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1. 19:53ㆍ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내가 편지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군에 가서 백암산 철책에 근무할 때부터였다. 그 전에는 고등학교 방학 때에 친구들과 만나기 위한 연락을 취하는 정도가 고작이었고, 서울에서 재수를 할 때는 ‘산 너머’와 주고받은 여나믄 통의 편지가 전부였다.
철책 근무를 한다는 것은 매우 단순한 일의 반복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가서 밤을 새워 근무를 서다가 들어와서는 아침을 먹고 오전 취침에 들어갔다가 점심 무렵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는 간단한 작업이나 훈련을 하면 다시 근무를 나가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잠을 자는 시간이나 아니면 낮에 근무를 설 때에 편지를 썼다. 낮에는 높은 곳의 두어 초소만 근무를 서는데 오전에 서거나, 오후에 서는 ‘반(半)일제’였다. 이 낮 근무를 서도 밤에는 또 나가야 했지만 낮에 근무를 설 때는 별로 신경을 쓸 일이 없어서 편지를 쓰기에 좋았다. 편지를 쓰다가 걸리면 영창에 간다고 했지만 낮에는 누구도 나와서 볼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편지를 쓰는 대상이 시골에 있는 큰 누나와 아우, 홍성 누나, 그리고 서울의 용인이와 동생인 용재, 경희 누나, 고등학교 친구들이 전부였다. 재수학원 동기인 운행이도 편지를 자주 보내준 사람이고 가족과 같은 친구들이 내가 편지를 주고받는 동지들이었다.
편지를 많이 쓰기도 했지만 많이 받기로도 유명했다. 내가 보내는 편지에 답장을 게을리 한 사람은 경희누나 뿐이고 대부분은 받으면 바로 답장을 보내주었다. 나는 날마다 한통 이상의 편지를 썼고 이틀에 한통 정도의 편지를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나이가 나와 비슷하거나 많았지만 용재는 그때 고등학생이었다. 서울에서 재수할 적에 늘 라면을 끓여주었고 잔심부름을 도맡아 해주더니 군에 가 있는 동안은 성심껏 편지를 보내주었다. 아마 용인이보다 더 많은 편지를 보냈을 거다. 그때의 유일한 낙은 편지를 쓰는 것이었고 편지를 받는 거였다.
지금도 글씨를 정말 못 쓰지만 그때는 더 형편없었다. 누가 보면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사람의 글씨로 알았을 정도였다. 그래도 많이 쓰면 좋아질 줄 알았으나 글씨는 끝내 나아지지 않았다. 글씨도 많이 쓰면 는다고 했지만 내 글씨는 그게 아니었다.
펜을 잡는 기본자세부터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 것은 군에서 전역을 한 뒤이니 별 방법이 없었다. 내가 글을 쓸 때는 펜을 아주 힘 있게 잡아서 눌러 썼기 때문에 예전에는 오른 손 중지 둘째 마디에 굳은살이 박혀 있을 정도였다.
백암산에서 나와 부대가 이동을 한 뒤에 갑자기 원주 제 1하사관학교로 가는 바람에 몇 통의 편지는 내가 받지 못했다. 신체검사를 받고 와서 이제나 저제나 차출이 되기를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어 못 가는 줄 알았었다. 그래서 계속 거기 주소로 편지를 보내다가 갑자기 원주로 가는 바람에 알리지를 못했고, 원주에 가서는 금방 편지를 쓸 수가 없었다.
1하교에서는 편지를 쓰기가 정말 힘이 들었다. 늘 야간교육까지 있어서 언제 시간을 내서 편지를 쓰기가 힘이 들었고 또 3개월이면 떠나야 된다는 것에 그저 나중에 편지하겠다는 편지만 보냈다. 원주에 있을 때 위험한 편지를 몇 통 보내기는 했었다. 배가 너무 고파 견딜 수가 없어 집으로 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썼었다.
그때는 편지도 검열을 할 때라 군사우편으로는 이런 편지를 보낼 수가 없었다. 똑같은 편지를 몇 통 써서 보내는 주소는 원주 아는 동네 이름을 쓰고 우표를 붙여 훈련을 나가다가 슬쩍 흘리면 누군가 주워서 우체통에 넣어 줄 것이라는 계산으로 두어 번 해보았다. 다행히 이 편지가 집으로 들어가서 편지 봉투 속에 1만원을 종이에 싸서 보내왔던 적이 있다.
