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0. 21:31ㆍ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경희대에도 기숙사가 있었다. 삼의원이라고 해서 주로 한의대와 의대, 법대에 다니는 우수한 학생들이 생활하는 곳인데 다른 학과는 각 과에 한 명 정도만 배정을 받았다. 나도 대학 4학년이 되던 해에 캠퍼스 후문 밖에 있던 삼의원에 들어가서 1년을 거기서 보냈다.
삼의원에 들어간다는 것은 대단한 특혜였다. 한 달의 생활비로 5만원만 내면 되었고, 위치가 바로 대학울타리와 접해 있으니 자기 방에 있다가 수업시작 5분 전에만 나오면 어느 강의실이든 지각하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또 학교 부근에서 멀리 벗어나지만 않으면 열두 시 문 닫는 시간까지 쉽게 돌아올 수 있으니 그것 또한 흐뭇한 일이었다. 학교 도서관 문 닫는 시간에 나와서 뒷길로 걸으면 5분이면 자기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삼의원을 아는 학생은 누구나 다 거기에 들어가고 싶어 했다. 지방출신이면 말할 것도 없고 집이 서울이라 하더라도 학교부근이 아니라면 삼의원에 들어가서 지내는 게 여러 모로 좋았기 때문이다. 한의대와 의대, 학생 중에는 이미 들어올 때부터 삼의원에 배정이 되는 학생들이 있었지만 다른 학과에서는 서로 삼의원에 들어가려고 해서 대개 4학년 때 한 학년만 거기서 지내는 게 일반적이었다.
나는 솔직히 그런 기숙사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나보다 한 해 먼저 다닌 승인이가 거기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알아보니 남의 집에 기숙하는 것보다 여러 모로 훨씬 나았다. 그래서 나도 삼의원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승인이는 나보다 공부도 더 열심히 했고 모든 면에서 타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으니 삼의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거지만 나도 다른 국문과학생과의 경쟁에서 밀릴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성적, 학과에 대한 공헌도, 학년 등 여러 조건 중에서 나를 밀어내고 거기 들어갈 사람은 없다고 믿었고, 당당히 신청을 해서 4학년 때에 나도 삼의원에 들어갔다.
내가 삼의원에서 방을 배정받았을 때에 같은 방을 쓰게 된 학생이 지리학과의 기중이였다. 그때 기중이는 2학년이었는데 어떻게 삼의원에 들어왔는지는 잘 모르겠고, 썩 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나는 나보다 저학년이거나 나이가 아래면 마치 동생이나 하인 부리듯 하는 성격이었으니 누구도 나와 함께 지내는 게 좋지는 않았을 거였다.
기숙사에 만나 금세 가깝게 지낸 친구가 기계학과의 동호였다. 동호는 나를 모르는 학생이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전해인가 교양국어의 여름방학 과제물을 낸 기계학과의 학생 중에 동호가 있었다는 것을 내가 기억했기 때문이다. 방학 중 어느 날 학회사무실에 갔는데 채점을 하던 하진 조교가 나를 불러서 가봤더니, 어느 학생의 과제물을 보여주는 거였다. 아주 깔끔하게 제본을 하고 내용도 충실했지만 맨 마지막에 “저는 가난한 고학생입니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학교를 다닐 수가 없으니 선처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솔직히 맹랑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진 조교의 말에 의하면 과제물 중에서 가장 성의 있게 잘 해낸 것이라 점수를 안 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머릿속에 남아 있던 이름이라 처음 소개하는 순간에 바로 기억이 났다. 동호는 내 고교 동창인 용인이와 같은 학과의 같은 학년이었고, 나와 만나는 순간에 의기투합했다. 그렇게 만나서 우리는 1년을 동고동락하게 되었다.
기숙사 학생 전부가 100명이 채 안 되어서 기숙사라기보다는 대가족의 집안 같았다.
삼의원에는 한의대학생들이 많았다. 의대학생과 법대학생도 많았지만 전체 수로는 한의대학생이 가장 많아 20여 명 가까이 된다고 했다. 모두 다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지만 한의대에 다니는 재동이, 희섭이, 상래, 종현이와 여학생 몇 과도도 가깝게 지냈다.
