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1. 19:56ㆍ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내가 만년필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김소운 선생님의 「외투」라는 수필을 읽고서이다.
〈기차 떠날 시간이 가까웠다.
내 전신을 둘러보아야 청마에게 줄 아무 것도 내게 없고, 포켓에 꽂힌 만년필 한 자루가 손에 만져질 뿐이다. 내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불란서제 '콩쿠링'ㅡ, 요즈음 '파카'나 '워터 맨'따위는 명함도 못 들여놓을 최고급 만년필이다. 이 만년필은 일본 안에도 열 자루가 없다고 했다.
"만년필 가졌나?"
불쑥 묻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청마는 제 주머니에서 흰 촉이 달린 싸구려 만년필을 끄집어내어 나를 준다. 그것을 받아서 내 주머니에 꽂고 '콩쿠링'을 청마 손에 쥐어주었다.
만년필은 외투도 방한구도 아니련만, 그때 내 심정으로는 내가 입은 외투 한 벌을 청마에게 입혀 보낸다는 기분이었다.
5, 6년 후에 하얼빈에서 청마를 만났을 때, 그 만년필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고마웠다. 튜브가 상해서 잉크를 찍어 쓴단 말을 듣고, 서울서 고쳐서 우편으로 보내마고 약조하고 '콩쿠링'을 다시 내가 맡아오게 되었다. 튜브를 갈아 넣은 지 얼마 못되어 그 '콩쿠링'은 쓰리가 채갔다. 아마 한국에 한 자루밖에 없을 그 청자색 '콩쿠링' 만년필이 혹시 눈에 뜨이지나 않나 하고 만년필 가게 앞을 지나칠 때마다 쑥스럽게 들여다보곤 한다.〉
내가 아는 만년필 중에서 가장 고급이었던 것이 미제 ‘파카’였다. 그런데 그 파카가 명함을 못 내밀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에 문교부장관 표창을 받은 적이 있었다. 혼자 개인적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전국 초·중·고등학교에서 한 사람씩을 추천하여 표창을 할 때에 거기 끼었던 것이다. 4․19기념 표창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때는 이미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년이나 되었던 때라 그 상이 아버지의 후광으로 받은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6학년 학생 중에서 한 명을 추천하는 것이니까 내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홍성교육청에서 시상을 하여 내가 가서 받아왔다. 그게 홍성에 처음 가본 날이다. 마침 그날이 아버지 기일 날이어서 집안 식구들이 다 오시어 많은 칭찬을 들었다. 부상으로 받은 것이 파이로트 만년필이었던 것 같다. 그때까지 나는 만년필이 무엇인지 몰랐고 고등학교에 다니는 누나가 가져가서 나는 그것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기억도 없다.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입학 선물로 파카 만년필을 받았다. 월남에 해병대로 참전하였던 자형이 가져다 준 거다. 새 것은 아니었지만 받은 기억만 있지 어떻게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당시에 파카 만년필은 선생님들도 부러워할 정도로 고급스런 것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파카 만년필이라고 해도 모델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고 그 가격도 찬차만별이었다.
내가 그 파카를 팔아먹은 것은 분명 아니다. 다만 어떻게 없어졌는지 내 손에서 사라진 것은 확실하다. 중학교 동기 중에 조금 거칠게 노는 아이가 하나 있었다. 하루는 그 친구가 파카만년필이라고 가져 와서 내게 사라고 했다. 아마 그때 돈으로 2,000원인가를 달라고 했었다.
자세히 보니 내가 아는 파카가 아니었다. 파카는 옆으로 타원형인 원을 화살표 같은 것이 관통하고 있는 상표지만 그 만년필은 마치 짝퉁처럼 그 표시가 아니었고 ‘파스카’인가 하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그냥 돈이 없다고 돌려주고 말았던 기억이 있다.
중· 고등학교에 다닐 때 만년필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펜으로 글을 써도 충분했다. 나는 어려서 필기구 잡는 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해 글씨가 정말 엉망이었다. 볼펜으로 쓰면 글씨가 늘지 않는다고 하여 늘 잉크와 펜을 가지고 다녔다. 책가방 속에 잉크를 넣어 다니다가 잉크가 새어 나와 책을 여러 번 버렸다.
