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1. 19:50ㆍ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나는 1982년 1월 14일에 전역을 했다. 남들은 대학에 다니다가 군에 가면 대학에서 받은 교련교육의 혜택으로 6개월 가까운 복무단축을 받았다지만 나는 대학에 입학하고 바로 입대했기 때문에 교련을 받지 않아 아무런 혜택도 없었다. 그리고 34개월 만기 복무에 운이 따르지 않아 14일이나 더 복무하고 제대를 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지만 제대를 하기까지도 절차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연대본부에 가서 이틀 자고 교육 받으며 연대장에게 신고하고, 다시 사단본부에 가서 이틀을 보내고 사단장에게 전역신고를 한 뒤에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다시 조치원 예비사단에 가서 신고를 하고서야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그 여러 절차에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서 김이 빠진 채로 집에 왔다.
1월 14일에 집에 와서 쉬다가 복학하기 위하여 2월 말에 서울로 올라갔다. 문제는 그 넓은 서울에 내가 머물 곳이 없다는 거였다. 여기 저기 알아보고 고민하고 하다가 등촌동에 있는 고종 사촌누님 댁으로 갔다. 내가 가깝게 지낸 누나가 아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한 달에 쌀 한 짝 씩을 주기로 하고 그리 갔다.
3월 2일에 학교로 찾아가서 복학을 하겠다고 신청서를 냈다. 교무실 창구에 있는 아줌마가 내가 입학할 당시는 문리과 대학으로 계열별이었으나 현재는 과별 입학으로 바뀌었으니 나더러 과를 선택해서 복학하라고 말했다.
별 생각 없이 영문과를 가도 되겠냐고 했더니 영문과는 숫자가 너무 많으니 다른 과를 선택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국문과는 괜찮으냐고 물었더니 거기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국문과로 가겠다는 지원서를 냈고 나는 국문과 학생이 되었다.
그 창구에서 알려준 대로 문리과대학 국문과 학회실에 가서 간단한 등록 절차를 밟고 시간표를 받아가지고 왔다. 등촌동에서 22번 버스를 타고 영등포역까지 가는 데는 30분 정도가 걸렸고, 거기서 다시 지하철을 타고 회기역까지 가서 학교에 걸어가면 한 시간이 족히 걸렸다. 말만 같은 서울이고 끝에서 끝으로 다녔다.
내가 1학년에 복학하였을 때 나이가 스물여섯이었으니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온 1학년 학생과의 나이 차이는 여섯 살이나 되었다. 그렇게 늦은 학생인데다가 군에서 제대하고 석 달도 안 되었을 때이니 그 당시 국문과의 아이들을 보면 정말 어린애들로 보였다. 아무데서나 떠들고 누가 말하면 말대꾸나 하고 담배 꺼내 물고 다니고……. 귀엽다기보다는 하나 같이 건방지고 싸가지 없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군대에 갔다 왔다고는 하지만 나는 짧은 머리에 애들처럼 옷을 입고 다녔으니 다른 신입생하고 차이가 날 것이 없었다. 제대할 때 65kg이던 체중이 집에서 쉬니까 한 달에 5kg씩 늘어서 거의 80kg에 육박하고 있다는 것만 아니면 남의 눈에 띌 특징도 없었다. 강의실에서는 늘 맨 뒤에 앉았다가 조용히 나오는 편이어서 서로 누가 누군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남학생 교련이 들은 시간에 예비군복을 입고 교장에 갔더니 군대 전역한 사람은 교련이 면제이고 나중에 예비군 교육을 따로 받아야 한다고 했다. 비록 예비군복을 입었으나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다니다보니 나와 같은 사람이 셋이나 더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서 처음으로 통성명을 하고 서로를 알게 되었다.
정식이 형은 나보다 두 살이나 더 위였고, 대희와 선일이는 나하고 같은 나이였다. 대희는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대학에 입학하여 군에 갔다가 전역하고 과를 바꾸어 국문과로 온 82학번 1학년이었고. 정식이 형과 선일이는 검정고시를 합격하고 1학년에 합격한 82학번이었다.
