그런 면에서는 학교가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이 큰 득이 되었다.

 

시험을 보기 일주일 전부터 새벽 네 시에 나가 공부를 하다가 아침때가 되면 집에 와서 밥을 먹고 다시 학교로 갔다. 시험이 가까워지면 학교가 끝나고도 술을 마시지 않았다. 바로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했고 저녁에 열두 시가 되어 도서관의 문을 닫을 때까지 앉아서 공부를 했었다. 그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 계속해서 1등 아니면 2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학년이 바뀔 때에 1등이면 등록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받았고 2등이면 등록금의 반액보다 조금 더 나오는 액수를 받을 수 있었다. 2학년 2학기는 얼떨결에 반액을 받았지만 그 후로는 정말 열심히 해서 전액을 세 번, 반액을 한 번 받으며 졸업을 했다.

 

남들이 볼 때는 날마다 술집에나 다니는 한량이었지만 나는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한 일은 어지간하면 다 하면서 지냈다.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사실이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술 때문에 못했다는 말을 들을까봐 늘 경계를 하면서 생활했다.

 

내가 교수님들하고 가깝게 지내서 점수를 더 받는다는 말을 들을까봐 늘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강의시간에 무슨 발표를 하거나 하면 남들보다 먼저 했다. 내 실력을 인정받고 싶어서였다. 나는 과학이나 수학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잘 할 수 있다고 자신했었다.

 

대학원 진학시험에 떨어지고 결국 교사가 되기는 했지만 나는 대학생활에 아무 불만이 없다. 누가 봐도 열심히 노력하는 학생이었고, 내 스스로 생각해도 그때는 정말 열심히 했다고 자신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