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7. 18:57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말하지 않아도 없는 것은 아니다 / 나무들 사이에 풀이 있듯
내가 82학번 은경이하고 언제부터 가까이 지냈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은경이는 정숙이하고 앞뒤 번호여서 1학년 때는 둘이 늘 같이 다녔다. 우리 나이 든 사람과 가까이 지낸 여학생은 순희, 정숙이, 은경이, 미경이해서 넷이었다.
내가 좋아한 영희는 나하고만 가까웠고 다른 사람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2학년이 되면서 정숙이가 휴학을 하자 외톨이가 된 은경이는 우리와 잘 어울렸다. 1학년 때는 ‘우리’라고 하면 정식이 형, 대희, 선일이, 나 이었다가 2학년 때부터는 수명이, 대희, 선일이, 나로 바뀌었다.
정식이 형을 제외하면 우리는 다 57년생 닭띠였다. 흥술이도 ‘우리’가 될 수 있었지만 공부를 하느라 우리처럼 늘 술집에 다니지는 못했다. 은경이는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지만 내가 부르면 언제나 같이 나갔다.
우리는 주로 회기역 부근에서 술을 마시고 은경이는 1호선 지하철을 탔고, 수명이는 청량리로 가서 17번 버스를 타고 역삼동으로 가고, 나와 선일이, 대희는 38번 버스를 탔다.
남자들도 그랬지만 여자들도 끼리끼리 놀았다. 우리와 어울리는 순희와 은경이, 미경이도 그들과 어울리는 여학생들이 있었지만 그 팀들이 다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문제였다.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싫어하면 당연히 거기도 나를 싫어하게 되는 거라 우리와 어울리면서 그쪽에 가면 좋은 소리 못 들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은경이가 내게 한 번 대들었다가 눈 밖에 난 적이 있었다. 내가 보니까 은경이가 자주 수업시간에 늦게 들어오는 거였다. 그게 한두 번이 아니고 자주 그래서 은경이에게 내가 지적을 했다. 조금만 일찍 출발을 하면 집이 멀어도 충분히 올 수 있을 텐데 왜 지각을 하냐고 물었더니 은경이가 갑자기 화를 벌컥 내서 나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그 뒤로 나는 몇 달 간 은경이를 만나지 않고 지냈다. 내가 은경이를 부르지 않으면 대희가 불러야 할 것이나 은경이에 대한 내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것을 대희가 알고 있어 대희도 은경이를 쉽게 부르지 못했다.
나중에 들으니 은경이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집안 살림을 은경이가 다 하느라 늘 시간에 쫓긴다고 했다.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할 것이지 걱정이 되어서 말을 한 내게 화를 낼 일인가? 또 시간이 지난 뒤에라도 은경이가 나를 찾아와서 집안사정을 얘기하고 사과라도 했더라면 나도 미안하다고 했을 거였다.
3학년 초에 학회장 선거를 앞두고 나를 걱정해주는 은경이 마음이 고마워 나는 그동안의 서운함을 잊게 되었다. 4학년이 되면서 학기 초에 은경이가 학교에 나오질 않았다. 수강신청을 해야 하는데도 통 보이지가 않아서 걱정이 되었다. 내가 집으로 전화를 했더니 은경이는 휴학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남자가 군에 가기 위해서 휴학을 하면 복학을 하지만 여자들은 한 번 휴학을 하면 그대로 그만두기가 쉬워 그냥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은경이더러 휴학을 하더라도 빨리 학교에 나오라고 했다.
은경이가 휴학원을 써 갖고 국문학과 사무실로 왔길래 왜 휴학을 해야 하는지 내가 물었다. 은경이는 동생이 둘이나 대학에 가야 해서 형편이 어렵고 어머니 병환이 심해져서 집에서 간병을 해야 된다는 거였다.
은경이 사정이 많이 딱했지만 그대로 휴학을 하면 안 될 거였다. 나는 그런 사정으로 휴학을 하게 되면 영원히 졸업할 수가 없을 거라고 무슨 수를 쓰든 다녀야 한다고 은경이를 설득했다. 내가 학교에 조교로라도 남으면 모르겠지만 내 형편으로 나도 졸업하면 바로 취업을 해야 되기 때문에 지금 어려워도 다녀야 한다고 얘기했다.
내가 국문과 조교 선배에게 학자금 융자신청서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는 은행에서 발행한 그 신청서가 있어야 싼 이자로 융자를 받을 수 있었다. 다행히 은경이는 융자신청서를 받을 수가 있었다.
다음 날은 내가 은경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수강신청을 했다. 내 얼굴이 우리 과에서는 보증수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교수님들도 내가 부탁을 드리면 들어주셨던 때였다. 시일이 지나기는 했지만 별 문제없이 수강신청이 돼서 은경이는 다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내가 3학년 때에 정말 기절할 만큼 놀랐던 일이 있었다. 국문과 3학년 여학생 중에 밥을 할 줄 안다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애들은 그렇다 해도 그때 이미 은경이는 여자들이 집에서 해야 하는 것을 다 알고 있었고,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은경이가 대견스러웠고 좋았다. 나는 은경이를 내 친구에게 소개를 하려고 점을 찍었다. 나하고 고등학교 때 가장 친했던 용인이가 3학년 2학기에 기계과에 복학을 해서 같이 다니고 있었다. 용인이하고는 친구였지만 내 친동생 같기도 했고 용인네 집에 대해서는 나도 알만큼 알고 있었다. 용인이에게 은경이가 가장 좋은 짝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가만히 보니 용인이는 어디 소개팅에서 만난 여자가 있었다. 나도 두어 번 봤지만 그 아가씨가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아가씨는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내가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 자체를 트집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그 아가씨는 당차게도 “오빠가 나를 사랑한다면 당연히 나를 위해서 교회에 다닐 수 있지 않은가?” 라고 얘기했다는 거였다. 나는 그 말을 뒤집었다. ‘오빠를 사랑한다면 당연히 오빠를 위해서 교회를 포기할 수 있지 않은가?’를 내밀며 용인이에게 그 여자를 그만 만날 것을 종용했다.
나는 용인이에게 나이가 자꾸 들어가는데 괜히 동정심으로 오래 만나다가 헤어지면 상처가 더욱 커질 것이니 결혼 상대가 아니라면 과감하게 정리하라고 얘기했다. 용인이 성격에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도 그쪽에서 매달리면 끊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내가 알고 있었다. 내가 잔인한 것 같지만 인연이 아닌 것을 오래 붙잡고 있다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거였다.
내 강요로 끝난 것은 아니겠지만 용인이는 그 아가씨와 결별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은경이와 만나게 되었다. 몇 번의 고비가 있기도 했지만 결국 은경이와 용인이가 결혼했다. 내가 나서서 주례는 우리 선생님으로 모셨다. 나는 사진을 찍을 준비로 갔지만 전날 함을 팔러가서 마신 술이 안 깨어 찍을 수가 없었다.
나는 명절에 고향에 성묘가면 늘 용인네 들러서 부모님께 인사를 한다. 지난 23년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 인사하러 가면 시댁에 온 은경이를 만난다. 은경이네 애들은 나를 ‘큰 아버지’라고 부른다. 큰 아버지라고 불러도 괜찮은 사이일 거다.
숲 사이에 오솔길이 있듯 // 중요한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삶이었다.
-최승자, 「중요한 것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