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7. 19:01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사랑은 언제나 좀 서운함이어라 / 내가 찾을 때 네가 없고 / 네가 찾을 때 내가 없음이여
내가 영희를 처음 안 것은 병환이 묘에 갔다 오면서이다. 복학하고 한 학기가 다 지났었지만 내가 알고 지낸 여학생은 순희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2학기가 시위와 혼란 속에 훌쩍 지나가서 다른 일은 별 기억이 없었다.
시위 구경하다가 가까이 하게 된 미희와 편지 몇 통 주고 받으며 겨울방학이 갔다. 2학년이 되면서 내가 새로 찾은 사람이 영희였다.
영희는 강의시간에 무척 열심이었고 늘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2학년 1학기 강의에 아일랜드에서 오신 오록 교수님의 영문학시간이 있었는데 선생님은 학생들 이름을 발음하기가 어렵다고 늘 날더러 출석을 부르게 시키셨다.
그 강의가 꼭 첫 시간에 있어서 지각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영희는 자기와 친한 아이들 셋을 책임지고 있었다. 안 온 것이 확실한데 영희가 대답을 하는 거라 나는 물론 다 결석으로 처리했다. 영희는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늘 친구들 대답을 하고 있었다.
이런 저런 일로 나는 영희와 아주 가깝게 지냈다. 영희와 가까워지면서 한 가지 걱정이라면 영희가 나와 동성동본이라는 거였다. 우리는 전주 이가(李家)로 파(派)만 달랐다. 그때만 해도 동성동본은 결혼할 수가 없었다. 영희는 애교스럽지는 않았지만 버릇없어 보이지도 않았다.
시험 때가 되면 내가 영희 노트를 많이 빌려 썼다. 나는 늘 강의시간에 뒷전에 앉아서 듣기만 했지 필기를 한 적이 없어서 시험 때가 되면 필기를 깨끗이 한 노트가 필요했었다.
영희와 급속히 가까워진 것은 울릉도 답사를 갈 때였다. 아니 가기 전까지였다. 나는 영희가 좋아서 영희를 내가 조장으로 맡은 조에 합류시켰다. 거기에는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정미도 있었다. 영희와 정미는 아주 친한 사이라 둘을 갈라놓기는 좀 그래서였다.
1학년인 은경이와 진경이도 우리 조에 있었다. 울릉도에 가서 보니 2학년인 영희와 정미는 늦게 일어나기 일쑤이고 취사는 1학년인 은경이와 진경이가 다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무척 실망스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이 내 사고의 모순이었다.
나는 무슨 일을 할 때에 후배나 아우가 있으면 당연히 아랫사람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남들이 그럴 때는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어찌됐든 영희가 후배에게만 일을 시키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고 답사진행에 있어 사사건건 나에게 대드는 것이 엄청 싫었다.
나는 다소곳한 여자를 좋아했다. 남자에게 대드는 여자, 특히 내게 대드는 여자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학교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던 영희가 울릉도에서 보여 준 행동은 내게 큰 실망을 안겨 준 거였다. 나는 한 번 싫으면 그것을 다시 돌이키기가 쉽지 않은 성격이었다. 나는 영희 때문에 울릉도에서 씁쓸한 마음으로 나와 하조대에서 이틀을 머물다가 마지막 날은 설악동에서 보내게 되었다.
우리는 그날 밤을 새워 새벽 네 시까지 술을 마셨다. 다들 내가 가장 많이 수고했다면서 서울에 가면 감사패라도 만들어 주겠다고 했지만 그것은 순전히 말잔치였다. 나는 네 시에 자리에 들면서 일곱 시까지 자면 세 시간은 잘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일곱 시에 일부가 금강굴에 간다기에 나도 거기 갈 생각을 한 거였다.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엉겁결에 일어나보니 다섯 시 반인데 영희가 열이 나고 아프다고 정미가 나를 깨운 거였다. 영희가 걱정이 되면서도 ‘아쉬울 때만 내가 필요하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는 코펠에 물을 끓여 영희에게 진통제를 먹였다.
나는 서울에 와서 답사에 관한 기록과 사진을 정리하면서 국문과 사무실에서 지냈다. 1학기 성적이 나와서 보니 내가 1등이었고 영희는 7등쯤 이었다. 하루는 영희가 전화를 해서 자기 성적을 묻길래 잘 나왔더라고 대답을 해주니까 내 성적을 물었다. 그래서 ‘그냥 괜찮게 나왔어’ 하고 전화를 끊었다.
며칠 뒤에 영희가 국문과 학회실에 와서 성적표를 보고는 내게 화를 팍 내었다. 1등을 한 것은 괜찮게 나온 것이고 7등을 한 것은 잘 나온 것이냐는 거였다. 이것은 내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다시는 영희를 상대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감정이 바로 얼굴에 나타나기 때문에 내 얼굴을 상대가 보면 자기를 반기는지 꺼리는지 바로 알 수가 있었다. 2학기부터는 영희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고 부탁할 일도 없었다.
2학기 말, 국문과 졸업생 환송 백일장을 광릉에 가서 했다. 겨울방학을 얼마 앞에 두고 했으니 추울 때였다. 그때만 해도 냇가에서 고기도 구워먹고 술을 마셔도 괜찮을 때였다. 우리는 먹고 마실 것을 준비해가서 불을 피웠다. 새 학기에 학회장을 선일이가 맡을 것이라고 얘기가 되면서 학과 일에서 내가 소외되는 기분이 들었고 변두리로 밀리는 것 같았다. 나는 백일장이 끝나고 술을 좀 많이 마셨다. 2학년 마치고 군에 갈 친구들하고 어울려 취하도록 마셨다.
다들 버스를 타고 떠나고 몇 사람만 남아서 술판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나는 조금 취했고 약간 울적한 기분으로 정류장에 갔더니 거기 영희가 혼자 있었다. 영희는 집이 동두천이어서 서울로 가는 버스가 아니라 반대편인 의정부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거였다.
내가 영희를 불렀다. 2학기 들어서 처음 마주했다. 생각하니 너무 빨리 변하는 세상이 우스웠다. 나도 그런 부류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온 영희더러 내가 사진 한 장 같이 찍자고 해서 같이 사진을 찍었다.
내가 영희에게 ‘영희야 너 정말 사랑했었는데…….’ 했더니, 영희는 ‘형, 형은 사랑했었어요? 난 지금도 형을 제일 사랑해요.’했다. 그 말 한 마디에 그동안 가졌던 섭섭한 마음이 순간에 눈이 녹듯 사라졌다. 울적했던 마음도 바로 풀려서 아주 유쾌해졌다. 영희는 의정부로 가는 버스를 탔고 우리는 청량리로 가는 버스를 타고 서울로 와서 다시 한 잔 더 했다.
영희하고는 정말 오랜 시간을 좋아하고 미워하고를 반복했다. 아니 영희도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혼자서 그런 거였다. 나는 한때 동성동본이 결혼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두었었다. 그게 다 영희 때문이었다. 그게 사랑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내가 영희를 무척 좋아했다는 거는 내 주변 사람들이 다 안다. 나는 아직도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구분할 줄 모르는 바보다,
후회는 모든 것이 지나간 뒤에 / 일어나는 바람이려니
그리움은 더욱 더 사라진 뒤에 / 오는 빈 세월이려니
-조병화, 「사 랑」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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