내가 돈이 필요하지만 받을 방법이 없으니 두꺼운 종이에 만 원만 싸서 넣고 봉투에는 ‘우표 동봉’이라고 써서 보내면 편지가 두꺼워도 대개는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알고 있어 그렇게 해달라고 편지로 했다. 군에서 집으로 돈을 부쳐 달라고 편지를 썼다가 걸리면 바로 영창에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배가 너무 고파서 이런 방법을 다 써 봤다. 이렇게 해서 집에서 두 번을 보내 줬지만 한 번은 배달사고가 나서 내가 받은 것은 한 번 뿐이었다.
하사관학교를 마치고 다시 풍산리에 가서는 편지를 마음대로 쓸 수가 있었다. 여기서는 볼펜이 아니라 만년필을 사서 편지를 쓸 만큼 여유가 있었다. 아침 다섯 시 반에 일어나서 전투화를 신으면 저녁 열 시 점호가 끝날 때까지 신발을 벗지 못하고 서서 생활하는 형편이었지만 그래도 편지는 마음대로 쓸 수가 있었다.
훈련소 분대장을 하면서는 편지를 쓸 대상이 많이 늘어났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로 간 아이들이 편지를 보내면 그 답장을 다 해주었다. 한두 번 오다가 마는 경우도 있지만 몇몇 아이들은 오랜 기간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군대라고 하는 특수 상황이 사람들로 하여금 어딘가 기대게 만들다보니 서로 편지로라도 위로를 주고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군에서 쓴 편지는 1,600여 통에 이르고 받은 편지는 1,000여 통이 조금 넘는다. 쓴 편지는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받은 것은 전부 보관하고 있다가 훈련병을 시켜 노트에 옮겨 적어 두었다. 부대에서 받은 편지는 언제 누구에게서 받은 편지든 다 내용은 보관되어 있다. 편지도 계속 보관하고 있다가 전역을 얼마 앞두고 가지고 나갈 수가 없다고 해서 태웠다. 지금 생각하면 집으로 소포로 보냈어도 되었을 것을 전부 없앤 것이 많이 아쉽다.
대학 노트 열일곱 권에 해당하는 분량이지만 한쪽 면만 적었기 때문에 정확히는 그 반절 정도이다. 싸인펜으로 옮겨 쓰게 했더니 이제 점점 색이 바래가서 그것을 컴퓨터로 옮기고 싶으나 양이 너무 많아서 생각 중이다. 내 군대 생활은 거기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그렇게 많이 받은 편지 중에서 우리 가족이 아닌 여자가 보낸 것은 단 세 통뿐이다. 하나는 경희 누나가 보낸 것이고, 산 너머에서 온 것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훈련병의 여동생이 보낸 거였다. 전역을 얼마 앞두고 있을 적에 충청도 병력이 들어왔는데 주로 당진, 서산, 아산 출신들이었다.
내가 같은 고향이라고 잘 해줘서인지 몰라도 그 중의 한 아이 사촌 여동생이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 여동생은 그때 고등학교 2학년인가여서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훈계조의 답장을 해준 적이 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고등학교 2학년이면 당시 나의 나이와 그리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군에서 나온 뒤에도 한동안은 군 시절에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나야 전역을 해서 모든 짐을 다 벗었지만 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늘 어딘가 기대고 싶고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싶은 것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1월에 전역해서 2월말까지 집에 있다가 3월에 복학하여 서울로 가서도 근 1년 가까이는 군에서 편지가 많이 왔었다. 받는 즉시 답장을 다 해주지는 못했지만 편지를 받고 답장을 안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군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편지 한 장이 마음을 무척 가볍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다닐 때도 방학 중에 시골에 내려가 있을 때는 우리 국문학과 학생들에게라도 편지 쓰기를 여전히 했다. 시골에 가봐야 내가 크게 할 일도 없다보니 아이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받는 것에 재미를 붙였던 것 같다. 국문과 82학번들에게 편지를 거의 다 보내도 답장이 오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긴 80년대 초반에 어느 대학생이 집에 앉아 한가하게 편지나 쓰겠는가?
그래도 건성으로라도 답장이 오면 나는 다시 답장을 보냈다. 그렇게 편지를 해서 답장을 주고받은 사람들이 지금도 만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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