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7. 18:46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는 것보다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국문과 82학번에서 공부를 잘 했던 여학생 중에 한 사람이 미경이었다. 여자들은 대부분 장학금을 타기 위해 공부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내가 보기엔 미경이는 국문과 학생답게 문학에 관해 남들보다 많이 공부했다고 생각했다.
1학년 때의 미경이는 그저 귀엽게 생긴 소녀였다. 미경이는 작달막한 키에 동글동글한 것이 예쁘다기보다는 귀여웠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 같다. 미경이는 다른 국문과 여학생들처럼 시골스럽지가 않아서 내가 가까이 하기엔 거리감이 있었다.
나는 미경이에게 ‘차돌’같다는 말을 가끔 했다. 아주 단단하고 둥글둥글한 차돌이 똑똑하고 예쁜 미경이 이미지와 많이 닮아서였다. 조약돌이라는 말을 안 쓴 것은 조약돌은 닳고 닳아서 된 거라 미경이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미경이는 은경이, 정숙이와 셋이서 친했다. 미경이는 과자, 특히 새우깡을 아주 좋아해서 지하철을 탈 때는 새우깡을 사가지고 타서 얌얌거리며 먹기를 좋아하고 ‘맛있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었다. 나는 대학생이 그럴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웠다. 시골에서는 다 큰 사람이 무엇을 먹으며 다닌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82학번이 2학년이 되던 봄에 남학생들이 문무대에 입소를 했다. 학교가 2박 3일 휴강을 할 적에 우리는 수락산으로 놀러 갔었다. 수명이, 선일이, 대희, 미혜 씨, 정숙이, 은경이, 미경이가 같이 가서 하루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그때는 그런 모임을 주로 대희가 주선했다. 내가 미경이와 가깝게 지낸 것은 그때부터였다.
미경이는 문학평론 쪽에 관심이 많았다. 그때 우리 국문과에 평론을 맡고 계신 분이 최동호 교수님이셨다. 최 교수님은 연세가 많지 않아서인지 무척 깐깐하고 공부를 많이 시키기로 유명하셨다.
학생들이 공부를 안 해오면 앞에서 면박을 잘 주셨기 때문에 최 교수님 강의시간이 되면 긴장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최 교수님 강의시간에 그래도 활발하게 대답하는 여학생으로는 미경이가 단연 돋보였다. 미경이는 그만큼 열심히 했었다.
2학년 가을에 강화도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그때도 대희가 주선해서 미경이, 미혜 씨, 정숙이, 은경이와 선일이, 대희, 내가 갔었다. 석모도로 가서 보문사까지 갔었다. 그런 모임을 가지면서 미경이도 우리와 같이 어울리는 멤버가 되었다.
미경이는 졸업하고 1년쯤 뒤에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에 진학했다. 그 시절 국문과에서 여학생이 일반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여자들은 대부분 취업을 하려고 했다. 여학생이 국문과를 졸업한 뒤에 교직에 나가면 가장 괜찮게 생각했었다.
미경이는 교직과목을 이수할 자격을 갖추어서 교직을 이수해 교원자격증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반대학원에 진학한 거였다. 미경이가 공부를 잘하기도 했지만 취업이 안 되어서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88년 2월에 교육대학원 원장실로 선생님을 뵈러 갔다가 거기서 미경이를 만났다. 미경이는 대학원에서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과 선생님께 인사를 하러 왔다고 했다.
그날 몇 사람에게는 갑자기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휘경여중에 있던 74학번 태철이 형이 경희여고로 자리를 옮기면서 휘경여중에서 임용할 남자 교사 한 명과 기간제 교사 한 명을 추천해 달라는 의뢰가 교육대학원으로 들어왔던 거였다.
교육대학원 원장이신 우리 선생님이 그 자리에 있던 나에게 적절한 사람을 추천하라고 말씀을 하셔서 내가 두 사람을 추천하게 되었다. 나는 바로 80학번 익성이에게 전화를 했다. 평택에 있는 한광여고인가로 간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이왕이면 서울에 있게 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임용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 우선 기간제로 갈 교사로는 미경이를 추천했다. 어차피 공부하는 것이니까 미경이가 학교에 나가면서 애들을 가르치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내가 미경이에게 의사를 물었더니 갈 수 있으면 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둘이 다 휘경여중으로 가게 되었다. 사람에게는 종종 운이 작용한다고 들었지만 바로 이게 운이었다.
미경이는 휘경여중에 2년 정도 기간제로 근무했다. 내가 회기동으로 선생님을 뵈러 가면 미경이에게도 전화를 해서 같이 만나 뵙곤 했었다. 2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인 8월 여름방학 어느 날 미경이가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홍제동에서 만났었다.
미경이는 그날 내게 이제 기간제를 그만 하고 싶다고 했었다. 학교를 그만 두고 문학공부에 전념하겠다는 얘기였다. 미경이는 정식으로 임용이 된다는 보장도 없는 상태여서 계속 근무하기가 부담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어떻게 손을 쓸 수 있는 문제도 아니어서 말릴 수가 없었다. 나는 그날 저녁에 익성이에게 전화를 해서 미경이 문제를 물었다. 학교에서 발령을 내줄 방법이 전혀 없느냐고 했더니, 익성이는 놀라면서, 그러잖아도 국어과 선생님들이 미경이가 발령 문제를 학교에 건의해서 협의 중에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전해달라고 했다.
바로 미경이 집에 전화를 했더니 미경이가 집에 없고 동생이 받았다. 나는 급하게 내가 들은 얘기를 동생에게 전달하고서 절대 학교에 사의를 표하지 말고 먼저 나에게 전화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저녁 늦게 미경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미경이에게 익성이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하고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했다. 미경이는 고맙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일주일이 채 안 되어서 미경이가 정식으로 임용이 되었다고 연락을 주었다.
나는 무척이나 흐뭇했다. 이것은 운이 아니라 미경이 자신이 열심히 해서 얻은 노력의 결과였다. 미경이는 어디에 가든 무엇을 하든 잘 할 거라고 믿는 내 판단이 정확했다는 것을 보여준 거였다.
미경이는 누구보다도 솔직담백했다. 여자들은 속내를 잘 들어 내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 상식이지만 미경이는 그렇지 않아서 좋았다. 나는 좋은 것과 싫은 것을 명확히 구별하는 사람이라 미경이의 그 솔직담백함을 좋아했다.
미경이는 자기네 아이들이 자라자 미련 없이 교직을 그만두었다. 그것도 미경이다운 선택이었다. 이런 멋진 후배가 있으니 이 또한 내 복이라고 생각한다.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사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유치환, 「행 복」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