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2012. 3. 27. 18:26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거리만이 그리움을 낳는 건 아니다 / 아무리 네가 가까이 있어도 / 너는 충분히 가깝지 않았었다.

 

내가 좋아하는 세 번째 미경이는 84학번 미경이다. 84학번 미경이가 막내인 셈이다. 내가 4학년에 다닐 적에 85학번이 1학년으로 들어와 다녔지만 내가 학회의 일을 맡고 있지 않을 때라 1학년과 가깝게 지낼 일이 별로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은희와 혜영이가 있기는 하지만 나이 차가 많아서 미경이네들과는 달랐다.

 

미경이는 84학번이라고 해도 나이는 83학번 미경이와 같고 생일도 한 달 정도 빠르지만 학교에 늦게 들어와서 생일이 빠른데도 후배가 된 거였다. 두 사람이 서로 가깝게 지내게 된 것은 내 바람이 컸다.

미경이는 예의가 바르고 붙임성이 있어서 좋았다. 살이 좀 통통하게 쪄서 동글동글했지만 내게는 날씬한 아이들보다 더 좋아보였다. 미경이는 늘 멋을 내기보다는 수수한 차림이었고 어떤 때는 털털하다고 할 정도로 성격이 시원시원했다.

 

미경이는 고전문학이 아니라 현대문학을 따라갔어도 내가 하는 일에 늘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경희대 출신 문인들의 모임인 경희문인회의 일을 도운 적이 많았다. 내가 그쪽이 아니었어도 국문과학회실로 협조가 들어오면 조교 선배들이 나에게 일을 맡겼다.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혼자서 했지만 사람이 필요할 때면 당연히 나와 가까운 후배들이 선발이 되어 나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봉사점수를 받는 것도 아니고 수고료를 챙겨 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당연한 일로 생각을 했었다. 거기에 늘 미경이가 있었다.

 

그밖에 국문과 동문회를 할 경우도 그날 일을 도울 사람들은 나와 가까운 후배들이었다. 미경이는 집이 성남이라 학교를 오가는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어떤 일을 맡기든 두말없이 따랐다. 국문과 행사의 중심에는 서 교수님과 우리 선생님이 계셨는데 두 분이 다 미경이를 귀여워하셨다.

 

미경이는 보길도와 흑산도 답사를 같이 갔었다. 보길도로 갈 때는 우리 선생님과 중섭 조교, 79학번 응백이, 미경이, 나 이렇게 다섯밖에 안 되었다. 여정은 아주 좋았지만 너무 단출한 식구라 남들이 보면 가족이 여행을 온 줄로 알 정도였다.

 

나는 미경이가 혼자라고 부담스러워 할까봐 걱정을 했지만 미경이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서 좋았다. 처음 계획 때는 83학번 미경이와 둘이 같이 가기로 했으나 가기 하루 전날 84학번 미경이가 빙판길에서 넘어져 얼굴을 다쳐 못 간 거였다.

 

보길도에서 나올 적에 미경이가 뱃멀미를 해서 조금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많이 심하지는 않았다. 나는 무엇을 타든 멀미 같은 것은 해 본 적이 없어서 멀미하는 사람들의 고통이 어떤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는 순천 송광사를 들렀다가 구례 화엄사를 가기 위해 구례에서 잤다. 이날 응백이가 목포로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가서 우리는 네 식구로 줄었다. 민박이 아니고 여관이라 방을 둘 빌리기도 그래서 하나만 빌렸다.

 

다른 것은 다 괜찮지만 선생님께서 코를 심하게 곯으시는 것이 문제였다. 예민한 성격이라면 같이 자기가 어려울 정도였는데도 미경이는 아무 말 없이 잘 잤다. 지금 같으면 그게 이상할지도 모르나 예전에는 다 식구 같아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미경이가 나하고 같이 돌아다니면 다들 남매냐고 물어서 좋았다. 괜히 애인이냐고 묻거나 하면 아니라고 하면서도 얼굴이 붉어졌겠지만 남매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보길도 답사를 같이 갔다 와서 내가 미경이에게 붙여 준 별명이 포비였다. 포비는 미래소년 코난이라는 만화영화에 나오는 코난의 친구로 무엇이나 보면 맛있겠다.’라고 말하는 아이다. 미경이가 무엇이나 맛있게 먹어서가 아니라 그 쾌활한 웃음이 포비와 닮아서였다.

 

흑산도에 갔을 때는 영희와 정미, 두 미경이가 같이 갔다. 82학번인 두 선배가 게으른 줄을 내가 잘 알기에 걱정을 했지만 두 미경이가 먼저 알아서 다 해준 덕에 아주 즐거운 여행이었다.

 

대학 다닐 적에 미경이가 쾌활하게 웃던 그 웃음은 내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나는 결혼한 뒤에도 미경이를 자주 만났다. 미경이가 대학원에 진학하여 계속 회기동으로 다녔기 때문이었다. 나와 가깝게 지낸 사람들은 내 덕에 다 미경이와 가깝게 지냈고 집사람과도 아주 친했다.

 

미경이가 남자친구를 만난다고 들었을 적에 내가 아는 사람이라 아주 좋아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남녀관계는 남이 깊이 알 수가 없는 문제라서 관여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 친구에게 미경이처럼 좋은 사람은 절대 없을 거라고 얘기해 주었다.

 

미경이는 언제나 쾌활했지만. 잠시 시련을 겪으면서 몸이 여위여서 주위 사람들이 많이 걱정했다. 우리 선생님도 안타까워하시면서 시간이 약이라고 하셨다. 나는 틈틈이 시간을 내서 미경이를 만났고 여러 위로의 말을 건네곤 하였다.

 

미경이는 경기도 임용고사에 합격하여 교직에 나갔다. 미경이는 집이 성남이었고 부군도 성남사람이어서 성남에서 교직을 시작했다. 나는 미경이가 임용고사에 합격한 것이 너무 좋았다. 미경이가 대학원을 졸업한 뒤에 고학력 실업자가 될까봐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임용고사에 합격하기는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같다고 해서 임용고시로 불릴 정도였다. 그 시험에 합격해서 갔더니 대부분 사범대학 출신이고 문과대 출신은 둘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드물다고 했다.

 

두 미경이는 결혼식도 같은 날 했다. 83학번은 조치원, 84학번은 성남에서 같은 날 해서 두 곳을 동시에 갈 수가 없었다. 나는 부득이 조치원으로 가고 성남은 사진학과에 다니는 제자를 보냈다.

 

성남으로 간 제자는 사진을 잘 찍어 왔지만 나는 조치원 가는 고속도로가 막히어 결혼식장에 도착하니 이미 폐백까지 끝난 뒤였다. 다른 사람들 결혼식 사진은 많이도 찍었지만 정작 찍었어야 할 두 미경이의 결혼사진은 내가 찍지 못했다. 내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사진을 찍어주는 것밖에 없었으나 공교롭게도 두 미경이 다 못 찍은 거였다.

 

나는 우리 식구들과 두 미경이네와 가끔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다. 아이들이 조금 차이는 나도 서로 알고 지낼만할 때에 자주 만나면 나중에도 가깝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그게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삶이라는 것이 다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더욱 더욱 가깝게, 거리만이 아니라  충분히, 실컷 가깝지 않았었다. /  더욱 더욱 가깝게,
거리만이 아니라 모든 게, /  의식까지도 가깝게 /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움은.

 

-전혜린, 그리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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