삼의원에서 만나, 오랫동안 돈독히 지내는 사람이 한의학과에 다니던 희섭이다. 희섭이는 아주 겸손하고 예의가 바라서 나와 동호가 무척 좋아했다. 다른 사람들과도 친하게 잘 지냈지만 희섭이는 좀 특별한 관계로 계속 이어졌다. 우리는 졸업한 뒤에도 계속 만나는 사이가 되었고 희섭이 부모님과 누님들과도 조금은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고,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다 희섭이를 알고 지냈다.
삼의원에서 만난 여학생 중에서 가깝게 지낸 사람은 가관과의 미숙이와 식영과의 은옥이였다. 둘 다 문리대와 가까운 점도 있었지만 붙임성이 있어서 나와 동호가 다 좋아했다. 미숙이는 천안이 고향이었고 아버지가 한화계열에 다니고 계셔서 내가 한화에 원서를 낼 적에 그 아버지께서 추천인으로 이름을 올려주시기도 했다. 수명이가 천안이라 미숙이네 집안에 대해서 조금 안다고 했다. 은옥이는 키가 작은 것이 좀 흠이었지만 명랑 쾌활하여 누구나 다 좋아할만한 숙녀였다. 나는 은옥이 같은 동생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삼의원에 있으면서 제일 황당했던 일이 한 달에 한 번 정도 하는 회의였다. 나와 동호는 회의문화에 익숙하지 않아서 회의가 30분 이상 진행이 되면 몸이 뒤틀리고 머리가 답답한데 삼의원의 회의는 보통 여덟 시에 시작하면 열두 시가 다 되어야 끝이 났다. 내가 보기엔 그리 중요한 얘기도 아닌데 서로가 말꼬리를 붙잡고 계속 이어가서 끝을 자를 수가 없었다.
삼의원에서 하는 공개행사가 1년에 한 번 있을 때에 가족들이 올 수 있었다. 나야 어머니가 그런 자리까지 오실 수는 없었고, 가깝게 지내던 정숙이, 은경이, 아네스가 왔었다. 삼의원의 내 방에 왔던 여자들은 그 세 사람과 영희와 미경이가 전부였다.
삼의원은 방학 중에는 문을 닫았다. 학생들이 대부분 집에 내려가기 때문이었다. 여름 방학에는 문을 닫아도 많은 학생들이 밥을 다른 곳에서 먹거나 해 먹으면서 기거했지만 겨울방학 때는 보일러도 가동하지 않아서 문을 닫은 삼의원에서 생활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갈 곳이 없어서 거기서 4학년 겨울방학을 혼자 보냈다.
관리하는 아저씨가 있어서 문을 열고 닫고 하는 것은 문제가 없어, 그냥 거기 있었던 거였다. 더운 물이 나오지 않아서 학교 에 가 찬물로 세수하고 밥은 사먹거나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지냈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 냉방이었지만 그때는 추위를 모를 때라 지낼 수 있었다.
삼의원에 있으면서 낭패를 본 일이 한 번 있었다. 졸업 직전인 11월에 한화그룹에 입사원서를 내고 내 연락처를 삼의원으로 했다. 원서를 마감하고 1주일이 지나도 아무 연락이 없기에 안 된 줄 알고서 대전에서 있은 재진이 약혼식에 내려갔다. 용인이와 둘이 갔는데 내가 내려간 오후에 삼의원으로 서류전형에 합격했으니 면접 보러 오라는 전보가 왔던 거였다.
약혼식은 토요일이라 끝나고 올라왔으면 갈 수 있었을 것을 약혼식에 온 우리 친구들, 여자의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고 기분이 거나해져서 다시 재진이, 천범이, 정재, 용인이와 취하도록 마셨다. 그러고는 너무 취해 용인이와 나는 대전에서 잠이 들었다. 아침에도 힘이 들어 그대로 누워 있다가 간신히 일어나보니 열한 시가 넘었다.
삼의원으로 돌아왔더니, 동호가 사방으로 연락을 다 해보았지만 아무도 내가 간 곳을 몰라서 면접을 보러 가야한다는 전갈을 못했다고 발을 구르고 있었다. 많이 아쉬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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