경희대 학번으로는 내가 79학번이라 가장 높았지만 사실 나도 제대로 갔으면 76학번이 되어야 했고, 정식이 형은 74학번 정도이고, 대희는 1년을 빨리 입학하여 75학번 출신이었다. 그 시간부터 우리 넷은 의기투합하여 날마다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여자 중에서 나이가 우리와 같은 친구가 하나 있었다. 오래 공무원으로 있다가 갑자기 대학에 온 ‘미혜’라는 예쁜 이름의 아가씨였다.
2학기가 되었을 때에 78학번으로 군에 갔다가 제대한 수명이가 다시 복학을 하여 늦은 팀은 여섯으로 늘어났다. 말이 여섯이지 미혜 씨는 우리하고 잘 어울리지도 않았고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내가 안 것은 2학기 이후여서 우린 늘 넷이 어울려 다니다가 수명이가 와서 다섯이 되었던 거다. 2학년 때부터 정식이 형은 저녁에 일이 있어 우리와 같이 어울리지 못했지만 남은 넷은 항상 무엇이든 같이 했다.
나는 2학년 1학기에 과대표를 했고, 3학년에는 국문과학회장을 했다. 과대표야 그냥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 얘기할 수도 있지만 학회장은 국문과의 전 학생이 모인 자리에서 투표로 선출하는 자리여서 그냥 얻은 게 아니었다.
나이를 먹은 것이 벼슬은 아니었지만 조교 선생들이나 교수님들과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기회가 많았고, 나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다보니 자연스레 이름이 알려져 국문과에서는 정말 모르는 학생이 없었다. 게다가 술은 말술을 마실 만큼 자신이 있어 누구도 내게 술로 도전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아마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내 최고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다. 열심히 공부했고 신나게 놀았다.
3학년 때에 나는 경희대의 엘리트 동아리인 한림회에 차출이 되었다. 한림회는 조금 특이한 동아리여서 1, 2학년 학생은 아예 없고, 3학년이 될 때에 같은 과의 한림회원인 선배가 추천을 해야 가입할 수 있었다. 각 과에서 한 명만 가입할 수 있었고 회원은 대부분 등록금 전액을 면제받는 선발장학생이었다.
회원들이 엘리트의식을 갖고는 있었지만 자생적인 모임이 아니고 인위적인 단체여서 결집력이 부족했다. 나는 결집력이 부족한 한림회를 제대로 한번 만들어 보려고 무척 애를 쏟았으나 결과는 그리 만족할만한 것이 못 되었다.
나는 국문과 학회장과 한림회 조직국장을 맡으면서 '카파'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영어 카리스마(charisma)와 이탈리아어인 파쇼(facsio)를 합성하여 가져다 붙인 이름이다. 언제나 큰 목소리에 단호하게 잘라 말하기를 좋아하고 어떤 일이든 겁을 내지 않고 밀어붙여서 그런 별명을 얻은 거였다.
선배에게는 깍듯하게 대했지만 후배에게는 아주 엄한 선배여서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반반이었다. 나를 좋아하는 후배들은 아주 잘 따랐지만 싫어하는 후배들은 어디서 나를 마주칠까봐 두려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나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후배들도 많았지만 82학번의 영희, 은경이, 순희, 미경이 그리고 83학번의 미경이, 은경이, 미숙이, 은덕이, 명희와 84학번의 미경이, 지연이, 명화, 상희 등은 잘 따르는 후배였다.
대학 4학년 시절에는 경희대 기숙사인 삼의원에서 1년을 보냈다. 삼의원은 한의학과나 의학과 학생들이 대부분 차지했고, 다른 과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 과에서 한 명만 배당이 되었다. 삼의원에 들어가서 생활한다는 것도 역시 엘리트 의식을 갖게 하는 거였다. 이런 경험들은 내게 큰 자산이 될 수 있었다.
어디에 가서도 자랑할 만한 좋은 은사님을 만났고, 평생을 같이할 좋은 친구를 만났으며,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후배들을 많이 만난 것은 내가 복이 많아서라고 생각한다.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군대생활, 대학시절 중에 중학교 때만 아웃사이더였고 다른 기간은 늘 ‘중심인’이었다고 자신한다. 대학교수가 되고 싶었지만 그렇게 안 되고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어도 나는 늘 모교와 은사님께 부끄럽지 않은 동문, 그리고 제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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