나는 지금도 가급적 볼펜을 쓰지 않는다. 볼펜을 쓰지 않는 이유는 펜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서 몇 번 안 써도 볼펜 속의 잉크가 진하게 나와 항상 더 지저분해지기 때문이다.
군에 가서는 잉크와 펜을 쓰기가 번거로워서 볼펜을 쓸 수밖에 없었다. 모나미볼펜을 수도 없이 사서 썼다. 보통 볼펜 하나로 일주일을 쓰면 다시 사야했다. 그만큼 편지를 많이 쓰기도 했지만 내가 너무 눌러 써서 나중에는 액이 다 흘러나와 더 쓸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육군하사가 된 뒤에 첫 월급으로 만년필을 하나 샀다. 파이로트에서 나온 토우만년필이다. 훈련소 아래 가게에서 3,000원의 거금을 주고 손에 넣었다.
이 만년필로 군에서 쓴 편지가 1,000여 통이 넘는다. 오래 쓰다 보니 늘 손으로 잡는 부분이 땀으로 인해 부식이 되어 보기 흉할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바꾸지 않고 가지고 있다가 전역을 한 뒤에 종로 파이로트 매장에 가서 900원을 주고 새것으로 교체했다. 비록 바꾸긴 했지만 군에서 쓰던 것을 바꾼 것이라 새로 산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만년필은 내가 무척 아꼈던 것인데 4학년 봄에 학교에서 잃어버렸다. 만년필이 옷에서 빠진 것을 알고 내가 다닌 곳을 이를 잡듯 뒤졌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말았다. 너무 아쉬워서 한동안 허전하게 지냈다.
교생실습을 광운중학교로 나갔더니 거기서 반 아이들이 만년필을 선물했다. ‘드라곤’이라는 상표의 중국제였다. 생긴 것도 마음에 안 들고 중국제라는 것이 싫었다. 마침 다른 곳으로 교생을 나갔던 수명이가 토우만년필을 선물로 받아왔기에 바꾸자고 했더니 그냥 주어서 둘 다 내가 가지게 되었다.
나는 내가 가진 물건을 그렇게 소중하게 다루는 편은 아니었는데 만년필만큼은 무척이나 아꼈다. 그렇다고 ‘파카’같은 외제가 갖고 싶었던 것도 아니어서 토우만년필로 족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 토우만년필도 어디로 갔는지 내 손에 없다. 잃어버린 것은 아닌 것 같고 만년필을 잘 쓰지 않게 되어 어딘가 깊이 넣어 두지 않았나 싶다. 지금 찾으면 집안 어딘가에 있을 거다.
그러던 내가 김소운 선생님의 「외투」를 읽고는 갑자기 그 만년필이 갖고 싶었다. ‘콩쿠링’만년필이 지금도 나오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아는 최고의 만년필은 프랑스제 ‘몽블랑’이었다. 아니, 나는 처음 그 수필을 읽고는 ‘콩쿠링’이 ‘몽블랑’인 줄로 혼동했었다.
내가 학교에서 3학년을 처음 맡고 그 애들을 졸업시켰을 때, 졸업식 날 한 아이가 ‘몽블랑’볼펜을 선물했다. 나는 그 당시만 해도 ‘몽블랑’이 그렇게 유명한 필기구인 줄은 몰랐다. 독일제만 대단한 줄 알았고 프랑스제는 별로로 알던 시절이다. 그래서 그 볼펜을 대학에 다니는 후배에게 선물로 내주었다. 볼펜을 쓰지 않기 때문에 내게는 필요가 없는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들으니 만년필이 아닌 볼펜이라도 몽블랑은 대단히 이름이 높은 필기구이고 저명인사들이 중요 문서에 사인을 할 때는 반드시 몽블랑볼펜을 쓴다는 것이 아닌가? 입맛이 대단히 썼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고, 때가 되면 몽블랑만년필을 하나 사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런데 몽블랑만년필의 가격을 알고 보니 내 생각보다 훨씬 높았다. 웬만한 사진기보다도 가격이 더 높았다. 그래서 몽블랑만년필을 사겠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그만두었다.
사진기처럼 내가 꼭 갖고 싶은 것이라면 무리해서라도 사겠으나 요즘은 대부분의 글들은 컴퓨터로 쓰게 되니 만년필이 있다고 해도 많이 쓰게 되지는 않을 거다. 그러면서도 누가 좋은 만년필을 가진 것을 보면 다른 것들보다는 그런 만년필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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